모든 미래는 순간의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그때 그의 손을 잡지 않았더라면...
절망 속에 허우적대던 나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남자답고 씩씩했지만, 조금은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민준.
내 사정을 알고도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그의 무게감이 좋았다.
“내려와. 집 앞 주차장이야.”
핸드폰 너머 그의 목소리가 예전과 달리 명령조로 들렸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계단을 내려가니
젖은 아스팔트가 가로등 불빛을 머금고 번들거리고
축축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차에 타.”
자격지심일까.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날카롭게 다가와 거슬렸다.
그를 의식하며 대꾸 없이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
차 안은 복숭아 방향제의 인공적인 냄새와 빗소리로 가득하고 창밖 유리에 맺힌 빗방울은 눈물처럼 길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사정이 안 좋아. 우리 결혼 미뤄야 할 것 같아.
아니, 어쩌면 안 하는 게 좋을지도 몰라... 아니다, 너 그냥 좋은 사람 만나.”
민준은 대답하지 않고 두 손으로 핸들을 움켜쥔 채 창밖만 바라보고 한숨만 내쉬었다.
무거운 한숨이 차 안 공기를 흔들고 숨결에 섞인 김이 유리 위로 얇게 겹겹이 쌓여갔다.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문고리를 잡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그가 마침내 터뜨리듯 말을 쏟아냈다.
“달라지는 건 없어. 청첩장도 다 돌렸고, 그냥 진행하는 거야.”
내 눈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고
흐릿하게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눈물 너머로 번졌다.
그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았고 나는 힘을 주어 그의 손을 놓으려 했지만 손이 아플 정도로 더욱 세게 쥐어와,
결국 설득하듯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너 돈 있어? 나도 없어.
우리 집, 이제 내가 기둥이 될지도 몰라.
현실적으로 생각해.
난 너한테 짐이 될 거야.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어.
미안해, 나 간다.”
나는 차 문을 열고 빗속으로 뛰쳐나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삼 년 동안 쌓인 정을 억지로 떼어내려니,
함께 붙어있던 살점이 뜯겨 나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 고통은 한동안 내 안을 파고들었고,
눈물이 마른자리에 남은 건 공허함뿐이었다.
몇 달 동안, 어쩌면 그의 전화를 피하면서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그는 우리 집 문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라하게 젖은 눈빛으로, 제발 떠나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의 손이 뒤돌아서는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자기를 믿으면 죽을 때까지 너를 지켜주겠다'라는 말 한마디에,
나도 모르게 무너진 마음이 기댈 곳을 찾은 듯했다.
결국 못 이기는 척,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우리는 예정대로 결혼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