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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나는 반과부가 되었다. (에세이 소설)

남편의 내연녀

by 김하루


지우가 며칠 동안 우리 셋이 함께 지냈을 때,

그 아이의 천사 같은 미소와 맑은 웃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그때의 행복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그의 외도와 잦은 가출은 이제 내게 수치심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 나는 결심했다.

여자로서의 행복, 사랑받는 삶은 이 생에서는 포기하자.

그 대신, 그의 자유를 허락하는 조건으로

지우와 나의 조용한 행복, 그리고 넉넉한 생활비를 얻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 나는 귀머거리처럼, 벙어리처럼 살아가면 그만이다.


'지연아, 일단 지우의 행복을 우선시하자.

어차피 이제 사랑은 없잖아.

지우가 조금만 더 크고, 내가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버티자.'


그날 밤,

방 안에는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다.

정신을 똑바로 세우려 창문을 열어두었더니, 부는 바람이 얇은 커튼을 흔들었다.





다음날 아침,

역시 그는 집에서 짐을 싸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반쯤 마신 커피잔과 구겨진 셔츠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고,

그의 여행가방 옆에는 지우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놓여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가방 안으로 넣었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너도 아비라고 애한테 정이 들었구나.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커피잔을 손에 쥔 채, 방문에 기대어 그가 짐을 싸는 모습을 느긋한 척 바라보았다.

방 안 공기는 미묘하게 팽팽했다.

냉랭한 긴장 속에서도 나는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왜?”


그가 날 노려보며 낮게 물었다.

그의 눈빛에는 짜증과 피로, 그리고 어딘가 모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나는 담담하게, 그러나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준아, 너 요즘 사업도 잘되고 있잖아.

넌 자유로운 영혼이니까, 그걸 포기 못하지?”


그는 잠시 짐을 싸던 손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원하는 걸 나는... 대충 알 것 같은데?”


“뭔 소리야? 내가 뭘 원하는데? 왜 시비 걸어?”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한숨을 삼키며 조용히 말했다.


“너, 두 집 살림해.

괜찮아. 내가 자유를 줄게.

아니면, 이혼하자.”


그는 멈칫하며 날 바라봤다.


“이혼?... 그럼 지우는?”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거짓말을 해야 했다.


“네가 키워야지.

나는 예진이네 동네로 내려가서 일 구할 거야.

성공해서... 3년 후에 지우 데려올게.”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멈춘 듯 고요했다.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리고,

손이 잠시 멈칫거렸다.

나는 그 순간, 더욱더 모성애가 사라진 여자처럼 연기를 시작했다.


“나도 아직 젊은데, 뭐... 어디 가면 좋은 사람 금방 만날 수도 있지.”

그의 눈이 커졌다.


“지우를 버리겠다는 거야?”


놀란 그는 챙기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내 손목을 잡아 식탁 쪽으로 이끌었다.


“앉아.”


나는 커피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이어갔다.


“커피 마실래?”


그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소리쳤다.


“아니, 너... 미쳤지?”


“아니, 진짜야. 요즘 봄바람 좀 들었나 봐.

주부 인생, 이제 별로야.

지우는 어머님 댁에 맡기고 살자.

집도 내놓고 말이야.”


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원하는 게 뭐야?”


그래, 예상한 대로다.

나는 살짝 미소 지으며 대사를 던졌다.


“나 혼자 살고 싶어. 이제는.”


“네가 원하는 게 뭔데?!”


그가 목소리를 높이자, 나는 더 깊이 ‘역할’에 몰입했다.

마치 치명적인 팜므파탈이 된 듯, 냉철하고 화려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머릿속을 스쳤다.

‘연극영화과 갔으면, 상도 몇 개 탔겠다.’


“자유.”


그 한마디에 그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며, 전혀 예상하지 못한 흐름에 잠시 말을 잃은 듯 했다.

나는 그를 힐끔 엿보며, 느긋하게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는 오래전에 식었지만, 나는 여전히 뜨거운 척, 후후 불며 태연한 척 연기를 이어갔다.


“난 이제 친정이랑도 연 끊었어.

아빠 문제로 다 알잖아?

그래서 무서운 게 없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뭔데.

지우는? 엄마 없이 어떻게 하라고?”


나는 시선을 살짝 내리깔고, 숨을 고르며 말했다.


“그럼 내가 지우 곁에 있을게.

지우가 조금 더 클 때까지만.

그 대신 조건이 있어.”


그는 잠시 정적 속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 뭔데?”


“지금 너 버는 돈의 30퍼센트.

그걸 생활비로 줘. 넉넉하게.”


“뭐?”


“대신,

네가 사치를 부리든,

차를 바꾸든,

두 집 살림을 하든,

나는 터치 안 할게.

집에 안 들어와도 돼.

지우 보고 싶을 때만 가끔 와.”


“...”


그의 머릿속 계산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띠띠ㅡ 뚜뚜ㅡ’

그 표정이 마치 숫자를 세는 중인 전자계산기 같았다.


“안 돼. 30퍼센트는 너무 많아.”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냉혹하면서도 치밀했다.


“그럼 이혼할 거야.

너한테 위책 사유가 있잖아.

그리고 너, 이 집도, 회사도, 다 재산분할 신청 들어갈 거야.

나 알지?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거.”


순간, 그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나쁜 놈한테는 더 나쁘게. 위기는 기회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려 속옷까지 젖어드는 게 느껴졌다.

심장은 뛰고 있었지만, 표정은 여전히 완벽한 ‘냉철한 여주인공’이었다.


‘민준아, 어서 덥석 물어.

너랑 그 빈대떡녀랑 신혼이나 즐겨라.’

내연녀의 이름을 모른 채,

나는 그녀를 그냥 ‘빈대떡녀’이라 부르기로 했다.


우리는 전쟁의 마지막 협상자 같았다.

눈빛 하나, 손끝의 미세한 떨림까지 계산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목에 고인 침을 삼키면 질 것 같은 기분에,

그저 입안의 침을 꾹 참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한참을 생각하더니,

뻔뻔하게 협상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그럼 나, 사업하느라 집에 잘 못 들어오고 하는 거... 다 이해하고 터치 없는 거지?”


“그럼. 그 대신 각서 쓰고, 공증까지.”


“그럴 필요 없어. 지우를 위한 거잖아... 오케이.”


“좋아. 그럼 매달 28일이 입금 날이야.

참, 너 그 ‘빈대떡’이랑 두 집 살림하던 거ㅡ

그날 통화 내용 블랙박스에 다 들어 있거든.

메모리칩은 내가 따로 숨겨뒀어.

날짜 어기면 바로 재산분할 신청 들어간다.

유책 사유는 명확하니까.”


그의 얼굴이 순간 굳어가며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어젯밤, 몰래 그의 차에서 블랙박스 메모리칩을 빼 숨겨뒀기 때문이다.


“야, 내놔. 씨ㅡ”


“말 함부로 하지 마.

나 이제 아쉬울 거 없어. 그리고... 당장 나가.”


그렇게 우리의 딜은 성사되었고

나는 그렇게 조용하고 냉정한 승리를 거뒀다.

차라리 지금은 지우와 둘이 이렇게 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바람은 병이고, 버릇이기에

나는 지우가 클 때까지만 버티기로 했다.

그 사이 내 일을 단단히 다져놓을 생각이었다.


“잘 가.”


내 인사에도 그는 대답 없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현관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오래 남았다.

막상 그가 떠나고 집에 홀로 남으니,

공허함과 개운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리고 곧, 깊은 우울이 천천히 몸을 적셨다.

이게 애증일까?

그래서 우리 엄마도 사고뭉치 아빠를 내치지 못하고 살았던 걸까?

‘딸은 엄마 인생을 닮는다’는 말이 스치자,

나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니야. 나는 다를 거야.”


서른여섯.

나는 그렇게 반(半) 과부가 되었다.

방으로 들어가 엄마가 선물해 주신 -빌딩부자들- 책을 꺼냈다.

소파에 눕듯 앉아 책을 펼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나 할 수 있어.

쟤야 돈 쓰느라 재테크를 못한 거지,

나는 할 수 있어.

이제부터 정신 똑바로 차리자.”


조용한 거실에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패배가 아닌 시작의 기분을 느꼈다.

나는 그의 방을 몇 시간을 뒤졌다.

확실한 외도 증거를 잡고,

혹여나 그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다음 방어책을 만들어놔야 했다.


뒷베란다 구석,

먼지가 잔뜩 쌓인 종이백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서류 뭉텅이가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지금 내 폐 건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후ㅡ’

먼지를 불어내며 베란다에 쪼그려 앉았다.

한 장, 두 장씩 서류를 살펴보다가

그의 종합소득세 신고서를 발견했다.

순이익을 대충 계산해 보고,

바로 휴대폰을 들어 문자를 보냈다.


“너의 매출, 순이익, 그리고 내가 받을 금액.

매달 28일, 월 입금.

입금이 늦을 시 이혼 재산분할 청구 준비.”


보내고 나서

나는 다시 종이더미 속으로 손을 넣었다.

이번엔 회사 다이어리였다.






별생각 없이 넘기다가ㅡ

순간, 눈이 멈췄다.

가슴이 찌릿했다.

거기엔 남편의 글씨와 여자 글씨가

나란히 대화처럼 남겨져 있었다.

‘같은 회사였구나.’

두 사람이 회의 시간에 나란히 앉아

서로 메모를 주고받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속이 뒤집혔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증거다. 찍어야 한다.’


나는 휴대폰 카메라를 켜고

손을 덜덜 떨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다이어리 내용


남편 글씨: 이따 뭐 먹고 싶어?


빈대떡녀의 앙증맞은 글씨: 스테이크! 그리고 후식으로 조각케이크, 생과일주스 먹고 싶어


남편 글씨: 자기, 먹고 싶은 거 회의 끝나고 검색해 봐.


빈대떡녀의 글씨: 응 오빠야~ 나 너무 행복해. 자기랑 이렇게 붙어 있어서 ^^


남편 글씨: 우리는 서로 존중하기, 믿어주기, 배신하지 않기, 사랑 변치 말기.


빈대떡녀: 이따 저녁에 집에 가기 없기. 우리 집에 오기, 약속해~


남편 글씨: 당연하지. 항상 삐지기 없기


‘지랄 부르스를 떨고 있네.’

입안에서 욕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배신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이성적으로 사진을 다 찍어야 했다.

‘찰칵, 찰칵ㅡ’


“개새 X.”


이번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 이제 너는 내게 없는 존재다.

더럽고 한심한 것들.


“앞으로 나도 스테이크 좀 먹어보자, 이 자식들아.”


나는 다이어리를 푹 접어

고이 제자리에 모셔두었다.

이젠 감정의 흔적 하나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 시계를 보니

지우가 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먼지를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간식이나 해야겠다.”


베란다 창문 사이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기울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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