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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가다

<이민자의 시선, 세계의 흐름> 시리즈 5(10)

by 이민자의 부엌
ChatGPT Image 2025년 11월 20일 오후 01_07_18.png


가끔 혼자 앉아 있으면, 오래전 한국 골목길에서 엄마를 부르던 스무 살의 내 목소리가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캐나다 호숫가에서 바람을 들으며 멀리 영국에 있는 손주의 이름을 불렀던 나의 목소리가 조용히 겹쳐 올라온다.
두 목소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서로를 부를 때면, 마치 서로 다른 시간과 서로 다른 내가 한 자리에 포개져 앉는 듯한 묘한 울림이 찾아온다.


한국에서 인생의 절반을 살아왔다.
그 시절의 내 삶은 단단한 뿌리였고, 세상을 바라보는 첫 언어였다.
된장이 익어가던 부엌 냄새, 여름밤 골목을 가득 채우던 매미 소리, 동네 어른들의 다정한 “밥 먹었니?”
그 모든 것이 지금도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선명한 첫 고향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어느새, 캐나다에서 살아온 시간도 20년 가까이 흘렀다.
눈이 내릴 때의 고요한 공기, 붉게 타오르는 단풍의 향기, 가볍게 건네는 “Have a good day!”
낯설기만 했던 풍경들은 어느새 일상의 결로 스며들었고, 나는 이곳의 언어와 시간 속에서 또 다른 나를 천천히 빚어왔다.


그러나 그 과정이 언제나 평온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에 가면 캐나다 사람이 된 것 같고, 캐나다에 오면 한국 사람이 된 듯한 이 이상한 경계감.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고, 어느 자리에 앉아도 살짝 떠 있는 듯한 느낌.
마치 주변은 모두 흐르는데 나만 흑백으로 잠시 멈춘 듯한 감정이 오래도록 나를 눌렀다.


딸아이가 영국으로 이주한 뒤로는 마음의 결도 한 겹 더 깊어졌다.
화면 너머로 들려오는 손주의 천사 같은 웃음소리는 국경을 가볍게 넘어오지만, 영상통화를 끊고 난 뒤의 고요는 현실의 거리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세 나라를 품고 산다는 것은, 기쁨과 외로움이 한 장의 얇은 종이처럼 맞닿아 있는 삶이다.
보고 싶을 때 바로 달려갈 수 없다는 사실은, 작지만 깊은 아픔으로 남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평범한 순간에 작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호숫가 벤치에 앉아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문득 한국의 바람, 캐나다의 바람, 그리고 영국에서 손주와 산책하던 길에 스치던 바람까지—
그 모든 바람이 한 줄로 이어져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내 자리는 국가가 아니라, 내 마음이 머무는 곳에 있구나.”


나는 한국인이면서 캐나다인이며, 동시에 영국에 마음을 걸어둔 사람이다.
예전에는 이 경계가 나를 불편하게 했지만, 이제는 그 경계 위에서 비로소 ‘나다운 나’ 를 발견하게 된다.
어느 한 곳에만 속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넓은 세계에 속하게 된 사람.
그것이 지금의 나다.


한국은 여전히 내 기억의 고향이다.
된장 냄새만으로도 어린 날의 내가 불쑥 나타나고,
장마철이면 젖은 흙냄새와 함께 엄마가 전을 부치던 부엌의 온기가 떠오른다.


캐나다는 내가 살아가는 고향이다.
일하고 숨 쉬며 하루를 채워가는 현재의 결이 이곳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영국은 내 사랑이 향하는 고향이다.
손주의 작은 발소리, 영상 속 뛰어다니는 모습, 잠들기 전 불러주던 작고 단단한 목소리.
그 모든 소리가 나를 또 다른 시간으로 데려간다.


그래서 나는 매일 한국과 캐나다, 그리고 영국 사이를 오간다.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세 나라의 길을 따라 천천히 흐른다.
이 길은 때로 외롭지만, 그만큼 내 세상을 세 배로 넓혀주었다.


이민자의 삶은 결국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 를 묻는 여정이다.
그 질문은 때로 무겁지만, 그 무게 덕분에 나는 더 깊어지고, 더 부드러워지고, 더 단단해졌다.
경계에서 흔들리던 시절은 지나고, 이제 그 경계는 나를 확장하는 자리로 변해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안다.
내 자리는 어느 한 나라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고 기억하고 살아온 모든 자리 위에 있다는 것.
그 모든 자리가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


언젠가 이 모든 날들을 돌아보는 순간이 오면,
나는 조용히 웃으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나는 결국 내게로 돌아왔구나.”


열 편의 기록은 단순히 적어 내려간 글이 아니라,
나를 지금 이 자리까지 데려온 하나의 여정이었다.
이민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계의 흐름 속에서 나는 변화와 불안, 그리고 희망의 얼굴을 모두 만났다.
겹겹이 쌓인 시간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천천히 잇고 있었고,
그 길 위에서 만난 풍경과 사람들, 그 모든 순간이 결국 ‘나’라는 이야기를 완성해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다.
또 다른 장이 이미 조용히 펼쳐지고 있다.


다음 시리즈에서는
<이민자의 마음으로 봉사하다: 작은 손길, 큰 울림>
이라는 이름으로,
캐나다에서 경험한 봉사,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
움직였던 마음의 결,
그리고 늦깎이 학생으로서 다시 배운 공동체의 의미를 나누려 한다.


이민자의 삶이 내게 가르쳐준 또 하나의 진실.
“돕는다는 것은 결국 나를 확장해 가는 일.”
그 문장을, 다음 여정의 첫 페이지에 조용히 올려놓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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