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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내가 증발해 버렸다. (에세이 소설)

해봤자 이혼이야.

by 김하루



햇살이 눌러앉은 여름이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끈적한 열기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발밑의 아스팔트는 뜨거운 숨을 내뿜으며 검게 달아올랐고,

뺨에 닿은 바람마저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퇴근길, 마트에서 지우가 좋아할 간식을 고르며, 나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그때, 이상하게 받기 싫은 벨소리가 울렸다.

느낌이 미묘하게 불길했다.


“여보세요? 네, 어머니... 네? 아, 집 앞이세요? 일 끝나서 장 보고 있었어요.

비밀번호요? 아... 네,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더우신데 들어가 계세요.”

또, 예고도 없이 오셨다.

이번엔 시누이와 아이들까지 데리고.

전화를 끊기도 전에 “오는 김에 맥주 몇 캔 사 오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나는 장바구니를 대충 챙겨 들고 아파트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아이들 웃음이 바닥을 굴렀다.

조카들은 거실을 휘젓고, 어머니는 부채를 부치며 바닥에 누워 있었다.

시누이는 소파에 반쯤 누워 리모컨을 눌렀다.

내가 들어서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스쳤다.


“오랜만이세요. 더우시죠, 시원한 거 좀 드릴게요. 잠시만요.”


시누이는 눈을 화면에서 떼지도 않은 채 물었다.


“지우는?”


“네, 한 시간 뒤쯤 데리러 가야 해요.”


어머니가 부채질을 멈추며 말을 보탰다.


“팔자 좋다, 너. 이렇게 살림하고, 애 키우고 사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아니?.”


나는 웃는 척하며 대꾸했다.


“네, 알아요. 근데 저 오늘 일찍 끝나서...”


“얘, 그게 무슨 일이냐. 그냥 수다 떨다 오고, 얼굴 보고 오는 거지.”


어머니의 말투는 살짝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아범이 생활비며 공과금 다 내고, 애기 챙기고 뭐든 다 하잖아.

넌 니 용돈 벌어서 파마나 하고 옷이나 사 입는 거지? 안 그래? 너 감사한 거 모르면 안 된다.”


그 순간, 부엌 조리대 위에서 물방울 하나가 또르르 흘러내렸다.

에어컨은 돌아가고 있었지만, 내 등줄기를 따라 짜증 섞인 식은땀이 천천히 흘렀다.

머리가 핑 돌았다.

어머니 말씀이 너무 화가 났지만,

나는 그저 천천히 물컵에 얼음을 떨어뜨렸다.

딸깍- 하는 소리만이 나를 대신해 대답했다.




참다가 내 사정을 따발총처럼 쏟아내고 싶었지만,

돈돈거린다고 뭐라 할까 봐 말을 꾹 눌러 삼켰다.

시누이가 여전히 누워 티브이를 보며 한마디 했다.


“맥주 시원해? 한잔 가져와, 유리컵 있지? 투명한 거.”


“네... 잠시만요.”


나는 맥주와 컵을 가져다주고,

시장 본 것들이 상할까 봐 냉장고 문을 열어 급히 정리했다.

그때 조카가 다가와 내 목덜미를 툭툭 쳤다.


“외숙모, 나 떡볶이 해줘요.”


“응, 그래... 재료가 있나 한 번 볼게. 잠시만.”


더워서 열도 식지 않았고, 머릿속은 이미 한참 전에 과열돼 있었다.

그런데 시어머니와 시누이 언니는 티브이를 보며 집이 떠나가라 웃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부엌으로 돌아가 애들 떡볶이를 후다닥 만들어줬다.

지우를 데리러 가기 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나도 소파 밑에 앉아 잠깐 티브이를 봤다.

그때, 어머니가 툭 내뱉듯 말했다.


“지연아, 니 남편 왜 그러냐?

걔는 내가 말 안 하면 용돈을 안 줘.

저번에 보니 차 좋은 거 타고 다니더구먼.

지 잘 나갈 때 어미 옷도 사주고, 핸드폰 요금도 내주고,

용돈도 다달이 주면 어디 덧나냐?

그래, 네가 한 번 얘기 좀 해줘 봐라.

아범이 네 말은 잘 듣잖아?”


나는 속이 터져, 동시에 입이 터졌다.


“아범이 지우 유치원비도 세 번이나 밀려서

우리 엄마가 내 아르바이트비로 미리 내주셨어요.

아범이 생활비로 저 괴롭히는 거, 어머니도 아시잖아요.”


서러움에 참았던 한이 무의식처럼 줄줄 흘러나왔다.

말들이 입안에서 서로 부딪히며 엉켜 붙고,

끝내 가시처럼 튀어나와 버렸다.


“저 한 달에 몇십만 원 받으려면 악다구니 지르고 싸워야 겨우 줘요.

일도 제대로 못 하게 하고... 애를 봐주나, 집안일을 도와주나.

아뇨, 이제는 안 들어오는 돈 신경도 안 써요.

그냥 지우 아빠 노릇만 하라고 해주세요, 어머니.”


말이 끝나자 방 안이 잠시 멎었다.

티브이 노래소리만 흐르고, 어머니의 부채질이 느릿하게 멈췄다.

나는 젖은 손으로 눈가를 훔치며 숨을 고르려 했지만,

목 안이 마르고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어머니와 시누이는 놀란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얘 지금 미쳤지?’ 하는 눈빛이 오갔다.


다혈질인 시누이가 먼저 펑하고 터졌다.


“야, 김지연. 너만 애 키워? 왜 그렇게 생색이야.”


어머니도 거기다 한마디를 보탰다.


“지연아, 그놈의 생활비, 생활비 얘기 좀 안 하면 안 되냐?

나는 애 둘을 내가 혼자 먹여 살렸어.

너 그러면 안 돼.”


갑자기 설움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말 대신 숨이 헐떡였다.


“저... 지우 데리고 올게요.”


신발을 꿰어 신으며 도망치듯 현관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나는 사실, 그들이 그렇게 밉지만은 않았다.

언니가 있는 게 어렸을 적부터의 소망이었고,

시누이는 욱하지만 시원시원하고 속정 있는 사람이라

그래도 마음 한편으론 좋아했다.

어머니도, 수다를 떨 때는 나를 딸처럼 대하셨다.

그런데 왜 ‘시댁’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사람들이 저렇게 변하는 걸까.

그 말 한마디, 그 시선 하나가

늘 나를 제자리에 못 앉게 만든다.





저녁이 되고, 모두 돌아갔다.

몸이 축 처지고, 두통이 올 것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우를 씻기고 있는데, 인기척이 들렸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화장실 문을 살짝 열며 일부러 크게 물었다.


“누구세요?!”


“앗, 깜짝이야. 나야.”


남편이었다.

트렁크 가방을 한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이거 빨래 지금 좀 빨아.

나 내일 점심에 사람 만나야 돼.”


그는 아무렇지 않게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나는 젖은 손으로 지우 머리의 거품을 헹구며,

대답 대신 한숨을 삼켰다.


나는 갑자기, 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어왔던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지우를 씻기고 방으로 데려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우야, 엄마는 지우 자면 할아버지 아프셔서 병원에 좀 다녀와야 돼.

우리 지우 두 밤 자면, 엄마가 일찍 올게.

아빠랑 있을 수 있지?”


“나도 같이 가자.”


“안 돼, 지우야. 거긴 병균이 많아서

지우처럼 어린애는 못 들어가게 의사 선생님이 ‘어이!’ 하고 막으셔.”


“나 무서운데... 엄마 없으면.”


“괜찮아, 지우야. 엄마가 이틀 자고 뿅 하고 나타날 때,

또봇 로봇 장난감 사 올게.”


“와~ 진짜야? 알았어. 엄마, 지우 용감해!”


“그래, 우리 지우 최고다.

대신 엄마가 할아버지 병원 간 건 비밀이야.

아빠가 걱정하실 수도 있으니까.

이건 우리 둘만의 비밀. 약속할까?”


우리는 손가락을 걸었다.

지우의 작은 손가락이 내 손끝에 닿는 순간,

가슴이 조여왔다.


지우는 유난히 잠이 오지 않는지 계속 뒤척였다.

불안한 걸까. 아니면 나의 마음을 이미 느낀 걸까.

나는 지우의 머리맡에 앉아,

조용히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 작은 숨결이 내 손끝에 닿을 때마다, 너무 미안해서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속으로 다짐했다.

이제 보여줄 거야. 나도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지우야, 기다려. 엄마가... 모든 걸 바꿔볼게.’


지우가 간신히 잠이 들자,

나는 남편의 트렁크에 내 옷을 똑같이 접어 넣었다.

그의 가출이 아닌, 나만의 떠남이었다.






조용히 현관문을 열었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밤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1층으로 내려오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있잖아... 엄마도 알잖아, 엄마랑 지우가 민준이한테 내 약점이라는 거.

나 잠깐 친구들이랑 찜질방 가서 잘 거야.

분명 그이가 엄마한테 전화할 거야.

그러니까 절대 받지 마. 약속해.

만약 받게 되면... 엄마는 아빠랑 강원도 놀러 왔다고 해.

민준이가 지우 데리고 엄마네 갈 수도 있으니까.”


엄마는 말이 없었다.

나는 숨을 고르고, 낮게 속삭였다.


“엄마, 나... 잠깐만 사라질게.”


전화를 끊자마자, 손이 떨렸다.

그래도 마음은 이상하게 고요했다.

나의 계획은 완벽했다.

이제 나는, 증발할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그가 내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는지 깨닫게 만들

처음이자 마지막 반란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플랜 B.

지우를 데리고 짐을 싸서 친정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혼 소송도 할 것이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된다.


마치 지금 막 첫 비행을 앞둔 스튜어디스처럼

나는 멋지게 트렁크를 끌고 거리를 걸었다.

바닥에 닿는 바퀴 소리가 묘하게 경쾌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그였다.


“벌써 반응이 오네?”


심장을 두근거렸지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쫄지 마, 김지연. 잘 되면 지우 아빠 정신 차리는 거고,

안 되면... 해봤자 이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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