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배움 서사> 시리즈 4 (6)
늦은 나이에 다시 건너 들어선 대학 캠퍼스에서, 나는 뜻밖의 선물을 만났다.
세대도, 국적도, 걸어온 속도도 달랐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먼저 닿았던 사람들.
도서관의 조용한 오후와 따뜻한 공기를 함께 나누며 우리는 서로의 일상을 조금씩 열어 보였다.
그 만남은 봄빛처럼 부드럽게 스며들어, 이민자의 공부길을 외롭지 않게 비춰주었다.
50대가 되어 다시 시작한 대학 생활.
새 교재의 잉크 냄새, 서툰 영어가 뒤섞인 복도, 강의실을 가득 채운 젊은 웃음소리—
모든 게 새롭고 반짝였지만 그 반짝임은 종종 두려움으로 변해 어깨 위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내 아이 또래의 학생들 사이에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일이 작은 모험 같았다.
젊은 에너지가 주는 설렘도 있었지만, 어떤 날은 그냥 조용히 사라지고 싶기도 했다.
그런 불안이 커질 즈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친구가 있었다.
대만에서 온, 조용하지만 따뜻한 눈빛을 가진 아이.
전공도 다르고 나이는 서른 살이나 어렸지만, 도서관에서 마주칠 때마다 활짝 웃으며 말했다.
“Hi Linda!”
그 짧은 인사가, 뜻밖의 응원이 되어 나를 다시 자리로 앉히곤 했다.
나는 디지털 세상 앞에서 늘 느렸다.
슬라이드를 한 장 만들어 넘기는 것조차 버거웠고, 영상 편집 과제라도 나오는 날이면 손끝이 얼음처럼 굳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Linda, let me help you.”
그녀는 내 옆에서 슬라이드 구조를 정리해주고, 영상을 자르는 방법등을 알려주고,
마감이 코앞인 날엔 내 과제를 자기 일처럼 챙겨주었다.
차가운 모니터 불빛 속에서
그녀는 내게 가장 따뜻한 봄볕 같은 존재였다.
우리는 매주 토요일 같은 자리에서 과제를 했다.
“오늘 커피는 내가 살게.”
“아냐, 지난번엔 네가 샀잖아.”
그런 소소한 대화와 웃음은
이민자의 공부길에 생긴 작은 숨구멍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내 영어 발음을 고쳐주었고
나는 그녀의 에세이 문장을 함께 다듬어 주었다.
세대도, 언어도, 국적도 달랐지만
우리가 서로에게 건넨 말은 늘 같았다.
“괜찮아. 너 정말 잘하고 있어.”
어느 마감 전날, 지친 얼굴을 책상에 묻고 있던 나에게
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
“Linda, you are stronger than you think.”
그 말은 깊은 곳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나를 천천히 깨웠다.
그날 이후 나는 ‘뒤처진 중년 학생’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졌다.
졸업 후 그녀는 직장과 결혼으로 멀리 떠났다.
바쁜 이민생활 속에서 우리는 일 년에 한두 번 연락하는 게 전부가 되었지만,
어느 날 내가 브런치스토리 작가가 되었다고 링크를 보내자
그녀는 번역기를 돌려가며 읽었다며 누구보다 먼저 축하해 주었다.
“Linda 엄마, 잘 지내요?”
하트 하나, 웃는 얼굴 하나.
그 작은 이모티콘이
캠퍼스의 오후를 다시 눈앞에 펼쳐 놓았다.
도서관 3층의 부드러운 햇살,
따뜻한 난로 옆 자리,
커피잔이 책상에 살짝 부딪히던 소리,
문장 하나에 매달려 늦게까지 남아 있던 밤들.
그 모든 순간이
아직도 한 장의 사진처럼 선명하다.
우리는 자주는 아니지만 지금도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세대를 넘어, 국적을 넘어
우리가 서로에게 건넸던 작은 온기는
봄꽃처럼 피어나 오래 머무는 우정이 되었다.
가끔 그녀 생각이 나면 나는 속으로 천천히 중얼거린다.
“고마워, 내 친구야.
네가 있어서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혹시 여러분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나요?
캠퍼스든, 직장이든, 인생의 어느 길목에서든
어느 날 불쑥 다가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
오늘 그 손을
한 번 더 꼭 잡아보세요.
그 손이…
여러분의 봄이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