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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사골국이 식은 밤

내 안의 불안은 어느새 아이를 향한 분리불안으로 번져갔다.

by 김하루

내 안의 불안은 어느새 아이를 향한 분리불안으로 번져갔다. 분리불안이란, 사랑하는 대상과 떨어질 때 극심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들을 재우려 낮게 흥얼거렸다. 부드럽게 입가에 맴도는 노랫소리에도 방긋방긋 웃는 이 작은 생명은 아직 잠들 기미가 없고, 나는 젖병을 소독하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신생아를 혼자 키운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벅찬 일이었다.

남편은 벌써 닷새째 연락이 없다. 그는 아직 청춘이고, 나는 이미 누군가의 엄마다.

그날 마지막 통화에서 들리던 노래방 소리와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그 뒤로는 전화도, 메시지도 없었다. 우리는 같은 서른을 살고 있지만, 전혀 다른 세상에 있었다.


나는 집에 갇힌 듯 90만 원의 생활비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언제 그가 생활비를 끊을지 몰라 아이의 ‘비상금’이라며 20만 원씩을 억지로 저금했다.

50만 원으로 분유와 아기 영양제, 기저귀를 사고 나면 남는 건 식비 20만 원뿐이었다.

커피를 끊는 건 기본이었고, 고기가 먹고 싶을 땐 달걀과 고구마로 끼니를 채웠다.


어느 날 김이 너무 먹고 싶어, 하얀 밥 위에 김 한 장 올려 먹는 상상을 하자 입맛이 절로 돌았다.

어릴 적 식탁 위, 아빠가 늘 쌓아두던 김 봉투들이 생각나서

가격을 검색해 보니 생각보다 비쌌다.

결국 김 대신 배를 채워줄 고구마를 주문하며, 나는 문득 '생각보다 풍족하게 살았었구나...'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사사로운 모든 것들이 사라질 때마다, 우리는 그때 누렸던 감사함을 미처 알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



처음엔 서러웠지만, 식탐도 줄어드니 아무렇지 않았다.

사람은 흐르는 강물처럼, 주어진 환경에 스며드는 존재인가 보다.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해 일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모빌을 보며 웃는 아기를 보면 차마 아직은 낯선 품에 맡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 안의 불안은 어느새 아이를 향한 분리불안으로 번져갔다.


'저 여린 목덜미를 아직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데, 조금만 더 크면 생각해 보자...'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아기가 잠든 밤이면

몸이 스스로 무너졌다. 면역력이 떨어지고,

온몸이 발진으로 뒤덮였다.

피가 날 만큼 긁다 울며, 그렇게 또 잠이 들었다.



오전의 공기가 살짝 풀리고

겨울의 끝자락, 봄이 오려는 냄새가 났다.

나는 아기를 꽁꽁 싸매 유모차에 태우고 마트로 나섰다.

햇살은 아직 희미했지만, 길가 공기에는 어딘가 따뜻함이 스며 있었다.


마트에 도착하니 수입 사골 잡뼈가 세일 중이었다.


‘이걸로 국을 끓이면 열흘은 먹겠구나.’


한 번도 끓여본 적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몸이 원하는 건지 사골국이 당겼다.


집에 오자마자 불순물을 한 번 끓여 버리고,

다시 팔팔 끓어오르는 냄비 속 뽀얀 국물이 우러나자,

집안이 포근하게 온기가 돌며, 엄마의 사골국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래, 몸조리나 하자. 뽀얗게 우러나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그때였다. 현관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났다.

오랜만에 집에 온 뻔뻔한 남편이었다.


나는 눈도 마주치기 싫어 서둘러 빨래를 개고 있었다.

그런데 부엌에서 터져 나온 고함이 번개처럼 쩌렁 울렸다.


“야!!!”


가슴이 철렁했다. 부엌으로 달려가자, 그는 가스레인지 위 냄비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게 뭐야? 가스비가 얼마나 나오는지 알아? 관리비 네가 내봤어? 돈도 못 버는 게 미쳤어?”


나는 얼떨떨해 물었다.


“같이 먹으면 되지 않아? 양도 많고...”


그는 코웃음을 치며 쏘아붙였다.


“너네 친정에서 시킨 거지? 가스비 아까우니까 우리 집에서 끓이라고? 그래서 나눠 먹겠다? 이거 완전 사기꾼들이네, 허허.”


“무슨 말이야, 나 그냥 몸조리하려고...”


“갔다 버려.”


그는 씩씩거리며 가스불을 꺼버리고, 문을 쾅 닫았다.

나는 그대로 멍하니 서 있었다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다시 불을 켰다.

어쩌면 배고픔이, 두려움보다 훨씬 더 컸나 보다.


한참 후, 그는 냉장고를 뒤적이며 투덜댔다.


“마실 거 없어? 진짜, 살림을 개똥같이 하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그가 던지는 모든 말에 ‘내가 잘못했나’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정신없었네, 미안.”


그저 이 상황이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그 순간, 속옷이 스치는 부위마다 또다시 발진이 올라왔다.

긁지 않으려 애썼지만, 어금니가 저릴 만큼 참다 결국 벅벅 긁어 피가 났다.

그는 한마디를 던졌다.


“더러워.”


그 말이 가슴 한가운데를 찔렀지만

나는 연고를 찾으며 서랍을 뒤적였다.


집에서 쇼하지 말고 나가서 긁어.”


그 말이 꽂히는 순간,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러면 이 간지러운 고통이 멈출 것만 같았다.


그는 어디선가 가져온 물파스를 꺼내, 억지로 내 팔에 문질렀다.


“앗 따가워, 됐어! 하지 마!”


물파스를 내리치며 외쳤다.

그러자 그는 민망한 듯 휙 돌아서 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소파에 쓰러져 울었다.

그가 곁에 있으면, 나는 늘 울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방문 사이로 빼꼼히 내다보더니, 다시 나와 부엌의 가스불을 꺼버렸다.

사골국이 아니라, 내 마음의 불을 꺼버린 듯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이해할 수 없는 거다.’


결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면, 헤어져야 한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여성 쉼터’를 검색했다.


“여보세요?”


“... 아, 잘못 걸었어요.”


그저 수화기 너머의 다정한 목소리만으로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식탁에 앉아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엄마가 떠올랐다.

만약 엄마가 회복되어 나를 찾는다면, 내가 쉼터에 있다면... 혹시라도 놀라서 쓰러지실지 걱정이 되어

결국 나는 집을 지키기로 했다.





나는 쓰레기봉투를 챙겨 들었다.

남편이 집에 있을 때는

아기를 남겨두고 마음 편히 바깥에 나갈 수 있었다.

밤공기가 뺨을 스쳤다.

입김 사이로 가로등 불빛이 은은히 번졌다.

조금 걸으니 머리가 맑아졌다.

머리가 맑아진 순간, 문득 머리에 엄마 걱정이 차올랐다.


나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


“응, 내 딸, 엄마 이제 괜찮아. 조금씩 걷고 말도 잘해.”


엄마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다.


“지우는 잘 있지? 엄마 곧 갈게. 용돈 붙여줄게, 애기 옷 사 입혀.”


나는 알겠다고 사랑한다 말하고,

눈물이 터질 것 같아 급히 전화를 끊었다.


놀이터 그네에 앉아 차가운 바람에 얼굴을 식혔다.

잠시 뒤,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자, 남편의 신경질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야? 지우 울어. 쓰레기를 30분 동안 버리냐? 아우, 지겨워. 지금 와. 나 나갈 거야.”


나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고,

희미하게 깜박이는 아파트 불빛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가 아기를 두고 나가지는 않겠지, 설마.

그런데, 어둠 속 센서등이 켜지며 낯익은 형체가 나타났다.

그는 울고 있는 아들을 두고, 한껏 꾸민 외출복 차림으로 나왔다.


나는 몸을 숨겼다가,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계단을 향해 뛰었다. 비상계단으로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뛰었다.

문을 여는 순간

아기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우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덩그러니 울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재빨리 품에 안고, 숨을 고르며 온 힘을 다해 꽉 안았다.

아이의 따뜻한 체온이 내 심장을 잠시 진정시켰다.

뜨거운 눈물이 아기 볼 위로 뚝뚝 떨어졌다.


“지우야, 괜찮아. 엄마야... 지우야, 미안해.”


나의 넘쳐흐르는 모성애는 그에게 족쇄였고, 그의 흐르지 않는 부성애는 날개이자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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