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국경은 멈추지만, 마음은 계속 건넌다

<이민자의 시선, 세계의 흐름> 시리즈 5(3)

by 이민자의 부엌
Copilot_20251120_060310.png


우리는 더 이상 국경만으로 세상을 설명할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기후 위기부터 반도체 공급망, 팬데믹, 그리고 인공지능까지—
어느 하나도 한 나라의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문제는 국경을 넘어 존재하고, 해법 역시 그 바깥에서 찾아야 한다.
결국 우리는 같은 배에 탄 존재들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만은 여전히 국경 앞에서 멈춰 선다.


얼마 전 조지아주의 배터리 공장에서 벌어진 사건은 이 현실을 정확히 보여준다.
10조 원이 넘는 자본은 순식간에 국경을 넘어 이동했고,
설계도와 기술은 공장의 벽을 자유롭게 오갔다.
자재와 장비, 시스템 역시 아무런 제약 없이 이동했지만,
정작 그 모든 것을 움직일 사람의 손끝은 비자라는 벽 앞에서 멈췄다.
결국 일부 근로자는 체포되기까지 했다.


기업은 협력을 원했고, 현장은 사람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그러나 제도는 여전히 “안 된다” 며 문을 걸어 잠근다.
자본과 기술은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데,
사람과 제도는 아직도 19세기의 걸음으로 머물러 있다.


이 딜레마는 내 가족의 일상을 통해 더 선명해진다.
캐나다에 이민 온 지 어느덧 20년째, 남편은 여전히
한국식 책임감과 캐나다식 워라밸 사이에서 매일 줄다리기를 한다.


프로젝트가 몰릴 때면 케네디언 동료들은 가족 시간을 우선시하며
연장 근무를 최대한 피하려 한다.
하지만 남편은 누군가 부탁을 하면
결국 “네, 알겠습니다” 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겉으론 담담해 보이지만, 그 뒤엔
업무와 약속, 가족과 일상을 모두 챙겨야 한다는
복잡한 감정이 조용히 따라온다.


국경은 지도 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제도와 관습, 그리고 우리의 머릿속에도 뚜렷하게 그어져 있다.
어떤 날은 그 선이 너무 두껍고 무겁게 느껴진다.
말 한마디, 결정 하나가
내 가족과 일터, 그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 전체에
파문처럼 번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국가 간 협력보다 더 먼저 필요한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협력이라는 사실을
살면서 여러 번 확인했기 때문이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먼저 안부를 묻는 일,
메시지 끝에 짧은 따뜻한 문장을 덧붙이는 일,
멀리 떨어져 있어도 화면 너머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오늘도 괜찮아?”라고 묻는 일—
이 작은 손길들이 쌓이면
언젠가 눈에 보이지 않는 다리가 우리를 이어준다.


국경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마음이 닿는 순간, 그 선은 힘을 잃는다.


조지아에서 끌려간 300명의 손끝은
결국 미국의 전기차를 움직일 것이고,
그 전기차는 캐나다의 도로를 달릴 것이다.
그리고 그 안의 배터리에는 한국의 기술이 담겨 있다.
우리는 이미 서로 없이는 돌아갈 수 없는
단단한 연결망 속에서 살고 있다.


이제 남은 일은 단순하다.
그 복잡한 현실을 제도가 뒤따라오도록 만드는 것,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먼저 작은 벽 하나라도 허물어 보는 용기를 내는 것이다.


국경 없는 협력은 먼 미래의 이상이 아니다.
바로 오늘, 내가 먼저 건네는 작은 손길에서 시작되는 현실이다.

keyword
이전 02화불안한 국경 너머, 내가 선택한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