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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나는 맹수가 되어야만 했다. (에세이 소설)

선한 사람에게는 따뜻하게. 악한 사람에게는 단호하게. 그건 모순이 아니다

by 김하루


인생에는 분명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존재한다.
세상은 그 둘의 그림자가 교차하는 자리에서 늘 흔들린다.


우울증과 불안증 약을 삼킨 지 몇 달이 흘렀다.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하루는 납처럼 흘러갔다.
아침이면 눈꺼풀이 돌처럼 내려앉았고,
저녁이면 세상이 뿌옇게 물러났다.

그럼에도 나는 약을 챙겨 삼켰다.

의사는 내게 분명 말했다.


“당신은 살 수 있어요.”


그 말 한마디가 까마득한 절벽 끝에서
나를 붙잡아 준 외줄 같았다.

죽음의 충동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 무렵, 남편이 돌아왔다.
두 집 살림을 정리하고 들어온 것 같았다.
마치 반성이라도 한 듯
그는 잠시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굴었다.

말끝마다 미소를 얹고, 문을 닫을 때도 조금 부드럽게 닫았다.
연기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평온은 새벽안개처럼 금세 흩어졌다.

그의 목소리는 다시 날카로워졌고,
눈빛은 차갑게 되살아났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야.”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잠시 바뀌는 척할 뿐,
인간은 결국 제 속으로 되돌아간다.




어느덧 내게는 의미 없는 주말, 토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어김없이 육아와 모든 집안일을 전담하고 있었다.


'분리수거가 왜 이렇게 많아?'


남편이 즐겨 먹는 배달음식 덕에 분리수거는 두 배로 늘었다.
남편이 돌아와서 좋은 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끙끙거리며 박스들을 턱과 팔로 받치고,
손가락마다 봉지 무더기를 걸고 묘기를 부리듯 나가는데,
향수를 진하게 뿌린 남편이 어깨를 툭 치며 먼저 나갔다.


‘문이라도 잡아주지. 저게 사람이냐.’


속으로 욕을 하며, 나는 끙끙대며 1층으로 내려갔다.

우리 아파트는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 정해진 시간에 분리수거를 한다.
그 시간대에 마주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정해 보인다.
나는 분리수거를 버려주는 남편들에게
이상하게 따뜻한 환상이 생겨버렸다.
거리에서 손을 맞잡고 걷는 부부는
나이에 상관없이 내게 초콜릿처럼 달콤한 장면으로 남는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 다정한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전생에 덕을 많이 쌓으면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생에서는 덕을 많이 쌓으며 살고 싶다.


누군가 내게 “다시 태어난다면?” 물은 적이 있다.


결혼 전엔 “새요.”라고 답했지만, 결혼 후엔 속으로 “돌.”이라 했다.
이제 누가 묻는다면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싫어요. 다시는 태어나지 않을 거예요.”


내 인생의 90퍼센트는 불행 같았다.
하지만 나머지 10퍼센트의 전부는
아들, 지우의 눈동자 안에 있다.


남편이 집에 다시 들어오고부터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발자국 소리 하나에도 몸이 움찔거렸다.
술 먹고 들어오는 날이면 심장은 뛰었고,
내 어깨는 돌처럼 굳어갔다.

밤이 되면 긴장이 시작된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


‘삑, 삑, 삑, 삑.’

그 소리만 들어도 뒷골이 움찔했다.


문이 열리고 술 냄새가 퍼질 때면
나는 숨을 멈췄다.

늦은 새벽이면
그는 나와 아이가 잠든 방문을 열고 들어와 말했다.


“아들, 아빠 왔잖아.”


그는 잠든 아이를 흔들며 웃었다.
그 웃음은 괴물 같았다.




나와 아이를 깨우는 행동은 그의 습관이 되었고,
나는 그것을 ‘학대’라 정의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아이가 잠들면 거실에서 보초를 선다.
그가 술에 취해 지우 방의 문고리를 돌리는 순간,
지우가 깰까 봐 소리 내지 못한 채
입술로만 욕을 내뱉으며
휘청거리는 그를 억지로 다른 방으로 끌고 가 밀어 넣는다.

그리고 시작된다.


폭군 같은 밤.
아니, 그는 이미 폭군이다.

그는 난동을 부리고,

나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방문을 온몸으로 막아선다.
그의 팔에 눌리고, 손에 흔들리고,
짐승 같은 몸부림에 발로 차이기까지 한다.
몸과 마음에 번지는 멍은 같은 색이었다.


“제발, 집에서 나가!”


나는 울부짖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당하고 있지 않는다.
그가 손을 들면 나도 눈을 치켜뜬다.
나를 누르면
그가 나에게 떨어질 때까지
고양이처럼 얼굴을 할퀴며 덤빈다.


“독한 년.”


그는 입가의 피를 닦으며 이를 갈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벽에 기대앉았다.

그가 폭군이 되면, 나는 맹수가 된다.


그는 언제부턴가 나를 예전처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내 안의 분노와 광기가
그에게도 두려움이 된 것이다.


선한 사람에게는 따뜻하게.
악한 사람에게는 단호하게.
그건 모순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가장 현명한 태도다.


그것이 내가 택한 생존의 방식이다.
나도 이제 나를 해치는 자에게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나는 상대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머리카락의 3분의 1이 빠져버렸고,
이제는 어디에서도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졌다.

그럼에도 내가 이혼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는 말했다.


“너네 친정에 전화할게. 다 같이 죽어보자.”


그는 나의 약점을 쥐고 흔들며
결코 놓아주지 않았다.

이 지옥 같은 날들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냥 어서 도망가지, 왜 저러고 살까?”라고 혀를 찰 것이다.

하지만 아이의 생계와 얽혀 있는 재산 문제, 친정을 무기 삼아 흔드는 그의 억압과 가스라이팅에

나는 조금씩 포기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적응하며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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