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겨울이 지나, 이제 나에게도 드디어 봄이 오려나?
덜덜덜덜ㅡ트렁크 바퀴 소리가 내 마음처럼 덜덜거린다.
‘노는 것도, 여유도... 해봤던 사람이 하는 건가 봐. 힘들다.
남편은 어떻게 매일같이 가출하고, 매일 밖에서 놀 수 있을까?
그의 사주에 있는 역마살이 에너지를 주는 걸까. 난, 못하겠다.’
지우의 방긋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스쳤다. 보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그렇게 집을 나온 지 이틀, 삼일째 되는 날 저녁이 되어 나는 결국 집으로 향했다.
현관 앞에서 담담하게 비밀번호를 눌렀다.
속으로는 이미 ‘비밀번호가 바뀌었겠지’ 하는 예상을 했다. 바뀌었다면 일단 친정으로 갈 생각까지 해두었다.
‘그래, 바뀌었으면 그냥 가는 거지 뭐.’
띠, 띠, 띠, 띠-
철컥. 쇠고리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 뭐지? 비밀번호를 안 바꿨네? 그래, 비밀번호 바꿔놔서 내가 다시 돌아가면 자기만 손해지, 뭐.’
나는 괜히 자신 있게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믿기지 않을 만큼 어색하고도 묘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식탁에서 남편이 지우를 위해 볶음밥을 덜어 김과 김치를 꺼내 단출하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낯설고 아름다워 경이로움에 눈이 부셨다.
지우는 나를 보자 꼬질꼬질한 얼굴로 입가에 밥풀을 잔뜩 묻힌 채 활짝 미소 지으며 외쳤다.
“엄마!”
그 반가운 한마디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식탁에 등을 돌리고 앉아 있던 남편이 뒤돌아서는 순간ㅡ
그의 떡진 머리, 검푸른 수염, 짙게 패인 다크서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뻔했다.
그의 찌든 모습이 어쩐지 감탄스러웠다.
‘그래, 해보니까 어때? 난 밖에서 일도 하면서 했어. 이게 그렇게 만만해 보였니?’
묘한 희열이 밀려왔다.
목에 걸려 있던 설움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 지우야, 엄마 드디어 왔네?”
풀죽은 그 목소리, 힘이 빠진 그 표정.
나는 속으로 ‘이겼다!’ 하고 외치며 눈을 감았다.
‘진작 나가버릴걸...’ 후회가 살짝 밀려왔다.
그의 눈빛엔 기운이 없었다.
집 안은 장난감, 빨지 못한 옷, 말라비틀어진 과일껍질이 흩어져 있었다.
‘살림은 쉽다며... 애 보는 건 쉽다며...?’
6년 만에, 진심 어린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이제 난 좀 쉴게'라는 눈빛으로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근엄하고 관대한 표정으로, 마치 휴식을 허락하는 재판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이제, 평범한 주부들처럼 살 수 있을까?
남편에게 힘들다고 솔직히 토로하고, 남편도 조금은 이해해 주고...
가끔은 조금 징징거리는, 어여쁜 여자처럼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나도 가끔은, 그냥 솔직하게 징징거리고 싶었다.
남편이 조금만 이해해 주고, 지우가 곁에 있어 주면... 그 작은 위로에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것 같다.
세상에 너무 강해 보일 필요는 없잖아, 가끔은 울고 투정 부리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니니까.
평범하고 따스한 상상에 잠시 눈을 감았다.
지우가 방 안에서 작은 숨결을 고르는 소리
온 집안이 고요하게 감싸는 느낌이었다.
그 소소한 일상이, 어쩌면 내가 오래 기다려온 평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 한켠이 따뜻해졌다.
다음날, 친척 동생 예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언니!”
“응~ 가가야.”
그녀의 서구적인 매부리코는, 마치 레이디 가가와 스머프의 가가멜을 섞어 놓은 듯했다.
그래서 별명은 자연스럽게 ‘가가’가 되었다.
“요즘 뭐 해? 연락이 없어. 미워!”
특유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오랜만에 내 마음을 밝힌다.
“나... 어제 들어왔어. 이틀 동안 지우 아빠랑 지우만 두고 짐 싸서 나갔었지.”
“드디어! 내가 한 번 보여주라고 했잖아. 맨날 형부만 가출하고, 언니는 뭐 바보야?”
“야, 생각보다 효과 있더라. 이래서 사람은 계속 밟히면 안 돼. 네 말이 맞아.”
“언니, 남자 좀 잘 고르라고 했잖아. 예측 가능하게 행동하고, 사람 편하게 해주는 그런 안전한 사람이 남편감이라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예전엔 그 가가가 “형부 멋있다”며 용돈까지 받았던 열렬한 추종자였으니까.
“가가야, 너도 몰랐잖아. 남자답고 듬직하다고 네가 그랬잖아. 5만 원 용돈 받고 언니를 판 거지, 5만 원에... 그치?”
“언니~ 선택은 언니가 한 거야. 난 권하기만 했지. 나도 그 지경인 사람일 줄은 몰랐어, 정말.”
“그땐 나도 애 낳으면 좋아지겠지, 그 헛된 꿈에 빠져 있었지... 너는 행복하게 살아라, 우리 가가.”
“언니, 언니는 나보다 여섯 살 많잖아. 어른이 되면 어때?”
예진이에게 나는 여전히 ‘어른’이었다.
“난 어른이 되면 강해질 줄 알았거든.
근데 어른이 될수록 느끼는 건... 그냥 내가 평범하거나, 생각보다 조금 나약한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거더라. 더 어른이 되면 또 무엇을 깨닫게 될까... 그게 좀 무섭다.”
“언니, 인생을 명랑하게 살아봐. 어차피 다 살아서 못 나간다는 게, 명언 중의 명언이잖아.”
“나도 명랑하게 살고 싶지. 그런데 인생이 내게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아니, 어쩌면 대부분 사람들에게 인생은 쉽지 않은 것 같아.
알고 보면 저마다 슬픈 사연 한두 개쯤은 품고 살더라.”
“맞아. 크기만 다를 뿐이지...”
“결론은 그냥 사는 거야.
언제까지 어두운 날만 계속되는 건 없겠지.
살다 보면 가끔 오는 지루한 날들, 그 지루함이 내겐 평온이야.”
“언니, 지루함 속에서 평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은... 그만큼 많은 고난을 견뎌온 사람이잖아.
그래서 더, 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고마워, 어 잠시만, 나 빨래 다 됐다. 얼른 자.”
“응, 전화해.”
전화를 끊고 나서도 마음이 묘하게 따뜻했다.
나와 달리 막 결혼해 남편과 알콩달콩 살아가는 가가가, 아니, 예진이가 부러웠다.
그래도 진심으로 그녀가 언제나 행복하길 바랐다.
마치 친정엄마가 딸을 걱정하는 마음처럼.
자는 지우의 이불을 꽁꽁 덮어주고, 수다로 목이 말라 부엌으로 나갔다.
냉장고 문을 열어 시원한 보리차를 따라 한 모금 들이켰다.
오늘따라 유난히 시원했다.
그때 인기척을 느꼈는지, 남편이 방에서 나왔다.
그도 냉장고를 열어 보리차를 따라 원샷하더니,
조심스레 낮은 톤으로 말을 걸었다.
“주말에 에버랜드 갈까? 지우랑 셋이.”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애써 웃음을 감추며 잠시 뜸을 들였다가, 혹시라도 그가 마음을 바꿀까 봐 서둘러 외쳤다.
“그래! 재밌겠다. 약속 꼭 지켜. 지우한테 내일 얘기해 줘.”
“그래, 아침 먹고 출발하자.”
아ㅡ 이게 무슨 일인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고통은 없다고 했지 않은가.
고통이 찾아오면, 견디든지 맞서 싸우든지 결국 그 선택은 우리 몫이었다.
나는 그걸 뼈저리게 느꼈다.
제발, 이 행복이
‘그들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처럼 이어지길.
가슴속으로,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긴 겨울이 지나, 이제 나에게도 드디어 봄이 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