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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어쩌면 혼자가 아니야. (마지막 회)

내 남자친구와 아들에게 (마지막 회)

by 김하루



“엄마...”


나는 엄마의 사진을 만지고 또 만졌다. 다시 한 번 촉촉하고 따뜻한 엄마의 얼굴을 만지고 싶었다.

사진 속 엄마의 미소는 인자함 그대로, 생전의 모습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커피믹스가 식을 때마다 새로 타서 올려놓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단순한 행동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피어오를 때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머릿속에 번져왔다.



갑자기 장례식장 한켠에서 삼촌이 아빠를 향해 쌓아 온 울분을 터뜨렸다.


“우리 누나 그렇게 부려먹고, 이제 고생 끝에 돌아가시니 속이 시원하세요?”


“... 나도 슬프다.”


“매형, 그러는 거 아니에요.”


삼촌의 원망과 아빠의 애매한 회피가 뒤엉킨 채 두 사람의 목소리는 장례식장 안을 가득 울렸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정적을 타고 퍼져나갔고,

친척들이 서둘러 두 사람을 붙잡아 말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빈소 한쪽에 앉아 향 냄새를 맡으며, 마지막으로 엄마와 함께 있다는 느낌을 간신히 붙들어보려 눈을 감았다.


밖에서는 조문객들의 웅성거림이 계속해서 흘러들어왔지만,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엄마의 마지막 자리만을 마음속에 붙잡았다.

그러다 다시 눈을 뜨면, 목구멍 깊은 어딘가에서 뜨겁게 끓어올라

배워본 적 없는 곡성이 터져 나온다.

서글픔과 한이 뒤엉켜 나도 모르게 쏟아져 나오는 소리였다.







다음 날,

삼촌이 헐레벌떡 장례식장으로 들어왔다. 무슨 하실 말씀이 있는지, 오빠와 나를 조용히 불러내셨다.


“잘 들어라. 엄마 공장 지분이 너희한테도 상속된다더라.

아빠한테 다 넘어가게 하면 안 된다.

지켜야 해. 엄마가 너희 때문에 지킨 거잖아."


엄마를 추모하는 공간과 시간에, 공장 얘기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난 그런 삼촌이 미워,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리고 준호 너.

넌 공장에서 대학도 중퇴하고 20년 넘게 일했잖아.

네 권리를 찾아야지. 정신 차려.

아빠 믿으면 안 돼. 그 바람피운 여자랑

평생 엄마 공장 뺏으려 하다가 이렇게 된 거... 너도 알고 있잖아."

엄마는 항상 살아생전 버릇처럼 말했다.

삼촌과 나에게 오빠를 지켜달라고, 그래서 지금 삼촌이 엄마의 마지막 불안을 막아주려 하는 것 같았다.


나와 달리 순하고, 답답할 정도로 아빠의 뜻대로 살아온 오빠는

항상 자신의 길을 포기했다.


20년 전쯤, 오빠가 경호학과에 붙어 기뻐하자,

아빠는 그 뜻을 꺾고 말했다.


“공장을 이어받을 사람은 너다.”


그렇게 오빠는 대학을 끝내 마치지 못했다.


또, 오빠는 머리가 비상해 간간이 자신이 만든 작은 기계 장치나 시제품을 만들어

특허청에 등록하거나 다른 사업체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면,

아빠는 마치 자신의 노예를 빼앗기는 주인처럼, 끝없이 노심초사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결국, 오빠는 공장 안의 허수아비이자 아빠의 손과 발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엄마는 오빠가 항상 아픈 손가락 같다고 말했다.


사실은 오빠에 대한 불안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

엄마에게도 모든 아픔을 알고 속마음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단짝 친구.

바로 엄마의 하나뿐인 여동생, 이모였다.

이모는 사실, 조금 심술스러운 성격이었다.

20년 넘게 공장에 묶여 아빠의 그늘 안에서 세상을 잘 모르는 어른이 되어버린 오빠를 보며,

이모는 자기중심이 없다며 걱정과 비난으로 혀를 차곤 했다.

그 말과 태도는 늘 엄마의 상처를 후벼팠다.

그래서 더더욱, 엄마는 늘 아빠 사이에서 오빠의 독립을 돕곤 했지만,

오빠는 세상을 너무 몰라 어떤 일도 금세 함정에 빠지고, 결국 자기만의 세상 속으로 숨고 말았다.

또, 이모는 나의 사정을 알게 된 이후로는, 마치 새로운 상처를 발견한 것처럼,

바람을 피우는 남편을 둔 엄마의 팔자를 딸이 이어받았다고 비아냥거리며, 엄마의 상처를 더 깊이 후벼 팠다.

엄마가 종종 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내가 없으면, 네가 우리 집의 기둥이야.”


난 이 말이 너무 무거웠지만, 이미 내 머릿속에는 엄마가 하던 역할을 대신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굳혀져 있었다.


나는 삼촌과 오빠를 뒤로하고 빈소로 들어가,
국화꽃 한 송이를 올리며 엄마를 위로했다.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러나 지금 나는 슬픔에 잠겨, 삼촌과 아빠의 분쟁이 마음에 닿지 않았다.

지금 나의 모체가 사라져 버렸는데, 돈 이야기를 들을 겨를도, 여유도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고 장례식장 밖으로 나섰다.

그때, 장례식장 밖에서 큰 소리가 울렸다.


“매형! 평생 누나가 애들 지키려고 남겨둔 걸

왜 말하지 말라 그래요?!”


“야 이놈아, 애들한테 쓸데없는 말 하지 마!

그 공장은 이제 내 거야. 내가 남편이잖아!”


“매형, 누나랑 내가 몇십 년 동안 공장을 돌릴 때
껴들어와서 공장 담보로 대출받고,
사업한다고 말아먹고, 바람나서 나 몰라라 하고,
이자만 매달 천만 원 넘게 버티다 누나가 이렇게 갔다고요!


지연이가 번 돈도 공장 부도 막는 데 다 들어갔잖아요.
그런데 누나가 가니까 혼자 다 꿀꺽해서 그년이랑 짜고 치려는 게 사기 아니에요?
매형이 애들한테 아버지 맞나요?”



삼촌은 엄마와 함께 공장을 지켜낸 흑기사였다.

누나를 지키기 위해 잘 나가던 무역회사를 나와 엄마와 손잡고 공장을 시작했다.

작은 공장에서 출발해 대기업 하청까지 성장시키는 동안, 아빠는 갑자기 사장 행세를 하며 엄마와 삼촌을 괴롭혔다.

온갖 꼼수를 다 써 공장을 뺏으려 했고, 아빠의 형제들이 조금씩 개입하며 재산을 나누도록 압박했다.

엄마는 그 똥 같은 빚더미를 메꾸며 살아왔다. 지켜낸 사연이 깊었기에, 나도 아빠가 싫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도 남아 있는, 애증의 관계이기도 했다.


“매형, 누나 남은 공장 건드려서

또 애들 거지 만들 생각 하지 마세요.

저 아직 살아 있습니다.”


흑기사 같은 삼촌은, 대장암 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배에 힘을 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너랑 이제 무슨 상관이냐?

너네 누나는 갔어. 너랑 나랑 이제 남이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몸을 돌려 장례식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왜 우리 엄마의 마지막 길마저

평온할 수 없는 걸까.


엄마가 가는 길이 불안할까 봐, 가슴이 미어졌다.

하늘에서는 눈이 흩날리고 있었다.


지우 아빠는 장례식이 거의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지인들은 보이지 않는 지우 아빠를 찾아 헤맸지만,

나는 해명도, 변명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사정을 아는 몇 안 되는 친구들만이

지우 아빠 이야기를 묻지 않았고,

그들 앞에서만 나는 조용히 울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장례식장 앞 벤치에 앉아 눈을 맞으며,
연락조차 닿지 않는 지우 아빠가 혹시라도 올까,
내심 기다리며 그를 맞으러 나갔던 것일지도 몰랐다.



차갑고 쓰라린 눈송이가 나의 눈물을 감추었다.

가로등 불빛에 처량하게 내리는 눈이 어깨 위로 스며들었다.

조금만 앞을 짐작할 수 있었다면,

이 퍼즐을 처음부터 새롭게 맞추고 싶었다.


난 순식간에 고아가 되었다.

이 지구에 혼자 남겨진 사람이라는 믿기 힘든 사실이

가슴을 짓눌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검은 한복 위로 눈송이가 소복하게 쌓여갈 때쯤,

가로등 사이로 환영처럼

저 멀리서 내 남편이 아닌 누군가가 다가왔다.

발걸음 소리는 조용했지만,

마치 내 심장 박동을 따라 걷는 듯 나를 조여 왔다.


나는 숨을 죽이고 눈을 가늘게 떴다.

가로등 아래에서 그의 실루엣이 점점 선명해질수록,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 묻어두었던 이름이 저절로 떠올랐다.


성민.


눈송이에 젖은 내 어깨를 살며시 털어주고,

따뜻한 패딩이 내 어깨 위로 덮였다.

나는 그제야 조금의 안정감을 느꼈다.

첫사랑 성민이, 지인들에게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어

내 곁으로 와 준 것이다.


우리는 말없이 하얀 입김만 내뿜으며 앉아 있었다.

충혈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그의 손길이 내 등을 살며시, 조심스레 토닥이는 걸 느꼈다.

순간, 그것은 엄마가 보내준 포근한 위로처럼 느껴졌다.


‘난 어쩌면 혼자가 아니야...’


눈송이가 시야를 가릴 만큼 점점 더 짙게,

포근하게 내렸다.

앞으로 다가올 운명처럼,

서서히 나를 감싸 안았다.






'내 남자친구의 아들에게' 연재 1부를 마칩니다.


더욱 좋은 모습으로 2부에서 천천히 찾아뵙겠습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많은 응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작가님들과 독자님들, 늘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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