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식된 황금의 땅 (7)

기억을 깨우는 선율

by 이샤라

병사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병사들과 함께 씁쓸한 얼굴로 물러났고, 결국 검은 늑대들은 방해받지 않고 경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잠시 후,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뒷산에 자리한 쉼터는 한때 여행자들이 쉬어가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잡초만 무성했다. 낡은 돌 의자와 쓰러진 나무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산길은 나무 사이로 비치는 빛이 들쭉날쭉한 그림자를 만들었고, 그 아래로는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바스락거렸다.


안톤은 숨을 고르며 바위 하나에 걸터앉았다.


"그래, 여기라면 괜찮겠군."


그는 자이론을 바라보며 손짓했다.


"일단 앉게. 병사들이 그렇게 경계하는데 굳이 저 아래에서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자이론이 말없이 자리를 잡자, 검은 늑대들은 주변에 흩어져 앉으며 경계를 유지했다. 안톤은 그들을 차례로 바라보다가 깊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른 뒤 한숨과 함께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하아... 그래, 정말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정작 서로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구먼."


"아까 병사들이 '안톤'이라고 부르는 걸 들었다."


"맞네. 그게 내 이름이지. 늦었지만, 이름이 무엇인가?"


"자이론이다."


"그래, 자이론.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많은 일이 있었지."


5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마주 앉아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멸망한 카노라스를 떠나 남쪽으로 피신했고, 전선에 몸을 담으며 싸움을 이어간 세월. 신의 가호를 잃고, 결국 남쪽으로 뻗어나가는 파도의 악마들을 막아내지 못한 현실.


대화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었고, 그 이야기들 사이에서 시즈와 아로스 두 사람이 겹쳐졌다.


"그래서, 무녀님과 환시를 품은 이는 지금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


"에스트라 가도 앞에서 헤어진 이후로는 들은 바가 없다."


"그렇구먼......"


안톤의 목소리에는 근심 어린 우려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또 한 사람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노아.


두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났던 어린 제자. 전선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노아가 거인과 함께 이그니카로 향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스테나 전선에서 이그니카로 이어지는 길은 부패로 가득한 평원이었고, 설령 그곳을 지나갔다 한들 그 뒤로는 불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을 터였다. 그 여정을 상상하니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금쯤 그 아이가 어디에서,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그런데...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건가?"


"요새의 남쪽에서 땅굴을 발견했지. 처음에는 단순한 동굴인 줄 알았지만, 깊이 파고들수록 규모가 커지더니 결국 이곳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안톤이 눈썹을 찡그렸다.


"누가 파놓은 건지 알 수 있나?"


"그건 나도 모르겠군. 다만 몇 번이고 확인한 끝에 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뒤, 우리는 땅굴을 이용해 이주하기로 결정했지. 지금 이 순간에도 1만 명의 주민들이 그 길을 따라오고 있다."


"...1만 명?"


안톤이 놀란 듯 되묻자, 자이론은 짧게 웃었다.


"여신께서 말씀하셨네."


그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덧붙였다.


"남쪽으로 향하라고 말이지."


그 말에 안톤은 피곤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남쪽으로......"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남쪽이라......"


"마을과 마찰을 빚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타리안 주민들은 이곳의 산 어딘가에 터전을 잡을 테니 말이야. 애초에 마을이 우리를 받아들일 이유도 없고 말이지."


자이론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마을은 타리안 주민들을 수용할 만한 공간이 없었고,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다. 따라서 검은 늑대들과 타리안의 주민들이 마을과 마찰을 빚을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앞선 일과 별개로, 남부 방어선은 도움이 절실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깊이 뿌리 박힌 편견이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것은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안톤은 병사들이 보였던 경멸의 시선을 떠올렸다. 검은 늑대들을 혐오했다고 해서 그들이 무능한 것은 아니었다. 마을의 병사들 또한 산전수전을 겪으며 지금까지 살아남은 베테랑들이었다. 그저, 너무 오랜 세월 동안 봐왔던 증오 속에서 살아왔을 뿐인 그들을 어찌 탓할 수 있으랴. 혐오는 가르치지 않아도 전염되는 병과 같아서 공포가 깊어질수록 더 빨리 번지는 법이다. 사자들의 죄가 그림자처럼 남아있는 한 이 땅의 사람들에게 수인은 영원한 이방인이자 잠재적 적일 수밖에 없었으니, 함께 피를 흘려도 섞이지 못하는 이 비극이 어쩌면 전쟁보다 더 잔혹한 현실일지도 모른다. 어느 때보다 위험한 세계 속에서 이런 차별과 혐오가 만연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부탁할 게 있네. 병사들의 행동에 대해선 할 말이 없네만, 엘라리모스의 남부 방어선 상황이 심상치 않아."


안톤은 천천히 자이론을 향해 시선을 옮기면서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시스테나 전선이 무너진 이후로... 남쪽의 방어선은 조금씩 밀려나고 있어. 아직 대륙의 중심부처럼 급격하진 않지만 이곳이 영원히 안전할 거란 보장은 없네. 전선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이 합류는 그야말로 언 발에 오줌누기였어. 끝없이 밀려오는 부패의 파도 앞에서 그들의 숫자는 턱없이 모자라다는 말일세."


"...역시, 남쪽도 안전하지 않다는 얘기인가."


"이유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나마 이곳은 카노르 평원과 달리 부패에 잠식되는 속도가 느리네. 하지만 3개월 전 습격당한 안식 교회를 생각하면......"


안톤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깍지 꼈다. 그 말을 하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일 이후로, 이교도들의 활동이 심상치 않아. 부패도 문제지만, 그놈들의 영향력이 점점 넓어지고 있어."


"...그래서?"


자이론이 차분한 목소리로 되묻자, 안톤은 눈을 마주 보며 조용히 말했다.


"방어선이 얼마나 버틸지 보고 판단하란 말인가?"


"자네도 이미 남쪽이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 않았나. 방어선이 더 무너지면, 타리안의 주민들도 결국 위험해질 걸세. 이곳이 마지막 안전지대가 될 수도 있어."





어둠과 빛이 한데 엉켜 조용한 장막을 형성하는 가운데, 빛의 실타래가 여전히 은은하게 유영하면서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 흐름 속에서 벨라미는 여전히 노래의 잔향 속에 머물러 있었다. 장난기 가득한 농담을 던지던 사내의 흔적은 사라지고, 오직 고요와 함께 조화를 이루는 존재처럼 보였다. 마치 수많은 영혼들과 교감하고 있는 듯한 그 모습은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벨라미의 시선은 분명히 현세의 것이 아니었다.


시즈는 그 모습을 보며 며칠간 말을 걸지 못했다. 나룻배 주변을 맴도는 영혼들은 위협적이지 않았으나 그들의 움직임은 생기 없는 정적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흐트러지지 않는 그 풍경은 마치 한 편의 그림처럼 완결된 정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간 이어진 긴 정적 끝에, 시즈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벨라미."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벨라미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지만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체 무엇인가요?"


벨라미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검푸른 흐름 속에서, 떠도는 영혼들이 그의 곁에서 부유했다.


"그냥... 잊혀진 존재들이지."


"잊혀진... 존재라뇨?"


벨라미는 한 손을 들어 허공을 가볍게 쓸었다. 그의 손끝을 따라 영혼의 잔영이 부드럽게 피어올랐다가, 다시금 흐릿하게 흩어졌다.


"오래전부터 이 땅에서 살아왔던 이들. 잊혔으나, 소멸되었어야 하나... 끝내 경계를 넘지 못한 존재들. 그럼에도 여전히 이 땅의 흐름 속에 머물러 있는 파편들이지."


시즈는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강이 존재하기 전, 여기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리고 벨라미가 왜 이렇게까지 이곳에 녹아든 것처럼 보이는지. 여전히 벨라미의 주변에는 영혼들이 맴돌고 있었지만 더 이상 노래에 이끌려 춤추고 있지 않았다. 마치 지켜보듯이, 혹은 길을 인도하는 듯이 부유하고 있는 그것들은 고요한 강물처럼 떠돌았고, 벨라미는 그 흐름 속에 서서 조용히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시즈는 처음으로 벨라미의 눈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 눈동자 속에는 너무 많은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들리시나요?"


"아니, 들리진 않아. 그저... 그들이 떠돌아온 시간의 무게가 느껴질 뿐이야."


벨라미는 짧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세상에 흐르는 것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아가.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지. 그게 의지든, 운명이든,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로 말이야."


시즈는 조용히 말을 삼켰다. 아로스 또한 노를 잡은 채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의 벨라미는 마치 세상을 꿰뚫어 보는 현자 같았다.


"너희도 마찬가지야."


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무언가를 찾고 있지만, 정작 그 끝을 정해둔 건 아니잖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지."


아로스가 물었다.


"너는 알고 있나?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훗, 내가 어떻게 알겠어. 하지만, "


벨라미는 가볍게 웃으며 여전히 허공에 떠도는 영혼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이 너희 주변을 떠돌고 있는 이유를 보면, 대충 짐작할 순 있지."


벨라미가 한 손을 뻗어 허공을 향해 손가락을 돌리듯이 흔들자, 그의 손끝을 따라 또 다른 영혼 하나가 미세하게 움직이면서 머리 위로 유영했다.


"정해진 운명 따위는 없어. 어디로 흘러갈지 결정하는 건 결국 스스로의 몫이니까."


벨라미의 마지막 말이 허공에 닿자, 조용한 공간 속에서 무언가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하늘을 대신하던 광경이 흔들리는 동시에 검푸른 흐름과 은빛 실타래가 서서히 희미해졌고, 공간을 가득 채우던 빛의 파동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끝없는 광채처럼 펼쳐졌던 공간이 마치 환영이었던 것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하자 주변을 맴돌던 영혼들의 잔영과 메아리처럼 남아 있던 벨라미의 선율이 마지막 여운을 남긴 채 조용히 가라앉았다.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차가운 강바람만이 길게 흘러가고 있었다. 협곡이 현실의 흐름 속으로 돌아오는 그때, 상류로 향하던 강줄기 왼편으로 안개에 가려져 있던 또 다른 갈림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벨라미는 그곳을 향해 뱃머리를 돌리며 아로스와 시즈를 향해 말했다.


"자, 그럼 우린 여기서 작별이군."


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꼬마 손님들, 저기 기사 아저씨랑 예쁜 무녀님한테 인사해야지?"


잠시 망설이던 아이들은 이내 뒤돌아 두 사람을 향해 작은 손을 흔들었다. 특히, 미에르는 처음으로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시즈는 저도 모르게 손을 흔들어 화답했고, 아로스 또한 말없이 작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벨라미와 아이들은 갈라진 강줄기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나룻배가 안갯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쯤, 아로스의 귓가에는 환청처럼 벨라미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정해진 운명 따위는 없어.'


두 사람만 남은 강 위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때, 미처 사라지지 못한 영혼의 빛 하나가 두 사람의 나룻배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일렁이던 그것은 시즈의 곁을 부드럽게 스치더니, 이내 아로스를 향해 다가갔다. 마치 작별 인사라도 건네듯 그의 주위를 천천히 배회하던 빛은 어느 순간 한 줌의 투명한 입자가 되어 아로스의 갑옷 틈새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은밀한 융화였기에 두 사람 모두 그 찰나의 스며듦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의식적으로 빛을 바라보던 시즈는 저도 모르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잊고 있던 선율을 흥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노래 한 소절이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차가운 별 하나, 길 잃은 그림자를 품어주네.


홀로 헤매도 별은 그 뒤를 따르고


세상이 그대를 버려도 홀로 두지 않으리.


부디 두려워 말아라, 나의 길 잃은 그림자여.


따스하지 않을지 언정 언제나 그댈 감싸리니.


잠들지 않는 저 별은 언제까지나 그대와 함께하리라......"



그 순간, 묵묵히 노를 젓던 아로스의 움직임이 멈칫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즈를 바라보았다. 그의 청록빛 눈동자가 낯선 파문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기억조차 없는 내면의 밑바닥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녀의 노래로 인해 건드려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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