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식된 황금의 땅 (6)

차별 속 우정

by 이샤라

"시스테나 전선에서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최소한 놈들이 전선을 버리고 남쪽으로 향하게 만든 것은 의미가 있었다. 그 덕분에 파도의 악마들이 결국 카노르 평원의 남쪽을 뚫고 엘라리모스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지."


말가드는 손가락을 탁탁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기대하지. 그대라면 방법을 찾아낼 거라 믿는다, 샤비트."


샤비트는 말가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강렬한 눈동자가 마주쳤고, 순간 회담장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맡겨만 주신다면,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차분하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그러나 회담장 한편에 자리한 사도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세르비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수긍했으나 나우레스는 여전히 턱을 괴고 의심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의자의 팔걸이를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자네라면 방법을 찾아낼 거라고? 듣기에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이미 한 번 계획이 틀어진 전례가 있지 않나?"


샤비트는 순간적으로 눈썹 위가 꿈틀거렸지만 즉각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차분하게 나우레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틀어진 것이 아니라, 예상보다 변수가 많았던 것뿐입니다."


"호오... 그렇게 말하면 다 해결되는 거군. 그럼 이번에는 또 어떤 변수를 대비해야 하는지 말해보지 않겠나?"


나우레스의 조롱 어린 말에도 샤비트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답했다.


"변수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계획에서는 놓치는 부분이 없도록 사전에 보완을 하는 것이 핵심 아니겠습니까."


대화를 듣던 세르비안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나우레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만하지, 나우레스."


그의 목소리는 회담장의 공기를 단번에 가라앉힐 만큼 날카로웠다.


"이미 샤비트에게 맡긴 일이네. 더 이상 이 문제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소만."


"아, 그래. 그렇긴 하지."


나우레스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가라앉은 눈빛에는 여전히 비아냥 섞인 기색이 남아 있었고, 세르비안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에 걸린다면... 그대가 직접 하는 것이 어떤가? 아니면... 그래. 정 심심하다면 움브라 신전에 나타났다던 침입자를 잡아보는 건 어떻겠나? 주교님의 서고를 뒤집어놨다고 들었는데 말이지."


그 말에 회담장 한편에서 낮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몇몇 사도들이 흥미롭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았고, 나우레스는 피식 웃으며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허, 그렇게까지 말하니 내가 무슨 심술이나 부리는 것처럼 들리는군. 노파심에서 한 말일뿐인데 말이야. 맡겨진 일이니 더 이상 참견하지 않도록 하지."


샤비트는 가만히 나우레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는 여전히 비웃듯이 한쪽으로 올라가 있었지만, 굳이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신경전이 끝나자, 말가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회담장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어둡게 내려앉은 황갈색 눈동자가 하나하나 사도들을 훑고 지나갔다.


"더 논의할 것이 없다면... 여기서 마무리 짓도록 하지."


정돈된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우자, 사도들은 각자 침묵을 지키며 말가드의 말을 기다렸다. 말가드는 두 손을 가지런히 허리춤에 모으며 말을 이었다.


"샤비트, 그대에게 주어진 역할은 분명하다. 고원의 불길을 제어할 방법을 찾아 필요한 조치를 취하라.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그리 오래 지속되진 않을 테니 말이지."


"명심하겠습니다."


말가드는 더 이상 덧붙이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사도들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디며 목소리를 낮췄다.


"각자 맡은 역할을 수행하도록. 이제 방황할 때가 아니다. 머지않아, 고원의 불길이 불의 도시마저 불태울 것이니 말이다."


말가드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사도들의 목소리가 회담장에 울려 퍼졌다.


"모든 것은 그분의 뜻대로."




차가운 지하의 공기와 어두운 암반이 끝을 맺는 순간, 자이론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축축한 땅굴의 습기를 벗어나자 낯선 향기가 폐부를 파고들었다. 비 내린 숲의 냄새, 나뭇잎과 흙이 뒤섞인 신선한 향. 오랫동안 부패한 대지에 익숙해져 있던 자들이라면 본능적으로 안도할 수밖에 없는 살아있는 땅의 향기였고, 뒤이어 따라 나온 검은 늑대들 또한 그 향을 음미하며 조용히 땅 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안도의 숨을 내쉬지 않았다. 긴장감이 온몸에 스며든 채, 그들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울창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고, 빛이 바람을 타고 일렁이며 가지 사이를 스쳐 지나갔으며, 곳곳에는 고목들이 뿌리를 깊게 박고 있었다. 부패한 대지의 악취도, 알루인 늪에서 맡았던 썩어가는 비린내도 없었으나 그 차이가 안도감을 주지는 않았다. 이곳이 어디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이론은 짧게 턱짓하며 검은 늑대들에게 지시했다.


"일단 안전을 확보한다. 주민들이 나오기 전까지 경계를 유지해라."


즉각적인 명령에 검은 늑대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몇몇은 소리 없이 숲 속으로 흩어져 정찰을 시작했고, 남은 이들은 땅굴 입구를 지키며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했다.


자이론은 고개를 돌려 어둠이 서린 땅굴 입구를 바라보았다. 저 안에 만 명이 넘는 주민들이 있다. 타리안에서 시작된 고된 이주는 어느새 100일을 훌쩍 넘어섰고, 기나긴 여정을 견뎌낸 이들이 이제 곧 하나둘 땅 위로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했다. 이곳이 정말 그들이 찾아온 안식처인지, 아니면 또 다른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검은 늑대들이 앞으로 나아가 경계를 서는 동안, 자이론은 코끝을 찡그리며 주변의 흔적을 살폈다. 낯선 냄새가 바람을 타고 퍼지고 있었다.


"둘은 나를 따라 움직인다."


자이론이 손짓하자, 망을 보던 검은 늑대 둘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숲에서 빠져나온 자이론과 두 명의 검은 늑대들은 이곳이 거대한 산이란 것을 깨달았다. 하늘은 맑고 공기는 깨끗했지만 북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평온함에 금이 갔다.


검은 장기(瘴氣)로 물든 하늘, 부패가 뒤덮은 황폐한 대지. 끝없는 어둠이 뻗어나가는 광경을 보며 자이론은 떠나온 고향 타리안을 떠올렸다. 한때는 전쟁의 여신 카야의 가호 아래, 수인들의 마지막 보루였던 성채.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남지 않은 텅 빈 보금자리일 뿐이었다. 과거는 과거일 뿐, 지금은 현실을 마주할 때였다.


"기척을 감추고 이동한다."


짧은 명령이 떨어지자, 검은 늑대들은 네발로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한순간, 날렵한 그림자들이 산등성이를 가로질렀다. 그들은 엄청난 속도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공기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발밑에서는 한 줌의 먼지만이 희미하게 흩어졌다. 점점 아래로 내려갈수록 낯선 연기의 냄새가 가까워지면서 얼마 안 가 연기의 근원인 작은 마을이 보였다.


자이론은 언덕 위에서 시선을 낮추며 마을을 관찰했다. 크진 않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음이 분명했다. 물레방아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고, 작은 밭이 가지런히 가꾸어져 있었다. 마을 외곽에는 감시탑 하나가 세워져 있었지만 아직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바람을 타고 거친 발소리가 들려오자, 자이론의 뾰족한 귀가 본능적으로 소리가 난 방향을 향했다.


마을의 순찰대.


그들과 검은 늑대들이 대면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누구냐!!"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병사들이 즉시 무기를 빼들었다. 검은 늑대들은 반사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하며 낮은 자세로 몸을 숙였고, 자이론도 눈을 가늘게 뜨고 병사들을 살폈다. 그들 또한 오래된 전장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병사들의 눈빛에는 피로보다 더 깊은 감정이 서려 있었다.


본능적인 경멸. 그중 선임자로 보이는 남자가 낮게 내뱉었다.


"...수인들이잖아."


그 말에 검은 늑대들의 귀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병사의 냉소와 경멸이 가득 담긴 말에 불구하고, 자이론은 굳이 말을 길게 늘이지 않았다.


"우리는 단지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던 것뿐이다. 불필요한 충돌을 만들 생각은 없어."


그러나 병사들은 쉽게 무기를 내리지 않았다.


"너희 같은 짐승들을 그냥 보낼 수 있겠나?


"수인들은 항상 어디에서든 문제를 일으키지."


"목적이 뭐냐! 당장 바른대로 말해!"


멸시의 시선에 검은 늑대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자이론에게는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수없이 마주했던 눈빛이었음에도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감각이었다. 검은 늑대들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빨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발톱이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어긋나면 피바람이 불어닥칠 상황.


그때, 소란을 들은 누군가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달려오며 소리쳤다.


"그만!"


순찰대 병사들이 움찔하며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이론 또한 그 냄새와 목소리를 확인한 순간 눈빛이 흔들렸다.


백발이 무성한 노인의 걸음걸이는 노쇠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여전히 강렬했다. 세월이 그의 등을 구부리고 주름을 새겼을지언정, 그 기백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너는... 설마?"


순간, 50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콜로세움. 검투사들의 함성, 모래 위로 흐르던 피, 부서진 검과 박살 난 채 여기저기 널브러진 갑옷. 그곳에서 쓰러진 전사들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뛰어들던 남자가 있었다.


'저걸 그냥 죽게 내버려 둔다고!? 아무리 명예가 중요해도 그렇지, 살려야 하는 게 우선 아니냐, 이놈들아!!'


수인들이 검을 빼 들고 제압하려 해도 괴팍한 성미를 감추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사내. 그는 끝끝내 과다출혈로 정신을 잃은 검투사를 치료한 뒤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타리안을 떠나버렸다. 그 덕에 목숨을 건진 검투사는 명예롭게 죽지 못했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죽음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며 씩씩대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그리고 지금, 그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


자이론과 마찬가지로, 안톤도 한순간 굳어졌다. 늑대의 형상을 한 전사를 바라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오래된 편린이 되살아난 듯했다.


"이럴 수가......"


그의 목소리는 신음처럼 낮았다. 깊은 주름이 진 얼굴에 놀라움과 감회가 뒤섞였다.


"이렇게 다시 볼 줄은 꿈에도 몰랐건만......"


자이론은 짧게 웃었다.


"시간이란 게 무섭긴 하군. 완전히 꼬부랑 노인네가 돼버렸잖아."


그 말에 안톤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당신은 늙지도 않았구려."


그러나 주변의 병사들은 여전히 경계심을 거두지 않았다. 그들은 두 사람의 재회 따위보다 눈앞의 '수인들'이 더 중요하다는 듯 손에서 무기를 놓지 않았다.


"무기를 거둬주시오. 이들은 우리에게 해를 가할 자들이 아니올시다."


"하지만 안톤 님, 수인들은—"


"내 말이 말 같지 않소!?"


그 한마디가 회초리처럼 공간을 가르자,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자이론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괴팍한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구만."


병사들이 무기를 거두자 아론도 천천히 검은 늑대들에게 손짓했다.


"전투태세를 거둬라."


검은 늑대들 또한 조용히 끓어오르던 피를 진정시켰다. 팽팽하던 긴장감이 조금씩 풀리자 주변을 감싸던 공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내가 저들을 대신해 사과하도록 하지. 힘을 합쳐도 모자란 세상인데, 고리타분하게 옛이야기로 차별이나 하고 있다니... 내가 다 부끄럽구먼......"


"어쩔 수 있나. 조상들의 원죄인 것을."


안톤의 깊어진 주름 사이로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이내 턱을 문지르며 낮게 말했다.


"이곳에서 오래 지낸 건 아니지만... 마을 근처에 쓸 만한 쉼터가 하나 있지. 방치된 곳이긴 해도,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이야기를 나누기엔 괜찮을 게야."


안톤은 한숨을 내쉬며 자이론과 검은 늑대들을 이끌고 발걸음을 옮겼다. 긴장이 조금 풀렸지만, 마을 순찰대의 병사들은 여전히 검은 늑대들을 불안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안톤 님, 정말 괜찮겠습니까?"


병사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에는 경계심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수인들을 이렇게 마을 근처까지 들이면 언제 돌변할지 모릅니다. 안전을 보장할 수 없—"


"닥치시게."


안톤의 단호한 한마디에 병사가 즉시 입을 다물었다.


"난 저들을 믿네. 그리고 저들이 먼저 나를 해하려 들 일도 없을 걸세."


그는 병사를 노려보며 한 걸음 다가갔다.


"자네들보다 저들이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살아남았고, 더 많은 피를 흘려왔어. 그걸 모른다면, 지금이라도 역사를 다시 공부해 보는 것이 어떻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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