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을 알려준 사람, 생일을 만든 사람
엄마는 항상 동생의 생일을 기억했다. 동생 생일날이면 냄비 가득 끓는 미역국에서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집안 가득 퍼졌다. 생각해 보면 내 생일은 생일인지도 모른 채 지나간 날이 더 많았다.
1학년 때의 생일파티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친구들을 불러 축하받고 싶다며 엄마의 옷자락을 붙잡고 졸라댔던 날. 화장실도 없는 방 하나와 다락방 하나뿐인 작은 집에 아이들을 초대한다는 게 엄마에게는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하지만 여덟 살의 나는 그런 걸 알지 못했다. 그저 한 번쯤은, 나도 생일다운 생일을 갖고 싶었다.
하얀 생크림 케이크에 촛불을 여덟 개 꽂고, 친구들도, 엄마도 생일 노래를 불러줬다.
“사랑하는 00 이의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가 끝나는 순간, 펑! 하고 폭죽이 터졌다. 종이테이프들이 실타래처럼 엉키며 내 얼굴을 스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깔깔거리던 파티는 순식간에 울음으로 뒤덮였다.
친구가 쏜 폭죽이 내 얼굴을 맞힌 것이다. 놀람과 아픔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나도 울었고, 친구들도 미안함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 생일파티는 내 기억 속에서 가장 선명한 한 장면이다. 이후의 생일들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그 이후의 생일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부모님이 먹고살기 바빠 매번 우리 생일을 챙길 여유가 없었던 탓일 것이다. 일하고 돌아온 부모님의 지친 얼굴을 보면서 ‘오늘 생일이니까 파티하자’는 말을 하기는커녕, 생일을 챙겨달라고 말하는 것조차 죄송했다. 생일을 챙기는 일도 부모님께는 또 하나의 부담처럼 느껴졌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나조차 생일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매년 반복되는 날 중 하나라고 여겼고, 내가 기억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혼한 뒤, 생일 당일에 시어머니께서 축하 전화를 주고 용돈까지 보내주셨다. 여덟 살 이후로 아무도 특별하게 챙기지 않던 나의 생일을 유일하게 기억해 준 사람이었다.
“생일 축하한다.”
그 한마디가 가슴속 깊은 곳에 오래 묵혀 있던 무언가를 건드렸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오래 안고 있고 싶은 인형처럼 마음을 감싸는 말이었다. 그 순간, 나는 생각보다 오래 생일 축하를 기다려왔다는 걸 깨달았다. 전화를 끊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오늘 생일이야. 어머님이 전화도 해주시고… 용돈도 주셨어.”
엄마는 멋쩍게 웃으며 시어머니께 감사하다고 했다. 그리고 생일인지 몰라 미안하다고도 했다. 엄마의 말속에는 챙기지 못한 미안함과 딸이 남의 집에서 축하받는 것에 대한 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담담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마음 깊은 곳을 살짝 건드렸다.
돌이켜보면, 내 생일은 애초에 엄마 없이는 시작될 수 없는 날이었다.
39년 전, 어린 엄마는 열 달 동안 나를 품고 아픈 몸을 이끌어 나를 세상에 내놓았다.
내 생일은, 한 여자의 삶이 ‘엄마’라는 이름을 얻게 된 날이기도 했다.
그제야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왜 엄마는 동생 생일만큼은 잊지 않았는지.
아마 생일 하루쯤 못 챙겨도 괜찮을 거라 생각한 딸이 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시집간 딸이 남에게 축하받는 걸 들었을 때 문득 밀려오는 미안함.
그래서 동생 생일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했던 건 아닐까.
당연하게 여겼던 내 생일에, 나는 과연 엄마를 몇 번이나 떠올렸을까.
생각해 보면 그날의 의미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엄마에게도 중요한 날이었다.
그날의 축하와 모든 의미는 나보다 엄마에게 더 큰 것이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