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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의 엄마

<이민자의 배움 서사> 시리즈 4 (5)

by 이민자의 부엌
ChatGPT Image 2025년 11월 11일 오전 09_53_51.png


수업이 끝나면 교실 한쪽, 내 자리로 가장 먼저 달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Mom!”


처음엔 그 소리가 어색해 자꾸 웃음부터 났다.
내 아이들보다 훨씬 어린 스무 살 학생들이 나를 엄마라고 부른다는 사실이 낯설고도 이상했다.
‘어… 내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나?’
며칠 동안 그 말이 마음속을 둥글게 맴돌았다.


그러다 오래전 들었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사람 사이의 거리는 말 한마디, 마음 한 뼘이다.”


그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혹시 내가 먼저 마음 한 뼘을 내밀지 못해, 아이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게 아닐까.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먼저 웃어주고 먼저 다가갈 책임은, 사실 나에게 있었음을.


그래서 어느 날, 용기 내어 피자 한 판을 시켰다.
“오늘 내가 쏜다! 마음껏 먹어!”


쭈뼛거리던 아이들은 어느새 한 조각, 두 조각 먹으며 깔깔 웃기 시작했다.
연애 이야기, 새로 나온 한국 드라마, K팝 이야기까지 멈출 줄 모르던 수다 속에서
누군가가 노트북을 내밀며 말했다.
“엄마, 이 과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캠퍼스에 있는 아줌마’가 아니라
정말로 ‘캠퍼스의 엄마’ 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내게 잠시 잊고 살았던 젊음의 온도를 돌려주었고,
나는 그들에게 따뜻한 밥과
“너 괜찮아. 잘하고 있어.”
라는 말을 건넸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왔고, 나이는 30년 차이가 났지만
교실 안에서는 우리는 그냥 ‘친구’였다.


전시회를 함께 다녔고, 눈 내리던 날엔 캠퍼스를 천천히 걸었다.
할로윈 파티장에 끌려간 날,
“엄마, 우리 셀카 찍어요!”
라는 말에 웃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그날 찍은 사진들은 지금도 내 앨범 첫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어느 날은 지친 내 책상 위에 작은 초콜릿이 놓여 있었고,
발음이 꼬인 발표 날엔
“엄마, 완전 잘했어요!”
라며 아이들이 나를 꼭 안아주었다.
세대는 달라도 마음이 뛰는 속도는 같았다.


그중에서도 잊히지 않는 아이가 있다.
한국 유학생, 지은.


시민권자의 세 배에 달하는 등록금.
새벽엔 식당, 저녁엔 배달 일을 하며 하루를 버티던 아이.
도서관에서 마주칠 때면 늘 눈 밑이 푸르렀지만
웃으면 반달이 되던 예쁜 눈을 가진 아이였다.


어느 늦은 밤, 도서관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지은에게
따뜻한 라떼 한 잔을 살며 조용히 말했다.
“지금은 힘들어도, 이 시간이 너를 빛나게 해. 내가 해봐서 알아.”


그날 이후 지은은 진짜 내 딸처럼 굴었다.
과제 초안을 보내 피드백을 받고,
힘든 날엔 속마음을 털어놓고,
가끔은 “엄마, 집 생각나요…” 하고 울기도 했다.


그럴 땐 지은을 집으로 데려와 한국에서 언니들이 보내준 반찬으로 저녁을 차려주었다.
김치찌개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영화를 틀어놓은 채 서로의 하루를 달래던 밤들.
그 시간들은 내게도 오래도록 따뜻한 흔적을 남겼다.


지금은 연락이 뜸해졌지만
가끔 SNS에서 지은의 근황을 보면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더 단단해지고, 더 자신을 사랑하는 얼굴.
‘그때 흘려보낸 작은 씨앗이, 어딘가에서 계속 자라고 있구나.’


‘캠퍼스의 엄마’라는 별명—
처음엔 조금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내가 가장 아끼는 호칭이다.


졸업식 날, 나와 나이 차이 30년 나는 친구들이
나를 끌어안고 울던 그 순간 깨달았다.


마음을 열면, 세대는 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혈연이 아니어도, 누군가의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인생에서 누군가를
‘엄마’, 혹은 ‘딸’이라고
진심으로 불러본 적이 있나요?


나이와 국적을 넘어 마음이 닿는 그 순간,
우리는 조금 더 사람다워지고
조금 더 따뜻해지며
조금 더 서로를 닮아가게 됩니다.

저는 캠퍼스에서 그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께서도, 어쩌면 이미 알고 계실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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