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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비상계단에 머문 하루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달라져 있을 거야.

by 김하루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달라져 있을 거야.


시댁 식구들이 떠나자, 왁자지껄하던 웃음소리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남은 건 식탁 위에 엎질러진 국물 자국과 식은 공기, 그리고 나와 남편뿐이었다.

싱크대엔 설거지거리가 산처럼 쌓여 있었고, 조카들이 흘리고 간 음식 찌꺼기는 식탁 위에 말라붙어 있었다.

나는 고무장갑을 끼려다 멈췄다.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남편이 눈에 들어오자

이유 모를 미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올랐다.

성큼 다가가 그가 덮고 있던 이불을 확 걷어냈다.


“나 솔직히 알아. 나보다 힘든 사람들 많다는 거.

그래서 힘들단 말도 안 하잖아.

근데 지금은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어.

제발 설거지라도 좀 도와주든가, 음식물 쓰레기라도 버려줘.”


남편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보다가 리모컨을 집어던졌다.

ㅡ 건전지가 빠진 리모컨이 바닥을 구르며 소리를 냈다.

나는 놀라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며 그를 바라봤다.


“뭐 하는 거야? 애기 놀라게!

이제는 물건까지 던져? 제발 좀 적당히 해.

나도 한 번 미쳐볼까?”


그는 아무런 대답 없이 내 손에서 이불을 낚아채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은 건 부서진 리모컨과 싸늘해진 분위기뿐이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패딩을 꺼내 입었다.

‘나도 미쳐볼까.’

그 말이 협박이 아닌, 그저 집 밖으로 나오는 일뿐이라는 게 서글펐다.


현관문을 여니, 찬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갈 곳이 없어 비상계단에 몸을 숨겼다.

핸드폰을 꺼내 연락처를 훑어봤지만,

마땅히 전화할 사람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배가 남산만큼 불러 있는 임산부인 나는,

그저 비참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때, 중학교 시절 단짝 친구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전화를 걸었다.


“야, 지연이야? 오랜만이다! 신혼에 빠져서 연락도 없더니?”


“응, 승연아. 잘 지냈어? 요즘 뭐 해?”


“나? 둘째 보려고 노력 중이지. 오빠가 게을러져서 분리수거도 밀리고,

내가 잔소리 좀 하는 중이야.

근데 너, 민준이는 잘해주지? 첫애라 난리 났겠다?”


“응... 잘해주지. 아니, 사실은 요즘 좀 달라졌어.

임신 초반엔 잘했는데, 요즘은 나보고 헐크 같대.”


“뭐라고? 헐크? 웃기네! 예전엔 너 보고 ‘내 보물상자’라고 쫓아다니던 놈이!”


“아들이라 그런가 봐. 배도 커지고, 얼굴도 붓고. 그래서 그런가?

저번 달부터는 말도 안 걸어.”


“진짜 미쳤다. 애 낳고 몸조리 잘하고, 다시 예전 너로 돌아와. 너 인기 많았잖아. 운동 좀 하고, 음식 조절하면 돼. 기죽지 마. 민준이 변해도 너무 변했네.

지연아, 나는 우리 어렸을 때, 명랑하고 즐겁던 너밖에 기억이 안 나.

우리 지연이, 빨리 예전처럼 웃는 얼굴로 돌아가자."


그녀의 명랑한 목소리와 남편 흉보는 말에

묘하게 위로가 됐다.

역시 여자에겐 수다가 약인가 보다.


“응, 고마워. 돌잔치 때 갈게.”


“그래! 그때는 예쁘게 꾸미고, 남편한테 ‘내 여자는 아직 살아 있다’ 보여줘. 긴장 좀 하게!”


“응, 고마워. 나 들어갈게.”




(시절의 다른 시점)


우리는 같은 시절을,

각자의 시점으로 바라본다.


나는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엄마는 괴롭고 서러웠던 시절로 기억하며,

친구는 명랑하고 철없던 우정의 시간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시점에서

서로 같은 시절을 살아간다.


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향했다.


이상하게 비밀번호를 정확히 눌렀지만 계속 틀렸다.

벨을 눌러도,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잠시 후,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네가 나간 거니? 알아서 살아.

비밀번호 바꿨다. 나 한잔하러 간다. 전화하지 마라. 꺼놓을 거다.


나는 멍하니 슬리퍼를 내려다봤다.

잠깐 나왔다고, 짐을 싸 나온 것도 아니고

슬리퍼만 신고 집 앞에 나왔을 뿐인데,

그는 이렇게 잔인했다.


스트레스가 아이에게 전해질까 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센서등이 꺼진 복도는 싸늘했다.

손끝이 시렸지만,

아기가 추울까 패딩을 벗어 배 위에 덮었다.

비상계단에서 그렇게 한참을 추위를 피했다.


세, 네 시간쯤 지났을까.

남편에게서 다시 문자가 왔다.


나는 들어왔으니, 짐까지 챙겨서 나가.


나는 비밀번호를 눌렀다.

이번엔 문이 열렸다.


작은 옷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대충 펴고

몸을 녹이다가 서러움이 밀려와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통곡했다.


그때 문득,

어린 시절 내가 울 때면 전화기 너머로 조용히 위로해 주던

성민오빠의 따뜻한 말이 떠올랐다.

지연아, 일단 자.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달라져 있을 거야. 울지 말고, 일단 자.

아침에 눈을 뜨면 마음이 조금은 수그러져 있을 거야. 괜찮아.”

이불속에서 흐느끼던 나는

그 말에 기대듯 눈을 감았다.


세상 모든 시절이 다 다르게 흐르고 있었지만,

그날의 나는 단 하나의 바람만 품고 있었다.

내일은, 이 악몽에서 깨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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