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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우울증 :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회복이 더딘 마음, 우울증의 그림자

by 김하루


“엄마, 딸기 씻어줘.”

지우는 어느새 다섯 살. 작은 손으로 검은 비닐봉지를 꼭 쥔 채,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봉지 안에는 빨갛게 익은 딸기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걸 내미는 손끝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웠다.

하얀 얼굴에 오뚝한 코, 동그랗지만 어딘가 갸름한 그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참지 못하고 뽀뽀를 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봉지를 받았다.


“그래, 금방 씻어줄게.”


거실 바닥에 앉아, 엄마와 나는 지우가 딸기를 집어 입에 넣는 모습을 지켜봤다. 작은 입이 오물오물 움직이고, 손끝에는 빨간 즙이 묻었다. 창문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지우의 머리칼 위로 떨어지고, 햇살을 받은 갈색 머리카락이 은은하게 빛나며 윤기를 뽐냈다. 그 모습이 나의 눈에 영롱하게 번지며, 겨울 내내 얼어붙었던 마음이 그 빛에 서서히 녹아내렸다.


시간은 참 빠르다. 엄마는 건강을 되찾으셨고, 지우는 쑥쑥 자랐다. 나는 포기할 건 포기하고, 지킬 건 지키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살았다.

저녁이 되어 엄마를 마중 나갔다.


“엄마, 조심히 가요.”


엄마는 아빠 저녁을 준비하러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지우와 나는 길 끝에서 서로 손을 흔들며 웃었다. 그 짧은 인사 속에도 묘하게 따뜻한 온기와 쓸쓸함이 남았다.


밤이 되어 지우를 재운 뒤, 조용한 부엌에 서니 공기가 묘하게 눌려왔다.

매일 밤 찾아오는 그 싸늘한 기운‘우울’은 어김없이 나를 찾아왔다.


“아, 또 왔구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손끝이 떨렸다. TV를 켜도, 휴대폰을 켜도, 그 녀석은 사라지지 않았다.

머릿속은 빙글빙글 어지럽고, 호흡이 힘들었다.


‘죽고 싶다. 다 끝내면 편하잖아...’


그 생각이 돌고 또 돌았다.

그러다 문득, 지우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야. 지우는... 누가 키우지?’


죽음과 생존이 밤마다 싸웠다.


3년 전쯤부터 세상이 돌기 시작했다. 처음엔 단순한 피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지럼증은 점점 심해졌다. 일을 하다가도 쓰러지고, 아이를 돌보다가도 눈앞이 아찔해졌다.

길을 걷다 중심을 잃으면,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어지럼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세상이 빙빙 돌았다. 마치 세상은 그대로인데, 나만 중심을 잃은 사람처럼.


지난 3년 동안 병원을 전전했지만, 원인은 찾지 못했다. 진단명도, 약도,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일상은 무너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 어지럼증을 눈치챈 이웃집 아주머니가 무심히 던진 한마디가, 이상하게도 귓가에 남았다.


“어지럼증이 우울증이랑도 관련 있다더라.”


그 말이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혹시… 내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걸까?’


그날 나는 병원으로 향했다.

상담실 문을 닫는 순간, 고요 속에서 내 숨소리만 들렸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이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

의사는 내게 조용히 물었다.


“요즘 어떠세요?”


그 한마디에, 버텨오던 뭔가가 무너졌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선생님... 저, 살고 싶은데... 자꾸 죽고 싶어요.

아기가 아직 너무 어려요. 저... 살려주세요.”


그 말이 내 안의 마지막 힘이었다.

의사는 말없이 내 앞에 있던 티슈를 밀어주었다.

그녀의 표정엔 연민도, 판단도 없었다. 오직 ‘듣고자 하는 마음’만 있었다.

나는 그 조용한 공기 속에서 처음으로 숨을 제대로 쉬었다.


“자, 어디서부터 힘들어지기 시작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처녀 시절, 나는 학원 강사였다. 하지만 늘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작은 옷가게를 차렸다.

새벽마다 동대문으로 가서, 남자들도 들기 힘든 사입 가방 세 개를 메고, 아침이면 옷을 정리하고 진열했다. 그렇게 몇 해를 보내자, 생각보다 큰돈이 손에 들어왔다.

그러나 친정이 부도의 위기에 놓이자, 나는 주저 없이 그 돈을 내놓았다.


엄마는 “미안해, 지연아. 일만 풀리면 돌려줄게.” 하셨지만,


나는 웃었다. “괜찮아요, 엄마.”



하지만 막상 여태 고생하고 벌었던 돈이 한꺼번에 없어지자, 몸은 골병이 들고, 뭔가 무기력한 기분이 들어 도저히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헛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고, 의욕이 떨어지자 장사는 예전 같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사업을 접고, 나머지 보증금을 통장에 넣어두고 학원으로 돌아가 아이들을 가르쳤다.

'선생님' 하고 부르는 아이들의 소리가 너무 귀여웠고, 나는 다시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시절, 친구 결혼식에 가서 뒤풀이 때 민준을 처음 보았다.

그는 남자답고 씩씩하며, 나를 웃게 하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한참을 따라다니며 나의 마음을 얻은 그였다. 하지만 결혼 직전 우리 집이 무너지자 그의 시선 속에서 나는 짐이 되었다.

나는 분명 그를 위해 헤어지자고 했지만, 남의 시선 속에 사는 철없는 그는 이미 지인들에게 결혼한다고 떠들고 다닌 터라, 울며 겨자 먹기로 결혼을 강행했다.


처음 만났을 때 소문처럼, 그의 기대에 못 미치는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여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화가 나서인지, 그의 분노가 시작되었다. 분노는 점점 날카로워졌고, 그럴수록 나는 더 깊이 병들었다. 그래서 그가 '이제 내가 너를 책임지겠다. 시집와라'라고 했던 말들에 속아, 나는 굳어버린 밀랍인형처럼 감정을 최대한 누르며 살아갈 뿐이었다.


몇 년째 반복된 연락 두절 끝에, 어느 날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지금 집에 가는 길이야. 족발 시켜놨어. 같이 먹자.”


웬일인가 싶었다. 소문에 들리던 여자와 헤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사실 지인들이 돌잔치나 결혼식 때마다. 예쁘고 어린 여자를 데리고 다닌다는 목격담을 수도 없이 들으며, 그들의 깊은 관계를 대충 알고 있었다.

그는 늘 그랬다. 새 여자, 새 거짓말, 새 회한. 그리고 돌아와 “이제 정신 차렸어, 우리 가족밖에 없어.”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곤 했다. 그 말도 이제는 지겨웠다.


이제는 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보면,


본인이 서러워서 우는 건지


상대가 가엾어서 우는 건지 알 수 있다.


상대가 가엾고 미안해서 흘리는 눈물은 분명히 다르다.


상대를 위해 흘리는 눈물은 귀한 눈물이다.


난 이미, 내가 가엾어서 나를 위해 흘리는 눈물을 첫사랑 성민에게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남편의 눈물은, 자신이 가엾고 억울한 마음으로 가득 찬 눈물이다.


그는 내가 떠나려 하면, 항상 악어의 눈물을 흘린다.




내가 이혼을 말할 때마다 그는 어김없이 엄마를 끌어들였다.


“장모님, 지연이가 또 그래요. 출장 좀 다녀왔다고 이혼하재요. 저 지금 폭발 직전이에요.”


엄마는 그가 폭발해 나나 지우에게 피해가 갈까 봐 매번 괴로워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더는 울리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내 마음은 마른 나무껍질처럼 점점 굳어갔다.




내 사연을 들은 의사 선생님은 휴지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나는 눈물 사이로 번져 보인 그녀의 얼굴을, 마치 신을 바라보듯 말했다.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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