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師表('작가의 서랍'을 열며)

나의 삶과 글쓰기의 여정

by 배용현

글쓰기는 인간만이 이룰 수 있는 고도의 지적 활동이자 소통의 방식이다.

이는 인간 행동 중 거의 유일하게 이성과 감성, 그리고 지식과 사상이 동시에 발현되는 것으로 유인원으로부터 독립한 호모사피엔스가 라스코 벽화를 통해 위대한 인류 역사의 시작을 알린 것 또한 글씨기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인류의 태동 이후 끊임없이 새로운 문명(‘文’明)이 창조되고 문화(‘文’化)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글(文)’을 통해 장구한 시간 동안 축적되어 온 선대의 지식이 새로운 시대와 환경에 융합하며, 변화와 진보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인류의 진화·발전을 위한 문명사적 생식(生殖) 행위이기에 나는 보다 가치 있고 올바른 글쓰기를 위해 정진하고자 한다.

그 첫걸음은 소소한 일상의 기록으로 시작할 것이며, 나의 일천한 지식과 분별없는 생각들을 정리하고 다듬어 가는 과정을 통해 삶을 성찰하고 내가 살아가는 이 투박한 시대를 조망하는 시야를 넓혀 나가고자 한다.


■ 나라는 사람은....

지천명의 나이를 넘겼지만 나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규정하고 평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솔직한 자기소개서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게만 느껴진다. 게다가 26년 차 직장인인 나에게는 이미 나를 소개하고 알리기보다 남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게 더 익숙해져 버렸기에 진정한 나의 본모습을 글로 적는 것이 무척 생경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나의 글쓰기 경험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를 대신하고자 한다.

나는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기독교 계열의 중학교를 졸업했다.

이 학교에서는 정규 과목으로 성경을 공부했고 매일 아침 조회 시간에는 전교생이 돌아가며 하루에 한 명씩 기도를 했다.

1학년 2학기를 맞이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드디어 나의 기도 순서가 되었다. 다행히 전날부터 비가 내려 운동장 조회가 아닌 방송 조회로 대체되었다.

이날 나는 노트 2장 정도 분량의 기도문을 썼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것이 제대로 된 나의 첫 글쓰기가 아닌가 싶다. 심지어 1,000명이 넘는 대중 앞에서 공개 발표도 했으니 이 글은 제법 그럴싸한 데뷔작일 것이다.

사실 기도를 아주 잘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전교생 앞에서 망신만 당하지 말자는 각오로 기도문을 준비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반응은 뜨거웠다. 생방송을 마치고 잔뜩 긴장한 채로 방송실을 나와 교실로 들어서자 환호성과 엄지 척으로 친구들이 나를 맞아 주었다.

심지어 교목 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러 “꼭 신학대학에 가서 목회자가 되거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하지만 나는 그 말씀을 따를 수가 없었다. 나는 매년 부처님 오신 날이면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서(정확히는 강제로 끌려가서) 철야 기도를 올려야 했던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영화를 좋아해서 누군가 장래 희망을 물으면 영화감독이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래서 콘티나 시나리오 비슷한 것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유일한 애독자이자 비평가였던 누나는 항상 (지금 이 나이를 먹고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독설로 모멸감을 주었다. 그래도 나는 결코 좌절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다.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따로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해야 했는데, 이는 제법 많은 비용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좋은 시나리오를 써서 감독이 되는 우회로(솔직히 성적에 맞춰 전공을 선택한 것이 절대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를 찾아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대학 입학 후 영화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는 나의 야심 차고도 담대한 기상이 꺾이는 데는 단 3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대학 동기들이 쓴 글을 읽은 순간 어릴 적 누나의 혹평이 단순한 장난이나 놀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술대학도, 명문 대학도 아닌 우리 학교의 동기들이 이 정도로 글을 잘 쓴다면, 도대체 전국에는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과감하게 펜을 놓았다.


그러던 중 대학 4학년 때, 글쓰기에 대한 나의 생각에 대전환을 이루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당시 전공 필수 과목을 모두 이수한 나는 4학년부터는 마치 도장 깨기처럼 타 학과의 전공과목을 수강했고 그중 하나가 법학과의 전공 필수 과목인 형사소송법이었다.

이 과목을 선택한 이유는 담당 교수가 Y 대학에 적을 둔 젊은 시간 강사로 수업도 재미있고 성적을 제법 잘 준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업 계획서에는 중간고사 없이 기말고사와 출석, 그리고 리포트만으로 성적을 준다고 적혀있어 비전공자인 나에게는 비교적 문턱이 낮아 보였다.

새로운 학문을 접하며 느끼는 신선한 긴장감에 빠져들고 있을 때쯤, 수업을 마친 교수님이 나를 강사 휴게실로 따로 부르셨다.

교수님 손에는 중간고사 대신 제출한 리포트 채점 결과가 들고 나오셨는데 “아주 훌륭한 소논문이었다.”는 말씀과 함께 붉은색 펜으로 빼곡하게 칭찬 코멘트가 달린 리포트를 보여 주셨다. 그러면서 자신이 추천서를 써 줄 테니 Y대학 대학원에 오라는 진지한 제안과 함께 나에게만 유일하게 A+의 성적을 주셨다.

이때 나는 '문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이 아닌 논리와 객관적 사실에 기반한 글쓰기에 적합한 뇌 구조를 가졌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오랜 세월 그리도 집착했던 문학과는 완전히 절연하게 되었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할 즈음 IMF를 맞았고 그 와중에도 운 좋게 취업에 성공을 했다. 첫 직장에서 3년 정도 근무하고 그 경력을 발판으로 현재의 직장으로 이직해, 주경야독으로 정치학 석사 학위도 받았다.


올해로 23년째 근무하고 있는 나의 직장은 해양수산부 산하의 공익법인으로 바다가 우리 삶에 있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공간이자 자원인지를 다양한 사업과 교육을 통해 알리는 일을 주로 하고 있다.

우리는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전국 어디서나 3시간이면 연안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다수의 사람들은 바다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한다. 마치 깨끗한 공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바다와 공존하며, 바다를 제대로 알고 친근하게 살아가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사업들을 기획하고 있다.


훌륭한 기획서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수용자를 쉽게 이해시키고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기획서를 작성하는 작업 또한 하나의 창작이고 어엿한 글쓰기이다.

나는 마침 지난 대학 4학년 때의 경험과 깨달음으로 기획서를 제법 잘 쓴다는 평판을 들으며, 지금까지 이 회사에서 생존해 왔다. 그리고 그간의 이런저런 경험과 나쁘지 않은 평판이 일종의 낙인 효과(?)가 되어, 언론 보도자료나 기고문 등은 직원 중 내가 가장 많이 쓰고 있으며, 공동 저자로 참여해 책 2권을 내기도 했다.

지금은 우리 사회 여러 분야에서 대결적인 갈등 구조가 점차 심화되어 가는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글(다름과 틀림의 정치학)과 오토바이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가끔은 홀린 듯이 노트북은 켜고 가벼운 산문이나 소설을 쓰고 있다.


■ 내가 쓴 책

이순신을 만나다.jpg 이순신포럼 창립 10주년 기념으로 발간된 서적으로 공동집필진으로 참여(2019, 책익는 마을)
한국해양사 표지.jpg 국내 대표 해양사 유적지 교원 연수 교육교재 공동집필(2021, 한국해양재단)


■ 내가 쓴 시나리오로 만든 영상

사업 성과 홍보 영상의 시나리오 작성(2025)


■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청소년 시절, 나는 오토바이를 가지고 싶었다. 아주 간절히.... 하지만 나름 모범생이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물론 모범생이라는 말이 공부를 잘했다는 것은 아니며, 부모님과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고 통제에 잘 따르는 평범한 학생이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억압되고 통제된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오토바이는 자유와 저항의 상징과도 같았다. 게다가 당시의 시대상은 군부독재의 총끝에서 시민들의 힘으로 민주화에 가까워지던 시기로 3.1절이나 광복절이면 도심을 무법천지로 만들었던 폭주족들 또한 이런 저항의 산물로 이해하고 싶다.

그리고 당시는 홍콩 누아르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로 거의 모든 영화에는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이 등장하곤 했다. 특히 영화 "천장지구"에서 유덕화가 오토바이에 사랑하는 여자를 태우고 도심을 질주하는 장면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질 않는 명장면으로 뇌리에 남아 있다.


이런 이유로 30여 년을 간직해 온 오토바이를 향한 간절한 열망을 이제야 비로소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오랜 로망을 이루기 위한 첫 관문이었던 오토바이 입문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도전이었다.

오토바이는 그저 엔진 소리만 들어도 심장을 고동치게 하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튼튼한 철제 프레임과 커튼 에어백 등 각종 안전장치로 운전자를 보호하는 자동차와 달리 시속 200km/h 이상의 속도를 내는 기계를 오롯이 맨몸으로 컨트롤하는 것은 초보자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처럼 주변에 그 어떤 도움이나 조언도 받을 수 없는 대다수의 초보 운전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남기고 싶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25년 4월 현재 오토바이 등록 대수는 225만대라고 한다. 도로를 나가면 배달 등을 위한 생계형부터, 잔뜩 멋을 부린 레저형 오토바이까지 쉽게 마주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오토바이에 입문하는 것은 여러 난관의 연속이다. 우선 가족의 반대와 사회적인 편견과 싸워야 하며, 배기량 250CC 이상의 오토바이를 운전하기 위해서는 2종 소형 면허가 필요하다. 실기시험 합격률이 20% 이하라고 알려진 이 시험을 어렵게 통과했다고 하더라도 본격적인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된다.

자동차의 경우, 운전 전문 학원에서 도로 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오토바이는 안전한 라이딩을 즐기기 위한 대중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전무한 실정이다. 물론 일부 수입 오토바이 브랜드가 도로 연수와 안전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나 이는 신규 구입 고객만을 대상으로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나 또한 오토바이를 처음 중고로 구입하고 시트에 앉아 한참을 출발조차 하지 못하고 진땀을 흘렸던 경험이 있다. 이처럼 지금 우리의 현실은 오토바이 초보자들을 사지에 몰아넣고 방치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오토바이에 입문해서 초보를 벗어나기까지 겪었던 다양한 경험과 지식, 그리고 초보 운전자로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정보 등을 전달하고자 한다.

이와 함께 오토바이가 결코 위험하고 위협적인 교통수단이 아니라는 점을 널리 알리고, 모든 오토바이 운전자들이 품위를 유지하며 공공의 질서를 지킴으로써 안전 운전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안내서이자 초보 운전자를 위한 필독 교재를 만들고 싶다. 이 글을 통해 오토바이의 매력이 알려지고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분들의 시각을 우호적으로 바꾸는데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이 글이 완성되면, 다음에는 오토바이와 함께 만들어가는 활력 넘치는 삶을 글로 풀어쓸 계획이다. 나에게는 초등학교 2학년의 셋째 아들이 있다. 이 녀석과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여행하면서 만든 추억을 글로 남겨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그리고 앞서도 언급한 우리 사회 여러 분야에서 대결적인 갈등 구조가 점차 심화되는 현상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글도 본격적으로 써 보고 싶다.

또한, 인간의 본성과 인간다움의 가치를 탐구하고 그 안에서 우리네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가슴 따뜻한 소설을 쓰고 싶다.

아울러, 해양의 가치와 의미, 그리고 미래 세대를 위한 올바르고 지속 가능한 바다의 활용을 위한 방안을 논하기 위한 글을 꾸준히 써오고 있다. 이를 집대성해서 내가 은퇴하기 전에는 책으로 발간하고 싶다. 이것이 내 글쓰기의 마지막 소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