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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세 이민자, 다시 찾은 나의 안식처

<이민자의 배움 서사> 시리즈 4 (4)

by 이민자의 부엌


ChatGPT Image 2025년 11월 21일 오전 08_47_57.png


대학에 들어간 뒤, 내 하루는 수업이 끝나고부터 시작됐다. 끝이 보이지 않는 리서치 페이퍼, 주말을 삼켜버리는 에세이… 그 모든 과제 속에서 내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도서관이었다.


그 문을 열면, 나는 ‘엄마’도 ‘이민자’도 아닌 오직 공부하는 나 자신으로 존재했다. 늘 같은 자리, 3층 창가 끝 테이블. 주변은 20대 초반 학생들로 가득했다. 빠르게 두드려지는 키보드, 친구들끼리만 통하는 농담과 웃음, 시험이 다가오면 늘어나는 음료 캔… 그 속에서 나는 조금 어색하지만, 결코 외롭지 않은 존재였다.


때로는 책상 위에 얼굴을 파묻고 한숨이 새어나왔다.
‘나도 저 나이였을 때 저랬을까?’ 생각이 나를 휘감았다가, 이내 자신에게 말했다.
“괜찮아. 지금이 너의 두 번째 20대야.”


시험 기간, 도서관의 불은 자정이 넘어도 꺼지지 않았다. 모두가 다크서클과 커피를 부여잡고 버텼고, 나도 그 속에 있었다. 50대라는 사실은 무색했다. 눈이 반쯤 감긴 채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 공간의 열기가 좋았다. 거기서는 나이 대신, 노력만 보였다.


피곤이 한계에 다다르면 책상에 잠시 엎드려 졸기도 했다. 눈을 뜨면 창밖에는 이미 해가 기울어 있었다. 가끔은 이름도 모르는 학생이 놓고 간 따뜻한 커피 한 잔이 옆에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작은 친절이 주는 위로가 이렇게 크다는 걸, 그곳에서 배웠다.


노을이 스며드는 창가에서 나는 중얼거렸다.
“괜찮아. 지금 이 시간이 진짜 너의 시간이야.”


도서관은 나를 심판하지 않았다. 영어 발음이 모자라다고 비웃지 않았고, 50대라 뒤처질 거라 단정하지도 않았다. 책장 넘기는 소리, 종이 긁는 연필, 일정한 리듬으로 울리는 키보드 소리만이 오늘도 내가 여기 있음을 인정해 주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잃어버린 ‘나’를 한 장 한 장 다시 붙여 나갔다.
누군가 부여한 역할이 아닌, 내가 선택한 나. 공부하는 나, 도전하는 나, 매일 조금씩 성장하는 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두하다가 아들이 연락했다.
“엄마, 또 도서관이죠? 지금 데리러 갈게요.”
그 말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어느 날은 너무 늦게까지 남아 있다가 학교에서 운영하는 귀가 지원 팀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그 일도 신기하게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도서관은 내게 단순한 공부 공간을 넘어, ‘나’를 다시 세워준 든든한 배경이었다. 안식처였고, 나를 나답게 만들어준 공간이었다. 돌아보면 그 시절 도서관은 작은 성소였다. 노을, 쌓여가는 필기 노트, 닳아가는 연필심… 모든 것이 지금도 마음 한구석을 따뜻하게 데운다.


이민자의 삶은 늘 ‘어딘가에 속하지 못한다’ 는 감정을 품고 살아간다. 하지만 도서관에서는 달랐다. 20대 학생들과 속도는 달랐고, 영어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껴안고도 나는 여전히 내 시간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대학 4년 동안 수많은 프레젠테이션을 했지만, 늘 떨렸고, 늘 힘들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서게 해준 것도 결국 도서관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넘어지고, 다시 일어났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지금의 나는 다른 곳에 있지만, 마음의 일부는 아직도 3층 창가 자리에 남아 있다. 늦은 오후, 책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던 빛. 그 자리에서 나는 지금도 천천히 책장을 넘긴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공간이 있나요? 나이와 상관없이, 진심으로 붙잡는 순간만큼은 누구나 가장 젊고 빛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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