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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지 위의 침묵

<이민자의 배움 서사> 시리즈 4 (7)

by 이민자의 부엌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던 나는, 어느 날 가장 무모한 선택을 했다.
바로 생물학(Biology) 수업을 듣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한 번쯤 과학도 배워보고 싶다.”
그 가벼운 호기심은 첫 주가 지나자 깊은 후회로 변했다.


영어로 설명되는 세포 분열, 미토콘드리아, 염색체, 광합성…
교수님의 말은 총알처럼 지나갔고,
내 노트에는 알파벳과 낙서가 뒤엉킨 흔적만 남았다.
집에 돌아와 책을 펼치면 머리는 새하얘지고,
심장은 괜히 쿵쿵거리기만 했다.


치의학과 다니는 아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 그냥 드랍하세요. 치의학과 학생들도 힘들어 하는 공부이고, 너무 힘들어 보여요.”


그 말이 이상하게도 가슴 깊이 꽂혔다.
포기하면 편하다. 그 말이 맞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서 ‘지금 포기하면 평생 후회할 거야’
그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내 안에서 더 크게 울렸다.


그래서 나는 끝까지 가 보기로 했다.
성적이 어떻든, 새로운 세계의 문을 두드려본 것만으로도
내 삶에는 분명 의미가 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그날부터 내 새벽은 생물학과의 싸움이었다.
낯선 단어를 50번 이상 따라 쓰고,
녹음한 강의를 0.75배속으로 돌려 듣고,
한국어 해설 영상을 찾아가며
한 문장, 한 개념씩 천천히 부딪혔다.
가끔은 너무 어려워 울면서 외웠지만,
수업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찾아온 미드텀 시험 날.


시험지를 받아든 순간,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첫 페이지 문제들은 모두 낯설었고,
그 낯섦은 공포가 되어 목을 조였다.
‘내가 이걸 어떻게 풀지?’
숨이 멎을 듯했고, 귀에는 자신의 심장 소리만 크게 울렸다.


그때 문득 떠올랐다.
새벽마다 책상 앞에 앉아 50대의 내가 무언가를 붙잡으려 애쓰던 모습.
그 시간을 떠올리자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한 힘이 생겼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한 문제씩 다시 읽기 시작했다.
모르는 것은 잠시 넘기고, 아는 것은 쥐어짜듯 적었다.


교실은 고요했지만,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한 학기 수강한 결과는 C-.
한국에서의 대학 생활까지 포함해 평생 받은 성적 중 가장 낮은 점수였다.


채점된 시험지를 돌려받는 순간,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웃픈 감정이었지만, 바닥에 닿아본 사람만 아는 묘한 해방감도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 이미 이긴 것이라고.


그 수업에서 만난 캐네디언 노교수님은 지금도 내 인생의 스승이다.
90분 수업 동안 한 번도 앉지 않고 열정적으로 강의하시던 모습,
학생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시던 따뜻한 목소리,
그리고 마지막에 건네주신 말.


“You don’t have to be perfect, just keep going.”


완벽할 필요 없다고, 계속 가기만 하면 된다는 말.
그 말은 생물학보다 더 큰 배움이 되어
내 마음에 깊이 박혔다.


생물학 수업은 나를 거의 주저앉힐 뻔했지만,
결국 나를 더 단단하게 세워준 경험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안다.
시험지 위의 그 깊은 침묵은 사실
나를 향한 가장 큰 응원이었음을.


여러분은 인생에서 어떤 **‘C-’**를 받아본 적이 있나요?
성적표에 찍힌 낮은 점수가 아니라,
삶이 건네는 쓰라린 실패 말입니다.


그 아래에 숨어 있는
끝까지 버틴 ‘나’ 를
조용히, 천천히 껴안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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