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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의 길 초입에서 만난 사람들

<이민자의 마음으로 봉사하다:작은 손길, 큰 울림> 시리즈 6 (1)

by 이민자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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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제작 도움 : ChatGPT (AI 이미지 생성)



낯선 아침, 조용히 열린 문


캐나다에 온 지 몇 달 되지 않았던 어느 주일 아침.
이민자로서 매일 낯선 얼굴과 언어 속에서 길을 찾아가던 시기였다.
나는 한인교회 새가족부에서 예배 안내를 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때, 문이 아주 천천히 열리며 한 여성분이 들어오셨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 순간 시선이 자연스레 오래 머물렀다.
예배가 시작될 무렵, 혼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조심스레 옆으로 걸어가 앉았다. 찬양이 흐르는 사이, 그녀의 눈가에서 작은 눈물이 천천히 흘렀다.
묻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이민자의 외로움이 스며 있는 눈물이었다.


예배가 끝난 뒤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오늘 시간 되시면 저랑 차 한 잔 하실 수 있을까요?”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 속, 조용히 풀려나온 삶


점심을 마치고 카페에 앉자, 그녀는 오래 품어온 이야기를 꺼내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암이 여섯 곳으로 전이된 말기 환자였다.
의사가 말한 6개월 시한부 중 절반이 이미 지나 있었다.
모자를 벗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삼킬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한국에 두 자녀가 있었지만 연락은 오래전에 끊겼고,
재혼 후 캐나다에 온 지 1년도 되지 않아 갑작스러운 진단 앞에서 삶은 무너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제가 기대고 싶은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그 말은, 이민자라면 누구나 아는 고독의 무게였다.


그래서였을까. 그녀가 조심스레,


“죽기 전에… 마지막 친구가 되어줄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때,


나는 오히려 마음이 단단해졌다.


“왜 죽는다는 생각부터 하세요.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 있을지도 몰라요. 제가… 함께해볼게요.”


그렇게 교회에서 처음 본 그녀와의 1년 2개월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함께 걸어간 사계절


몸이 괜찮은 날엔 공원을 천천히 걸었고,
힘든 날엔 병원에 동행하거나 집에서 그녀 곁을 지켰다.
가벼운 음식을 나누고, 드라이브를 하고, 교회 예배에도 함께했다.


가을날, 낙엽이 바스락거리던 공원에서
“이 소리가 좋아요.”
라며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그 작은 문장은, 그녀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화창한 여름날, 산책길에서 우연히 만난 블루베리 나무 아래에서
익은 열매를 따 먹으며 함께 웃던 장면도 떠오른다.
햇빛에 반짝이던 작은 열매처럼, 그날의 그녀도 참 생생했다.


특히 잊지 못할 날이 있다.
그녀가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온 뒤 가끔 아이들과 함께 찾아갔던 어느 날.


중학생이던 아이들은 그녀의 팔과 다리를 조심스레 주물러주며 말했다.
“Auntie, 괜찮아요?”


그녀는 아픈 와중에도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고맙다” 고 말했다.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은 고통을 잠시 잊은 듯 따뜻하게 빛났다.


아마도 우리 아이들의 손길을 받으며
멀리 있는 자신의 아이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더 아려왔다.


그 장면은 지금도 내 마음 한편에서 조용히 반짝인다.
그리고 그 경험은 아이들의 마음에도 깊은 울림으로 남았다.


함께했던 두 아이 중 막내는 훗날 토론토대학교 치의학과를 졸업해
지금은 뉴욕에서 환자를 돌보는 사람이 되었다.
입시 면접에서 “왜 의사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함께 걸어간 시간을 전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날, 나는 한참을 울었다.
한 사람의 선함이 세대를 건너 또 다른 선함으로 이어지는 기적.
그녀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돌봄의 세계를 배우다


그녀를 돌보는 동안 나는 캐나다의 복지 서비스와 돌봄 체계를 하나하나 배워갔다.
홈케어, 산소호흡기 지원, 방문 간호, 특수 침대 대여, 생활·청소 지원까지.


처음에는 그녀를 돕기 위해 배우기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나는 ‘돌봄의 세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필요한 지원을 찾아 신청해 실제로 혜택을 받기까지의 과정은
내게 분명한 깨달음을 남겼다.


“복지는, 닿기만 한다면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는 커다란 힘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 ‘닿는 법’을 몰라
지원이 있어도 포기해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녀가 견뎌낸 날들 — 그리고 내가 배운 용기


키모를 받는 날이면 나는 늘 함께 병원에 있었다.
돌아오는 길, 그녀는 구토와 어지럼증에 시달려 나는 잠시도 곁을 떠날 수 없었다.


어떤 날은 체중이 너무 빠져 치료 기준에 미달해
치료를 받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그녀는 그날 유난히 작고 약해 보였다.


그럼에도 나를 바라보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다음에 받으면 돼요.”


그 미소 하나가 얼마나 큰 용기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긁어 모아,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그녀의 마지막 순간


말을 전혀 할 수 없게 된 무렵부터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녀를 떠나보낼 준비를 했다.


그리고 어느 조용한 날,
그녀는 아주 잔잔한 미소를 띠고 내 품에서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나는 두려움에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했지만
그녀 앞에서는 단 한순간도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평안했고… 아름다웠다.




한 사람의 삶이 내 삶의 방향을 바꾸다


그녀와의 시간은 내 삶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제도가 있어도, 그 제도에 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이민자들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음에도
방법을 몰라 포기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그녀의 삶이 남긴 울림은 내 안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이민자의 마음으로, 소외된 사람들 곁에 서는 사람.
그 길을 걸어가겠다고.


그것이 내가 캐나다에서 중년의 나이에
사회복지를 전공하게 된 이유다.
그리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다.


Sometimes, one person changes the entire direction of your life.
그녀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언젠가, 그녀와 함께 걸어간 시간을 천천히 한 권의 책으로 쓰고 싶다.
그녀가 남긴 변화와 배움, 흔들림과 단단함, 그리고 선함의 작은 흔적들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건네고 싶다.


그녀의 조용한 삶이 남긴 울림은
지금도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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