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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낙원은 없었다. (에세이 소설)

빈대떡이나 먹어라.

by 김하루



놀이동산에서 우리는 그동안 찍지 못했던, 서로가 지우를 안고 있는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사진 속 우리는 더없이 좋은 부부이자, 좋은 부모로 남겨졌다.


“지우 좀 안고 있어 봐. 자, 옆으로ㅡ하나, 둘, 셋, 찰칵.”


“줘 봐, 어떻게 나왔나 나 좀 보자.”


“이따 봐. 저쪽으로 서 봐.”


찰칵찰칵 셔터 소리와 지우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놀이공원 전체에 퍼졌다.
그날의 공기는 솜사탕처럼 달콤했고, 햇살은 마치 우리 가족을 위해 반짝이는 듯했다.
평범한 가족의 행복이란 게 이런 걸까 싶을 만큼, 참 따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 셋의 배가 꼬르륵거렸고 지우는 메뉴로 단호하게 고기를 정했다.
우리는 오붓하게 앉아 식당 테이블에 앉았고, 나는 지우의 고기를 잘라주었다.
남편은 고기를 구워 내 앞접시에 슬쩍 올려주었다.


가슴이 따뜻하면서도, 동시에 미안했다.
이런 사람이었는데ㅡ마치 내가 모든 걸 오해했던 건 아닌가 싶었다.

맞다. 나는 약간의 친절함에도 손에 쥐면 그 약한 온기에 바로 녹아버리는 아이스크림 같은 여자다.
작고 단순한 온기에 금세 마음이 무너져버리는, 어쩔 수 없는 푼수.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뒷좌석 카시트의 지우는 곤히 잠들었고
우리는 예전 7080 발라드를 들었다.
그 시절의 멜로디는 오래된 사진처럼 추억을 꺼내놓았고,
우리는 마치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듯 웃었다.


“어, 이 노래! 이거 진짜 오랜만이다.”


“이 노래는 기억나?”


그는 다음 트랙을 틀었다.
나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이거! 너 노래방에서 매일 부르던 거잖아.”


그동안 서로에게 원망과 분노만 가득했는데,
음악이라는 매개는 잠시나마 우리를 한 시절의 친구로 돌려놓았다.

제발, 사랑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삶이라는 거대한 전쟁 속에서 지우를 함께 지켜야 하는 전우애라도 남아 있기를 바랐다.

그런 욕심이 내 마음에 살짝 스며들었다.

심지어 그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어버린 걸 보면,
정말 나는 단순한 여자임이 틀림없다.


원래 밥을 쫄쫄 굶기다 간식 하나 던져주면
그저 감사해서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나는 또다시 그를 믿어버렸다.

오늘은 오랜만에 외롭지 않은 집에 도착했다.


“지우 안아봐. 나는 짐 챙길게.”


“응, 알았어. 네 핸드폰 이것도 챙겨.”


죽이 착착 맞았다.
지옥 같은 전쟁의 날들은 까마득히 잊은 듯했다.

그저 앞에서 지우를 안고 걷는 그의 뒷모습이 듬직해서
나는 마음이 흐뭇했다.


그날은 정말 오랜만에, 집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각자 할 일을 마친 뒤,
이미 자연스럽게 ‘각방 부부’가 되어버린 우리는
어색한 인사도 없이 그는 안방으로, 나는 지우 방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그날따라 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잘 자.”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나는 민망함에 서둘러 지우 방 문을 닫아버렸다.

그날은 오랜만에 마음이 편했다. 여행의 피로 때문이었는지, 우울증 약과 불면증 약을

잊은 채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비극은, 언제나 행복할 때 시작되는 걸까?

한두 달 동안, 지우와 셋이 주말마다 나들이를 다녔다.
그 일상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졌을 즈음이었다.

그날도 민속촌에서 돌아오는 길.
남편은 운전을 하고 있었고, 창밖에는 봄비가 내렸다.
나는 옆자리에서 빗방울이 흘러내리는 차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행복은 별거 아니야. 그냥 이렇게 가끔 셋이 함께 근교로 여행 다니는 게 제일 행복해.
지우만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전쟁처럼 싸웠던 우리가
이제는 이렇게 고요하게 함께 있다니, 그 사실이 조금은 믿기지 않았다.


봄비와 차 안의 음악의 리듬에 취해 있을 때였다.
갑자기 차 안을 가득 메운 음악이 멈췄고,
곧 블루투스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잠시 당황하더니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순간,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무심코 스피커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오빠, 어디야?”


상큼한 여자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우고,
남편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말했다.


“응, 나 지금 집에 가는 길이야. 나중에...”


여자의 목소리가 그를 가로막았다.


“지금 집에 온다고? 나 빈대떡 하려고 장 봐왔는데~ 역시 우리 통한다니까?
근데 요즘 출장이 바쁜가 봐, 이 외박쟁이야! 일단 나ㅡ”


“끊어.”


뚝ㅡ



차 안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뒤를 돌아보니 지우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빈대떡 해놓는다잖아. 막걸리 사다가 빨리 들어가. 기다리겠다.”


그는 짧게 대답했다.


“아는 동생이야.”


“내가 무슨 바보냐? 완전 마누라 말투잖아. 외박했다고 화났잖아.”


“아, 씨... 어쩌라는 거야.”


그는 핸들을 세게 꺾었다.
차가 휘청거렸고, 나는 비명을 질렀다.


“엄마야!”


내 비명소리에 지우가 놀라 잠에서 깼다.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내려줘. 너 가.”


머리로는 싸움을 멈춰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입은 이미 멈출 수 없었다.

그가 ‘아니야, 미안해 잘못했어’라고, 단 한마디라도 해주길 바랐던 걸까.
그 순간, 그의 분노가 폭발했다.


“야, 적당히 해! 넌 만족할 줄을 모르냐?!”


그의 고함에 지우가 겁먹은 듯 숨죽였다.

나는 지우를 의식해 감정을 억누르고, 차분하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해. 지우 있으니까 그만 얘기하자.”


그의 외도보다, 지우가 놀라는 게 더 슬펐다.


“뭘 그만해?!”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구나 싶었다.


“그냥... 지우 놀라니까 조용히 하자. 관심 없어. 너희들 일에.”


“너희들?!”


그는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운전은 점점 거칠어졌다.

나는 지우가 놀랄까 봐, 터져 오르는 분노를 목 끝에서 꾹 눌렀다.

낮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안 멈추면 네 인생이 멈추게 될 거야.”


그제야 그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남편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넌 그냥, 대충 넘어가는 게 없지? 남자가 사업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어, 이해해. 지우야, 내리자.”


나는 지우를 안고 차에서 내렸다.
봄비가 막 그친 길가엔 계란꽃이 앙증맞게 피어 있었다.
그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지우는 조용히 내 손에 계란꽃 한 송이를 쥐여주었다.
엄마가 울 때마다 꽃을 꺾어주는 우리 아가,
말 한마디 없이 위로를 건네는 내 천사.

가슴이 미어졌다.
이게 무슨 부모란 말인가...



지우가 건넨 계란꽃을 바라보며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빗물에 젖은 꽃잎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눈물이 다시 고였지만, 나는 지우를 위해 그것을 감췄다.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고통도 없고,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행복도 없는 것 같았다.


모든 건 결국 흘러가겠지. 하지만 아이를 위해, 나는 뭔가 깊이 생각해야 했다.
지우에게 아빠가 필요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환경이 아이에게 더 나쁜 영향을 끼칠까 걱정됐다.

나는 지우의 손을 꼭 잡았다.
작은 손의 온기가, 그 어떤 말보다 따뜻했다.



나에게 모멸감을 주는 남편, 그래,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내 아이에게 공포를 주는 저 인간에게는 단호하게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집에 가서 여러 가지 방법을 정리하고, 실행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차라리, 나는 그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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