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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젠테이션의 밤 – 발표 준비하며 흘린 땀과 눈물

<이민자의 배움 서사> 시리즈 4 (3)

by 이민자의 부엌
ChatGPT Image 2025년 11월 10일 오후 03_15_47.png


4년제 대학에 들어간 뒤,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시험보다 더 무서운 것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바로 프레젠테이션이었다.


캐나다 대학에서 보내던 시간 동안, 대부분의 과제는 그룹 발표였다.
아이디어를 모으고, 자료를 나누고, 파워포인트를 만들고,
그리고 결국 한 무대 위에 함께 서야 했다.
겉으로 보기엔 단순한 과정 같지만, 막상 그 안으로 들어가면 숨이 턱 막혔다.


20대 초반 친구들은 모두 바빴다.
파트타임 스케줄에 치이고, 약속을 잡아도 누군가는 30분 늦고,
또 누군가는 읽음 표시만 남기고 조용히 사라졌다.
처음엔 억울했다. “왜 이렇게 무책임하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깨달았다.
그 느슨함이 그들의 리듬이었고,
나는 그 속에서 호흡하는 법을 조용히 배워가고 있었다.


발표를 가로막는 가장 높은 벽은 역시 ‘언어’였다.
내 생각을 영어로 또렷하게 꺼내야 하는 순간, 발음 하나가 어긋나면
공기마저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
심장은 제멋대로 뛰고, 목소리는 흔들렸고, 손끝은 부들부들 떨렸다.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거울 앞에 섰다.
“Good afternoon, everyone…”
그 한 문장을 수십 번, 아니 백 번도 넘게 되뇌었다.
혀가 말을 거부하듯 굳어버릴 때면 눈물이 고였다.
가족 모두 잠든 새벽, 노트북 불빛만이 방 안에 깜빡이고 있었고
나는 그 작은 빛 하나에 의지해 대본과 씨름했다.
그 시절의 밤은 길고 길었지만, 그 밤이 나를 단단하게 세웠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내 속도’였다.
20대 친구들은 한 번 읽고 외우는데
나는 열 번을 읽어도 혀가 자꾸 꼬였다.
“내가 제일 나이 많은데… 제일 못해…”
그 생각은 나를 금방 작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간신히 스스로에게 건넨 한 문장.
“빨리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멈추지 않는 게 중요해.”
그 말이 매번 내 등을 다독여 주었다.


발표 당일.
조명이 내려앉는 순간 다리가 떨리고,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히 차올랐다.
슬라이드 클릭 버튼이 미끄러질 정도였다.
첫 문장을 내뱉는 순간 목소리가 떨렸지만,
어디선가 ‘진짜 나’의 목소리가 나왔다.


“Good afternoon, everyone…”


열 마디, 스무 마디… 말을 이어갈수록 떨림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마지막 슬라이드를 넘기고 “Any questions?”라고 말했을 때,
교수님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미소 하나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날의 박수는 내가 견뎌온 모든 밤에 대한 조용한 답례였다.


돌아보면, 거울 앞에서 울먹이며 반복했던 문장들,
발음이 꼬여 처음으로 돌아갔던 순간들,
손땀으로 젖어 미끄러지던 리모컨까지.
그 모든 것은 부끄러운 과거가 아니라
끝까지 버티며 걸어온 나 자신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응원이었다.


가끔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와 마주선다.
50대의 몸으로 20대 친구들 사이에 서서
떨리는 목소리로 발표를 시작하던 나.
그 순간마다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되살아나는 문장 하나.


“You can do this. 넌 할 수 있어.”


그 짧은 주문이
정말로, 내 인생 전체를 바꿔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대학 4년 동안 수없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지만,
할 때마다 숨이 차오를 만큼 힘들었다.
그러나 그 힘듦 하나하나가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 돌이 되었다.


여러분은 인생에서 어떤 ‘프레젠테이션의 밤’을 지나오셨나요?
그 떨리는 무대 위에서 끝내 여러분을 일어서게 만든
그 단 한마디가, 지금도 여러분을 조용히 지켜주고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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