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두 번째 모임 준비를 마치고 수첩을 덮은. 밤.
정이는 휴대폰 알림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윤철"
대학 시절 첫사랑, 그리고 오랫동안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이름이었다.
손가락이 잠시 떨렸다.
'잘 지냈어?'라는 짧은 메시지가 이어졌다.
"정이야, 나 만나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시간 좀 내줄 수 있을까?"
정이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
방 안은 고요했지만, 머릿속은 한순간에 어지럽게 소용돌이쳤다.
"왜 하필 지금?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심장은 두려움과 설렘 사이에서 빠르게 뛰었다.
책상 위 수첩이 시야에 들어왔다.
'숨결'이라는 이름, 그리고 '다음 모임 계획'이라는
글자.
하지만 휴대폰 화면 속 이름은 전혀 다른
과거의 빛이었다.
정이는 이마를 짚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 정말, 내가 만나도 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정이는
"고민은 고민을 낳을 뿐 만나서 말하자."라고 생각한 뒤
카페를 향해 걸었다.
10분여를 걷자 카페가 보였다.
카페 문을 열자 은은한 커피 향이 퍼졌다.
창가 자리에는 이미 지호가 앉아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자세나 습관적인 손동작은 그대로였다.
정이는 조용히 다가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오랜만이야."
윤철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정이는 짧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정말 오랜만이네."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윤철은 커피잔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 소식 들었어. 같은 대학 친구 통해서...
몸은 괜찮아?"
정이는 순간 놀랐지만, 곧 미소로 감정을 덮었다.
"응. 괜찮아. 그냥... 이젠 받아들이는 중이야."
윤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네가 그런 일을 겪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괜히 늦게 알아서... 미안해."
정이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럴 일 아니야.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은 이제 필요 없잖아."
윤철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리고 서류봉투 같은 것을 꺼내 정이 쪽으로 밀었다.
"사실, 이번에 회사에서 여성 건강 관련 캠페인 진행 중이야.
전문가 인터뷰나 당사자 이야기를 모으는 프로젝트인데...
너 이름이 떠올라서."
정이는 봉투를 바라보다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 그럼, 일 얘기하려고 나를 부른 거야?"
"응 솔직히 네가 이 일에 참여해 준다면 의미가 클 것 같아서."
정이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철의 눈빛엔 진심이 섞여 있었지만,
커피 향이 점점 옅어지는 가운데, 정이는 조용히 대답했다.
"생각해 볼게. 그게 진심이라면, 나도 도움은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윤철은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마워 부담 주려던 건 아니야."
정이는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엔 차분한 거리감이 깃들어 있었다.
"알아 예전처럼 모든 걸 감정으로 받아들이는 시기는... 이제 끝났으니까."
카페를 나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정이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가슴속 어딘가가 묘하게 흔들렸지만,
그 흔들림이 예전처럼 아프진 않았다.
"이제는 과거가 나를 흔들지 못한다.
나는 지금의 나로, 내가 만든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