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의 시선, 세계의 흐름> 시리즈 5(8)
여름이면 온타리오의 하늘은 이상한 색으로 흐려진다.
창문을 조금만 열어도 바람 대신 달궈진 재 냄새가 밀려오고,
붉게 일그러진 해는 마치 먼 나라의 풍경처럼 낯설다.
캐나다에 온 지 스무 해가 넘었지만, 이런 공기는 처음이었다.
그 뜨거운 냄새 속에서 나는 불안의 실체를 마주한다.
지구가 더 이상 멀리서 신호를 보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국 우리 삶의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인정하게 된다.
겨울 역시 달라졌다.
작년엔 유난히 매서웠고, 눈은 12월 초부터 쉼 없이 쏟아졌다.
올해는 11월부터 이미 세상을 하얗게 덮기 시작했다.
변덕스럽게 앞당겨지는 계절은 마음 한쪽을 움츠러들게 하고,
차갑고 흐린 하늘은 겨울 자체가 낯설어진 시대를 말해준다.
지구가 보내는 경고,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기후 위기는 이제 다큐멘터리 속 장면이 아니다.
우리 집 뒤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마트에서 장을 보던 날 울리던 갑작스러운 산불 경보음.
타오르는 불길은 누군가의 집을 잿더미로 만들고,
갈라진 논밭은 생계를 삼켜버린다.
그리고 어떤 이는 하루아침에 고향 섬을 잃는다.
그들은 배를 타고, 트럭을 타고,
때로는 단 하나의 가방만 들고 새로운 땅을 향해 움직인다.
경제적 기회를 찾아 이곳에 온 나와는 출발점이 다르지만,
더 나은 삶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을 우리는 ‘기후난민’ 이라 부른다.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마치 북극의 얼음이 아니라 내 마음 속 무엇이 먼저 녹아내리는 듯한
묘한 죄책감이 따라온다.
화면 속 눈빛, 마음 속 울림
며칠 전 뉴스에서 본 장면이 오래 머물렀다.
바닷물이 집 앞까지 차오른 어느 섬나라 주민이
고무보트에 가재도구를 차곡차곡 싣고 있었다.
손은 익숙했지만,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그 물음이 화면 밖으로 번져와
나는 한참이나 리모컨을 내려놓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프리카의 가뭄, 방글라데시의 홍수, 태평양 섬의 침몰.
지도 위에서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갖고 있지만,
내 마음에 닿는 울림은 모두 같은 비명이었다.
각기 다른 방에서 무너진 문은 결국
우리 모두가 이어진 하나의 복도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 문득 이민자로서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앞으로 우리는 어디로 가게 될까?”
더 안전한 대륙?
더 시원한 나라?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옮겨가는 것 자체가 답이 아니라는 것을.
지구를 지키기 위한 마음의 이동이 먼저라는 것을.
작은 이동, 새로운 의미의 ‘이민’
지금 내게 ‘이민’은 국경을 넘는 일만을 뜻하지 않는다.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것,
장바구니에서 비닐을 하나 덜어내는 것,
집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는 것.
이 모든 것이 조용한 방식의 이주다.
멀리 떠나지 않더라도,
내가 머무는 자리에서 방향을 조금 틀어보는 일.
삶의 태도가 옮겨갈 때
지구도 조금은 숨을 고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이 작은 실천을 이어가게 한다.
부엌에서 시작하는 변화
거대한 변화는 멀리서 오지 않는다.
나는 내 부엌에서, 장바구니 안에서,
일상의 아주 작은 동선에서 나만의 이주를 시작한다.
재활용을 조금 더 꼼꼼히 하고,
여름엔 에어컨 한 시간을 덜 틀고,
정원의 한 구석에 나무 한 그루를 심는 일.
이 모든 행동이 거창하지 않다는 걸 알지만,
누군가의 삶을 무너뜨릴 위험을
단 하루라도 늦출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깨닫는다.
기후 위기 시대, 우리는 모두 이주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떤 이는 배를 타고,
어떤 이는 국경을 향해 걷고,
또 다른 이는 마음을 바꾸는 것으로 이주를 시작한다.
일회용 컵을 내려놓는 바로 그 순간에도,
우리는 이미 다른 방향을 향해 조용히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은 다짐, 큰 흐름으로
요즘 나는 하늘을 자주 올려다본다.
연기로 흐려진 날이면 마음이 무겁고,
맑은 날이면 그저 안도하게 된다.
그리고 조용히 다짐한다.
“내가 사는 이곳에서 하루라도 덜 해롭게 살자.”
그게 내가 기후난민이 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소박한 약속이다.
작은 이주가 쌓이면 어느 순간 큰 흐름이 된다.
오늘 고른 채소 한 끼, 꺼둔 전등 한 시간,
심은 나무 한 그루가
언젠가 누군가의 삶을 지켜줄지 모른다.
이 시대의 이주는,
발걸음보다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사람들의 기록이 아닐까.
흔들리는 지구와 우리를 잇는
가장 단단한 다리 역시 그 마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