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네가 나에게 준 들꽃은 내게 사랑이었어.
쨍그랑, 와장창-
그가 부엌에서 그릇을 집어던지고
깨진 조각들이 내가 앉아 있는 방으로 굴러들었다.
바닥에 흩어진 파편들이 빛을 받아 번쩍였다.
그중 하나가 벽을 튀겨 내 다리에 스쳤다.
나는 그를 바라보다가, 그릇이 날아드는 순간 고개를 숙이며
손으로 얼굴을 막았다.
“그래서? 못 해주겠다고?"
"내가 너한테 준 생활비 꿀꺽하고, 니 남편 힘들면 모른 척하겠다는 거지?
이 여우 같은 년.”
“내가 돈이 어딨어, 내가.”
“너 이 집 살 때 보태고, 너 가게 접을 때 숨겨둔 비상금 있잖아. 그 보증금.”
“착각도 자유다.”
“야, 그럼 너희 집에 얘기해서 돈 가져와.”
“우리 집 지금 아빠 문제 해결하느라 대출 감당하기도 벅찬 거 알면서, 왜 맨날 우리 집만 얘기해. 차라리 너네 집에 얘기해.”
그의 숨이 가빠졌다.
눈에 핏줄이 섰고, 입술이 말라 있었다.
“그래? 그럼 이제부터 너희 둘이 알아서 먹고살아라.
나 찾지 마.”
문이 쾅 닫혔다.
그가 나간 뒤,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부서진 조각들이 바닥에 박혀 반짝거렸다.
시계를 보니 지우가 유치원에서 돌아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울 시간도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걸레를 찾아들고
조각들을 모으다 손끝이 살짝 베였다.
붉은 점 하나가 천에 스며들었다.
다음 날, 엄마의 공장으로 일을 돕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쇠와 기름 냄새가 뒤엉킨 공장 안은, 언제나처럼 무겁게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그 속에서 공장 경리 일을 도왔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렸고, 바닥에는 오래된 먼지와 쇳가루가 얇게 깔려 있었다.
엄마는 아빠의 ‘똥’ 같은 빚을 갚기 위해 오늘도 현장에서 사람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작업복 소매는 늘 땀에 젖어 있었고, 손등에는 굳은살이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커피를 마시러 사무실로 들어온 엄마에게 나는 따뜻하게 커피믹스를 타 드렸다.
“이 맛에 산다니까. 에고, 그 큰 빚을 어떻게 다 갚냐? 똥 싸는 사람 따로 있고...”
내가 말을 받았다. “똥 치우는 사람은 따로 있지.”
엄마는 이가 몇 개 빠진 입을 활짝 벌리고,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지겹다. 진짜.”
눈동자를 위로 굴리며 ‘나 미치겠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엄마, 나... 이혼할까?”
엄마는 놀라지 않았다.
“너 마음 가는 대로 해라. 네 인생이니까.”
“근데... 이혼하면 지우는 어떨까?”
“... 네 마음 가는 대로 해.
근데 둘째는 갖지 마라. 민준이는 너무 애 같아. 안 돼.”
“성숙한 남자 같진 않지? 근데 엄마는 왜 아빠 똥만 치워? 그렇게 보는 눈이 있는데?”
“그냥... 너는 왜 또 속을 긁어? 내가 너희들 때문에 참고 살다가, 살다가... 어찌 여기까지 왔겠니. 너는 또, 지우 아범 바람났을 때 왜 참고 지금까지 버티는데? 안 그러냐?”
“엄마,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잖아. 내 저주 좀 풀어봐~”
“얘, 나도 못 푼 걸 내가 어떻게 푸니. 네가 그 저주 좀 끊어 봐.”
우린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느라 숨이 넘어갈 듯 다투다, 웃음이 터졌다.
“엄마, 나... 엄마한테 다 말 못 한 거 있어.”
엄마가 힐끗 나를 본다.
그 시선이 닿자,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점점 심각해지는 것 같아.
아니야,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두자.
나도 이제 좀 지쳤나 봐, 하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리고... 2년쯤 있다가 네 돈 돌려줄 거야.
그거 가지고 잘해 봐라. 시드머니 삼아서.”
엄마는 쇼핑백에서 손바닥만 한 책을 꺼냈다.
서점에서 샀다며, 제목은 -빌딩부자들-이라고 했다.
“너한테 주려고 샀어.”
나는 무심코 책을 받아 몇 장 넘겨보다가 가방에 넣었다.
엄마는 의자에 앉아 안경을 쓰고 책장을 펼쳤다.
“지연아, 책 많이 읽어.
우리가 한 권을 다 읽어도 머리에 남는 게 많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읽다 보면 어느 한 문장이 내 인생을 바꿔줄 수도 있거든.
직접 겪지 않아도 미리 예측하게 되고,
어떤 순간엔 ‘아, 그때 그 글이 생각나네’ 하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마음도 좀 더 너그러워지고 그래.”
“응, 알았어... 나도 엄마 닮아서 책 좋아하지.”
“단지 어휘력만 느는 게 아니야.
사람 사는 데 배울 게 많아. 어머, 지연아 너 늦었다.”
“응, 알았어 엄마.
근데 나 지우 데리러 가야겠다.
너무 피곤하게 현장 많이 나가지 말고,
엄마 나이도 생각해.”
“그래, 얼른 가.
애기 맛있는 거 사 들고 가.”
엄마는 지갑에서 10만 원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셨다.
나는 그걸 다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엄마도 힘들면서 뭐 하러 줘.”
“힘들지.
그래도 엄마가 이렇게 지우 먹을 거 사라고 돈 주는 건 부담 갖지 말자.
성장기 때 너 제대로 못 먹인 게 한으로 남는다.
지우 먹을 거 사서 들어가.
그리고 이건 그때 부도날 뻔했을 때,
네가 사업할 때 전재산 빌려준 거... 그 이자야.
원금은 엄마가 꼭 갚을게.
이자 줄 돈은 있어. 자주 가져가도 돼. 우리 애도 잘 챙겨 먹이고.
엄마는 10만 원을 내 가방 속에 넣어버렸다.
“엄마, 됐다니까. 휴... 알았어.
일단 나 갈게. 늦겠다. 전화할게. 사랑해.”
나는 집으로 가는 길에 지우 먹을 거를 샀다.
과일 진열대 앞에서 몇 번을 들었다 놨다 했다.
사과 한 봉지에 만 원이 넘었다.
손에 들고 있다가 가격표를 다시 보고,
결국 조금 더 저렴한 걸로 바꿨다.
고기 코너에서도 비슷했다.
‘한 번 사면 며칠은 먹겠지’ 싶다가도,
계산대 숫자가 머릿속에서 먼저 튀어나왔다.
그래도 빵집 앞에 멈춰 섰다.
지우가 좋아하는 크림빵 하나쯤은 괜찮겠지.
작은 종이봉투를 받아 들며 마음이 조금 풀렸다.
물가가 비싸다, 비싸다 했지만
요즘 과일값은 정말 금값이다.
유치원 앞에서 지우를 기다렸다.
“지우야!”
하얀 얼굴에 앙증맞은 입,
“엄마!” 하며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순간, 세상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담임 선생님께서 나오시더니, 지우에게
“지우야, 다른 친구들이랑 놀고 있으렴.” 하시며
나를 살짝 나무 그늘 쪽으로 데리고 가셨다.
표정이 조금 굳어 있었다.
“어머님, 사실... 지우 아버님이 요즘 많이 바쁘신가 봐요.
3개월째 유치원비가 미납이 돼서요.
전화도 잘 안 받으셔서...”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집에 가서 바로 입금하겠습니다. 죄송해요, 제가 몰랐네요.
그이가 생활비 관리를 해서... 잊고 있었나 봐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어머님.
지우는 요즘 정말 씩씩하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요.
제가 잘 돌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어찌나 예의 바른 지, 참 예쁜 아이예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집에서도 예의 있게 잘 지도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돌아섰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우는 친구들과 나뭇가지를 들고 뛰어놀고 있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 커다란 나무 옆으로 가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생활비 몇십만 원을 주면서
유치원비와 관리비는 자기가 알아서 낸다고 했던 사람.
그래서 믿고 있었다.
“여보세요?”
“왜.”
“지우 유치원비 안 냈어? 3개월 동안?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그러니까 내가 3천5백만 원만 빌려달라 그랬잖아.
찻값 300씩 나가느라 정신없어.
끊어. 아니면 네가 3천5백 주든가.”
“차값이라니? 또 차를 바꿨어? 얼마나 탔다고?”
“네가 현금 안 주니까 할부로 산 거잖아.”
“얼마짜린데?
지금 생활비 90만 원에 아르바이트해서 버는 돈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데, 너 진짜 왜 그러는데.”
“나 새 차 뽑았어.
지우 태워줄게. 이제 내 명의로 뽑았으니까 걱정 마.”
“... 뭐? 야 이 인간아.
지금 형편 안 보여?
세금에, 보험에, 내가 얼마나 힘들게 내고 있는데 그게 말이 돼?”
“그건 네 사정이지. 끊어. 유치원비 난 못 낸다.”
뚝- 전화가 끊겼다.
나는 나무를 붙잡았다.
누가 볼까 봐, 소리 내지 않고 울었다.
나무야, 내 눈물이 너에게 영양분이 된다면...
우리 지우랑 나를 조금만 더 지켜줘.
나 너무 힘들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두 팔로 나무를 감쌌다.
살짝 거친 껍질이 팔에 닿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남자 사람의 품 같았다.
마치 남편처럼 느껴져서, 두 팔로 목을 누르는 레슬링 기술 ‘초크’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일종의 훈련 같은 거랄까.
“엄마.”
지우의 목소리에 나는 서둘러 얼굴을 고쳤다.
웃는 표정을 만들어 아이를 안았다.
“지우야, 집에 가서 간식 먹고 놀까?”
“싫어. 집은 너무 심심해.
엄마는 일만 하고, 지우는 여기서 놀 거야.”
금요일 오후, 사람들은 저마다 집으로 향했다.
“지우 엄마, 잘 가요.”
“네, 언니. 들어가세요.”
인사를 나누고 나니, 공원엔 지우와 나만 남았다.
주말 저녁,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유난히 쓸쓸하게 내려앉았다.
주말이 싫다.
모두가 가족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지는 시간.
지우와 나만 남는 이 공허한 주말이 싫다.
“지우야, 내일 대공원 동물원 갈까?”
''또? 거긴 곰도 없고 호랑이도 없고,
맨날 새랑 작은 동물들만 있잖아.
나도 친구들처럼 캠핑 가고 싶어.”
“응? 캠핑? 그래, 우리 둘이 돗자리 들고
숲공원 가서 김밥 사 먹자. 내일 데이트하자.”
“아니, 나 아빠랑 셋이 가고 싶은데...”
“... 응, 물어볼게.”
“아빠는 항상 바빠.”
지우는 멀리서 들꽃을 꺾어 내게 주었다.
“고마워, 내 아들. 사랑해.”
아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꽃, 돌멩이, 나뭇잎뿐이다.
하지만 그 작은 것 안에 엄마를 향한
세상의 모든 사랑이 담겨 있다.
나는 꽃을 귀에 꽂고, “엄마 예쁘지?” 하며 웃었다.
“응, 예뻐. 근데 나 배고파.”
저녁노을이 내려앉으며,
외로움이 조용히 따라왔다.
우리는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나의 모든 것이여,
나의 연약한 아기 천사여.
넌 슬픔을 많이 겪지 않고,
오래도록 즐겁게 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