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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 이민자의 조용한 생존법

<이민자의 시선, 세계의 흐름> 시리즈 5(6)

by 이민자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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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새로운 땅에서 시작된 하루


20년 전, 캐나다에 처음 도착했던 날을 나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낯선 공기의 냄새, 공항 로비의 차가운 바람,
어색한 언어 사이에서 흔들리던 마흔 살의 ‘나’.


그 첫날 밤, 나는 편의점에서 국제전화카드를 샀다.
엄마와 언니들, 친구들에게
무사히 도착했다고 전하고 싶어서였다.


그 시절 국제전화는 요금이 금방 치솟았기에
우리는 정말 필요한 말만 빠르게 주고받았다.
“잘 도착했어.”
“그래, 몸조심하고…”
그리고 늘 마지막에 남던 말.
“다음에 또 전화할게.”


그 몇 초의 목소리가
지금 영상통화 열 번보다 더 따뜻하고 더 귀했다.
엄마의 숨소리만 들어도
나는 낯선 땅에서 하루를 버틸 힘이 생겼다.
그때의 나는
그 작은 떨림 하나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었다.



디지털 기술이 만든 새로운 연결


지금은 와이파이만 있으면
한국에 있는 언니들 얼굴이
거실 벽처럼 환하게 나타난다.


엄마가 떠나신 뒤에도
새벽에 언니가 “I feel sick…” 하고 메시지를 보내면
우리는 서로 다른 대륙에서
같은 근심을 품고 화면 앞에 모인다.


생일이면 시차가 엉킨 시간 속에서도
함께 촛불을 켜고
“Blow it out!” 하며 웃는다.


기술은 기적이다.
이 화면이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더 오래, 더 깊은 외로움 속을 지나왔을까.
이 작은 연결은
팬데믹과 이동 제한이라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멀리 있어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이민자에게 건넸다.



브런치와 나, 디지털 시대의 외로움


브런치를 시작한 지 한 달 보름.
짧은 시간이지만
내 하루의 리듬은 분명히 달라졌다.


이민 20년 동안 틈틈이 적어둔 문장들을 꺼내 읽고,
눅눅해진 감정들을 한 줄씩 정리해 올리는 시간은
요즘의 나에게 가장 소중한 순간이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오랫동안 마음 깊이 접어두었던 ‘나’를 다시 펼쳐보는 일.
그 과정이 내 일상을
부드럽고 조용하게 흔들어 놓았다.



두 세계 사이에서 느끼는 거리감


나는 매일 두 개의 시계 사이에서 산다.
캐나다의 아침 8시,
한국의 밤 10시.


언니들이 “Good night” 하고 잠들 때
나는 막 하루를 시작한다.
그 13시간의 간극은
단순한 시차가 아니라
이민자에게 평생 따라붙는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다.


캐나다 거리를 걷고 있어도
머릿속은 한국 골목길을 걷고 있고,
버스 안에서 한국어 알림이 울리면
괜히 주위를 둘러본 뒤 답장을 쓴다.


여기 있어도 완전히 여기 있지 않고,
거기 있어도 완전히 거기 있지 않은 자리.
두 세계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 감정이
디지털 시대 이민자가 품는
고요하고도 묘한 외로움이다.



작은 반응이 주는 위로


그럼에도 나는 이 화면을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어떤 작가님은 조심스럽게 댓글을 남긴다.


“오늘도 작가님의 글을 읽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 한 줄이
차가운 화면을 건너
내 마음으로 천천히 스며든다.
모니터에는 온기가 없지만,
위로는 깊게 남는다.


연결된 세상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사람이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속하지 못하는 감정이
조용히 마음의 틈을 넓혀갈 때 찾아온다.


그 틈은 누구도 대신 채워줄 수 없다.
언니도, 친구도,
이 글을 읽는 작가님들도.
우리는 각자 다른 리듬의 하루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세계적 흐름 속 나의 자리


하지만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그 외로움은
내가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라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노트북을 연다.
조금씩 늘어나는 하트들,
조심스럽게 남겨지는 댓글들.


그 작은 반응들 하나하나가
공항에서 떨리는 숨을 삼키던
20년 전의 나에게
아주 조용히 말을 건넨다.


“괜찮아. 너는 혼자가 아니야.”


이 작은 연결과 디지털 공간의 반응들은
팬데믹, 이동성 제한, 국경의 변화라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힘을 다시 확인하게 해준다.


이민자의 하루,
두 세계 사이의 삶,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연결 방식.
그 모든 것이
오늘의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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