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은 음악 감독이었다. 정확히는 영화 음악 감독.
영화를 더 극적으로 만들어 주는 사람,
누군가의 이야기에 조미료를 더해서 완벽한 음식으로 만드는 사람.
어릴 때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걸 좋아했던 내게 굉장히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내 음악으로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빠의 직장이 위태로워져 다른 지역의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나의 꿈에 적신호가 켜졌다.
음악을 하고 싶어도 감히 말할 자신이 없었다.
사실은 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좋아하긴 하지만 내가 과연 재능이 있을까?
손에 꼽는 천재가 아니고서야 내가 그 치열한 재능의 영역에서 안 굶고 살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재능은 이미 두드러지지 않았을까?
고민이 커질 무렵 학교에선 이제 ‘장래 희망’이 아니라 ‘진로’를 정해야 한다고 했다.
막연하게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이 아니라 되어야 할 나의 모습을 생각해야 했다.
부모는 내게 공무원, 교사를 원했다. 잘리지 않을 직장에 안정적인 월급을 받는.
적당히 월급 받다가 좋은 곳에 시집가는 것이 최고라 했다.
난 더 이상 내 꿈이 음악감독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1점대 중반의 애매한 내신 성적, 뭘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은 나와 달리
내 동생은 과학고에서 선정된 영재였다. 외교관이 되고 싶다며 눈을 반짝이던 아이.
집에서는 자연스럽게 나보단 동생의 미래에 관심이 많았다.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에 나보다는 창창할 동생의 미래를 위하여
나는 그 아이의 인생에 조미료를 더하기로 했다.
재수도, 취업에 들 시간과 비용도, 취업이 되었을 때 연봉도, 미래 안정성도 다 계산했다.
나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결과 값을 내야 한다.
원치 않은 학교에 원치 않은 학과
그저 취업이 잘되는, 자취를 안 해도 되는,
집에서 가까운 학교의 간호학과.
내 성적을 버리고 버리고 버려 가게 된 학교는 합격을 해도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스무 살 다들 반짝이는 시절을 만끽이라도 하듯 축제에 미팅에 즐기며 살았지만
나는 전문대 간호학과의 타이트한 커리큘럼에 맞춰 사느라, 하고 싶은 걸 포기했다는 절망감에 사느라
그 좋은 시절을 즐기진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무렵의 내 술버릇은 아빠 무릎에 누워 되뇌는 것이었다.
‘ㅇ아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언니가 돈 열심히 벌어서 다 해줄게.’
어쩌면 그건 내가 부모로부터 듣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르겠다.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던 내 어린 동생은 그때부터 나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나의 술주정이 와닿았다기보다는 내 책임감의 무게가 느껴졌다 했다.
그걸로 되었다.
내 눈물겨운 노력을 인정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했다.
그렇게 나는 간호사가 되었다.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 순 없다. 그렇다고 잘하는 것을 찾는 것은 더 어렵다.
적당히 타협한 내 인생이 근사하진 않지만 나는 나의 자리에서 최선의 선택을 했고 지금도 후회는 없다.
10년 차 간호사가 된 지금, 이제 여유도 생기고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나는 나의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