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art에서 aparty로

by luminous

밤 10시, 단지의 창들은 반쯤은 꺼지고 반쯤은 남아 있다. 104동 앞에는 학원 셔틀이 서서히 브레이크를 밟고, 졸린 아이들이 교재가 꽉 찬 가방을 끌며 내려온다. 지하주차장 B3 구역에는 오래된 경차가, 펜트하우스가 있는 동의 전용구역에는 반짝이는 SUV가 나란히 선다. 엘리베이터 안 안내판에는 층간소음 민원이 붉은 글씨로 깜빡이고, 무인 택배함에는 프리미엄 로고의 쇼핑백과 대용량 생필품 박스가 섞여 쌓여 있다. 경비실 TV 옆에는 단지 시세를 실시간으로 띄우는 중개업소 LED 화면이 반짝이고 있다. 이곳은 많은 사람이 ‘함께’ 사는 곳이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잘게 나뉜 칸들이 나란히 붙어 있는 apart의 풍경이다.

아파트(apartment)는 말 그대로 ‘a-part’, 떨어져 있는 조각이다. 처음엔 한정된 땅에 더 많은 삶을 수용하려는 기술이었지만, 한국 사회에서 그것은 어느새 자산의 이름, 계급의 기호가 되었다. 평수와 층수는 사람의 서열표로 읽힌다. 30평과 50평의 간격은 거실의 너비를 넘어 학군과 사교육의 문턱으로 이어지고, 부모의 대출 상환표는 아이의 여름방학 시간표를 바꾼다. 집값은 소득을 압도하고, 소득은 다시 집값을 추격하며, 그 차이는 다음 세대로 이월된다. 사는 곳이 곧 사람을 설명하고, 우편함 이름표가 이력서의 첫 줄을 미리 써버리는 사회. 아파트는 집이 아니라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기계로 작동한다.

이 apart의 끝에는 늘 하나의 보이지 않는 벽이 서 있다. y, 곧 “왜(y)”라는 질문의 벽. 왜 우리는 서로를 창 너머의 숫자로 가늠해야 하는가. 왜 평수의 단위가 삶의 품격을 대리하고, 왜 층수의 높낮이가 미래의 고저를 선점해야 하는가. 자산→교육→직장→주거로 이어지는 회로는 매끈하고 단단하여, 한 번 눌러붙은 궤적은 좀처럼 이탈하지 않는다. 그 벽 앞에서 우리는 서로를 비교하고, 쪼개고, 결국 자기 자신을 숫자로 증명한다. y를 묻지 않는 한, apart는 영영 apart로 남는다.

벽을 넘어서는 방법은 단순히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왜 이곳에 사는가’, ‘이 공간이 나와 타인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을 삶의 중심에 들이는 일이다. 그렇게 질문을 붙잡을 때 apart는 단순히 떨어져 있는 조각이 아니라, y를 덧붙여 aparty, 곧 연대의 무리로 변형된다. 층간소음 갈등으로 소송만 남기던 이웃들이 공동 놀이터를 함께 관리하기 위해 모임을 만들고, 경비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입주민 회의가 열리는 순간, 닫힌 칸은 통로가 된다. 벽으로 구획된 공간이 서로를 외면하게 하는 구조라면, 질문과 응시를 통해 생겨난 aparty는 그 벽을 넘어 작은 연대의 광장으로 이어진다.

아파트가 더 이상 투기의 아이콘, 불평등의 확대경이 아니라 수평적 연대의 장이 될 수 있을까. 시세 그래프보다 이웃의 이름을 앞세우는 습관, 즉 apart의 문법을 뒤집는 일상적 선택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각자의 칸에 웅크린 생활자가 아니라 aparty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네모의 집을 다시 집으로, 그리고 집을 다시 사회로. 결국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도, 내놓아야 할 답도 하나다. “왜”의 벽을 넘어, 함께의 문장을 다시 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