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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제 모두, 나를 놓아줘. (에세이 소설)

고통의 끝에서, 나는 지키는 거절의 방법을 알았다.

by 김하루



“여보세요? 어, 승연아. 오랜만이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승연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지연아, 오늘 수희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대. 중학교 친구들 다 온다고, 너랑 연락해서 같이 오라고 하더라. 수희랑 너랑 나, 셋이 참 친했잖아. 같이 가자.”


뜻밖의 소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살다 보니 서로 연락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지냈지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잊고 있던 시간

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어머, 어떡해... 수희 어떡하니. 나 빨리 가야겠다. 몇 시에 볼까?”


“나도 애기 맡기고 갈게. 저녁 일곱 시에 보자. 네 집 앞 도넛가게 있지? 거기서 태워줄게.”


“응, 알았어. 이따 봐.”


전화를 끊고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몇 년 만의 외출이었다.

아이를 그에게 맡긴다는 게 여전히 불안했지만, 이제 지우도 제법 의사 표현을 잘하고, 아빠와 나름의 시간을 보낼 줄 안다.

예전처럼 문 앞에서 울며 매달리던 아이는 아니었다.

혼자 저녁에 나서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집을 나서자 해가 천천히 기울고, 저녁빛이 거리 위로 부드럽게 번졌다.

불 켜진 가게마다 주말을 즐기는 듯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저마다 여유롭게 웃고 떠드며 행복해 보였다.

지우 없이 걷는 이 주말 저녁이 낯설고도 이상하게 가슴이 트였다.


“야, 지연아! 여기야, 여기!”


멀리서 승연이 차 안에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게 몇 년 만이야. 너만 못 봤어, 너만. 아주 얼굴 보기 힘들다, 금덩이야?”


우리는 서로를 껴안았다.

친구의 부고 소식을 잠시 잊을 만큼 반가웠다.

그 품 안에는 오랜 시간의 그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미안해. 내 사정 좀 알잖아. 나도 정신이 없었어. 아, 맞다, 빨리 가자. 늦겠다.”


승연은 내 말을 듣자 급히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가 낮게 울리며 차가 도로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번화가 간판의 형형색색 불빛이 차 안을 가로질렀다.


우리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지난 시간들을 조용히 떠올리고 있었다.

장례식장은 익숙한 얼굴들로 조용히 가득했다.

사람들은 잔을 기울이며 고인의 명복을 마음속으로 빌고 있었다.

그때, 수희가 검은 상복을 곱게 차려입고 다가왔다.

“왔어? 너희 저녁 안 먹었지? 육개장에다 수육 좀 든든히 먹어. 너네는 술 안 마시지? 음료수 마시고 있어. 나 고모한테 갔다 올게.”


수희는 담담해 보였다.


“응, 수희야. 지연이랑 둘이 먹고 있을게. 우리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가서 볼일 봐. 어쩌니, 아버지 돌아가셔서...”


나도 한마디 건네고 싶었지만,
말은 입술에 머물러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수희를 불렀다.
말 대신 그녀를 꼭 안아주며, 살며시 등을 두드려주었다.

수희는 조용히 “고마워”라고 속삭였다.

이내 담담한 얼굴로 상주 역할을 하러 안으로 들어갔다.


승연이랑 나는 오랜만에 추억 속 이야기를 나누며 술대신 사이다를 한잔씩 마셨다.

오랜만에 보지 못했던 친구들이 끊임없이 왔다.

몇 년 만의 외출이라 어색했지만, 곧 수다쟁이가 되어버렸다.

저쪽 테이블에 모여 있는 남자 지인들 틈에서 힐끗힐끗 시선이 느껴졌다.

성민 오빠였다.





갸름한 얼굴, 살짝 높은 코, 쌍꺼풀 없는 길고 큰 눈.

예전보다 조금은 소년스러움이 가시고, 어른의 기운이 묻어났다.
거뭇거뭇 수염도 새로 돋은 듯 보였다.

눈이 잠깐 마주쳤지만, 나는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마치 그 한순간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까 두려운 듯.


‘불륜’이라는 단어가 내게는 도무지 현실감 없는 것이어서,
조금이라도 내 모습에 흠이라도 잡힐까 봐 조심스러웠다.

엄마가 나를 이렇게 재미없는 유교적인 여자로 키워낸 게 밉기도 했지만,
사실 그런 나 자신이 더 싫었다.

다른 친구들은 남자 지인들과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고, 테이블에도 자연스럽게 앉아 있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여 오고 겁이 났다.


집에 가기 위해 채비를 마치고, 천천히 자리를 일어섰다.

가벼운 숨을 내쉬며, 길게 늘어진 그림자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편의 화난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먼저 장례식을 나와 택시를 잡으려 길로 나왔는데,

가로등 아래 담배를 피우러 나온 남자 지인들 무리 중에서 성민이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잘 지냈어?”


나는 무슨 불륜이라도 저지를 행실 안 좋은 여자로 보일까 봐

쭈뼛쭈뼛 걸음을 옆으로 옮기며 말했다.


“안녕...”


뒤돌아서 휴대폰을 들고, 무언가를 하는 척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차가운 골목 공기가 팔과 다리를 스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성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가. 지연아 아프지 말고, 울지 말고, 잘 지내... ”


나는 못 들은 척하며 골목을 재빨리 돌았다.

하지만 그가 내 뒤를 좇아오는 성급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탁탁탁.


팍 하고 내 팔을 잡아 나를 뒤로 돌렸다.

그의 눈빛은 슬프면서도 화가 난 듯, 잔뜩 긴장되어 있었다.


“나, 사실 너 얘기 들었어.

저기 테이블에서 너 얘기 많이 하더라.

민준이란 그 녀석, 뭐 하는 인간이야?

어린 계집이랑 거의 한 동네 떨어진 곳에서 몇 년을 살았대.

넌 알고 있었던 거야?


“관심 없어.”


“그 여자 데리고 사방팔방 결혼할 여자라고 지인들한테 소개해 다녔다면서...

그리고 너랑 이혼했다고도 하고 다녔다던데... 맞아? 사실이야?

이혼한 거야? 애기는 몇 살이야?”


나는 그를 원망할 이유가 없는데,

원망 섞인 눈초리로 고개를 떨구고, 눈을 위로 치켜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뭔 상관인데?

오빠, 와이프나 잘 챙겨.

옛 여자한테 이렇게 치근덕거리고 다니는 거 알면 집사람이 얼마나 속상할까?

남자들은 다 왜 저래.

남들이 뭐라 떠들든 난 신경 안 써.

지네들이 나 먹여 살릴 것도 아니면서 왜 참견이야?

그렇게 뉴스거리가 없대?

지금이 먹고살기 얼마나 힘들 때인데...

머저리들... 한가하네, 참.”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내 눈을 오래 바라보았다.

골목은 잠잠했고, 시선만 서로를 쫓았다.


“지연아, 오빠 결혼 안 했어.

너랑 헤어지고 오랫동안 너한테 준 것처럼 마음이 안 가더라, 다른 여자한테는.”


“아, 그래? 근데 나랑 무슨 상관이야?

오빠, 나 그리고 이혼 안 했어.

지금 애 아빠 기다려.

나 잘 살고 있으니까.

잘 살아, 그냥.”


말을 끝내고 뒤돌아 걷는 내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나는 또각또각 뒤돌아 그를 떠났다. 예전에 내가 그를 떠났을 때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생각이 많아졌다.

나도 이제는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지금의 남편을 놓아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결이 다른 사람을 놓아줄 때-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사람과

관계를 끊으면

처음엔 공허하지만, 곧 평화가 찾아온다.


맞지 않는 사람을 붙잡느라

잃었던 나를 되찾는 시간이다.


나도 사실 알고 있다. 맞지 않는 사람과는 언젠가는 흩어져야 한다는 것을...

억지로 이어져 봤자 나 자신이 닮아 없어질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내가 싫다.





아침이 다가왔다. 지우가 내 머리카락을 만진다.

날 깨우지 않고 항상 내가 일어나길 기다리는 아기 천사.

엄마의 고단함을 아는지, 지우는 나를 깨운 적이 거의 없다.


“지우야, 배고프지? 엄마 일어났어.”


“응, 엄마. 맘마 줘.”


“주먹밥에 치즈 먹자.”


“응, 좋아.”


눈을 비비고 손을 닦았다. 나는 사실 차가운 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남편이 없을 때는 온수로 손을 닦는다.

지우를 낳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한겨울인데도 온수 보일러를 계속 못 틀게 했다.

젖병을 씻을 때도, 손을 씻을 때도, 심지어 샤워할 때도 갑자기 온수가 차가운 물로 바뀌어 놀라게 했다.

그가 집에 있으면 온수를 못 쓰게 했다.

내가 이유를 물으면 그는 항상 똑같이 대답했다.


“네가 돈 벌어본 적이나 있어? 어디서 온수 타령이야, 씨.”


모두 서러웠지만, 이 기억은 정말 서럽고 고문 같은 시간들이라 트라우마로 남았다.

한여름에도 차가운 물로 손을 씻을 때면 그때 기억이 올라와 울컥울컥 치밀어 오른다.


시어머니와 수다를 떨던 중, 나는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도 경제적 활동을 할 수 있었는데, 왜 일을 못하게 하는지, 왜 경제적 학대를 하는지. 아범이 왜 그런지 여쭤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날 시어머니는 술에 취해 있었다.
남편의 아버지가 시어머니에게 비슷한 일을 저질렀던 기억 때문인지, 취하면 나에게 이해한다며

‘여자의 일생’이라는 노래를 부르곤 했다.


하지만 이해하면서도 나를 괴롭히고, 남편과 나 사이를 이간질하는 시어머니였다.

남편이 금요일 저녁, 갑자기 나를 불러 말했다.


“야, 우리 집에서 할머니, 삼촌네 가족, 누나네, 이모네 다 모이기로 했으니 토요일에 준비해.”


“그럼 애들까지 15명 정도인데, 나 혼자 갑자기 준비 못해. 아니면 네가 도와줘야 해.”


“야, 괜히 시비 거네? 넌 '네 알았어요.' 이러면 어디 덧나냐? 지 엄마 닮아가지고.”


“뭐? 우리 엄마가 왜?”


“너네 엄마도 너네 아빠한테 안 지려고 하잖아.”


“야, 너네 엄마 엄마 하지 마, 니보다 훨씬 오래 사셨고...”

퍽!


갑자기 내 머리 뒤통수에 그의 주먹이 날아왔다.

머리가 띵했다.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키가 큰 남편의 뒤통수에 손이 닿지 않아 주먹이 빗나가, 나는 그의 턱을 팍 쳤다.


“윽.”


그는 턱을 잡고 눈을 크게 뜨며 달려들 기세였다.

나는 지우가 어린이집에 있는 이 시간만큼은, 오롯이 ‘김지연’이다.

왜냐하면 놀라 울 지우가 없기 때문이다.


민준아 아파? 네가 먼저 때렸잖아. 어디 한 번 해볼까?”


그는 중학교 때 태권도 선수 출신이다. 비겁하게 태권도 기술로 나를 가격한다.

그의 주특기는 록킥. 내 정강이를 연속으로 가격해, 내가 주저앉게 만드는 기술이다.

나는 일단 뒤로 물러섰다.


“지금 네가 먼저 때렸고, 나 건들면 경찰에 신고한다.”


핸드폰을 들고 112를 누르며, 통화 버튼을 누르는 시늉을 했다.

마치 시한폭탄을 들고 대적하는 테러범처럼, ‘다가오면 터트린다’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내 손은 꺾이고 핸드폰은 휭- 하고 날아갔다.

시작이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그에게 달라붙었다.

차라리 그에게 달라붙는 편이 안전하다고 판단했고

거리를 벌리면, 내 몸이 분리되면서 로킥이 날아올 것이 뻔했다.


“이 독한 년이.”


그가 밀쳐 거리를 벌리려 하자, 나는 팔로 그의 어깨를 꽉 붙잡고, 본능적으로 팔을 힘껏 깨물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나를 바닥에 내쳐버렸고, 나는 바로 일어나 핸드폰을 들고 집 밖으로 도망쳤다.

강한 척이 끝나자 어린아이처럼 질질 눈물이 흘렀다.

그때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흑흑흑…”


“지연아, 너 왜 그러니? 우니?”


“네, 어머님. 저, 지우 아빠 때문에 못 살겠어요.”


“아니 왜?”


“집에서 15명 식구 음식, 지우 데리고 혼자 다 어떻게 해요?

저는... 못해요, 어머니. 너무 무리한 요구예요.

지금 제 솜씨로는 그 정도 음식 만들기 어렵고, 저는 이제 30대 중반이에요.

어른들 다 모시고 매번 우리 집에서 모이는 것도 벅차고...

그 많은 갈비찜과 잡채까지... 전 정말 못해요.”


어느 책에서 본 적이 있다.

‘네, 알겠습니다.’ 이 말이 이제 미덕이 아니라는 것을.

못하면 못한다고, 제 역량이 아닌 것을 확실히 말하고 사과하는 게 나를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그때 나는 무릎을 탁 치며, “이제 아니에요. 못하겠어요. 미안하지만, 못해요.”

이 말들을 수도 없이 연습해 왔다. 맞다. 이 문장들이 내 인생을 눈뜨게 한 것이다.


“... 얘, 그거 내가 시킨 거야... 그래도 해야지? 그렇게 힘든 일이니? 힘들면 내가 잡채는 해줄게.”


역시 말이 안 통한다.


“어머니, 저 못해요. 이번에도 12명 모시고 잔치 벌였을 때, 친정엄마 힘드셨어요. 집에 와서 설거지할 때 빈 그릇 좀 날라달라 했는데, 아범이 상 다 엎은 거 기억하시죠?”


“... 미친놈.”


처음으로 시어머니가 아들을 욕했다.

그녀가 전화를 끊고, 나는 나와 친정엄마를 지켰다.

그때부터, 이렇게 조금씩 나를 지켜가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제발… 이제 모두, 나를 놓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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