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래지 않은 맹세
시즈는 아로스의 시선을 느끼고는 노래를 멈추며 당황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귀공......?"
"...무슨 노래입니까."
"아... 그게, 그냥... 아주 오래전에... 누군가 불러주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제가 무서워할 때마다 곁에서 이 노래를 불러주곤 했어요.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거든요."
아로스의 턱이 잠시 굳어졌다. 흔들리던 눈빛을 감추려는 듯, 그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바라보며 묵묵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시즈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술을 깨물었다. 이전보다 훨씬 더 차갑고 단단한 벽처럼 느껴진 행동에 심장 한구석이 서늘하게 내려앉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또다시 보이지 않는 벽 뒤로 숨어버렸다. 노래가 그의 마음에 어떤 파문을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의 침묵은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몸부림처럼 느껴졌다. 그렇기에 더더욱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는 안타까움만이 물결 위에 흩어질 뿐이었다.
차가운 침묵 속에서 나룻배는 계속 나아갔고, 어느덧 저 멀리 무너진 카노라스의 동쪽 관문이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나아갈수록 공기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처음에는 희미했던 부패의 흔적이 짙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를 짓누르는 듯한 불쾌감이 스며들었다. 카노라스와 가까워질수록 강은 점점 탁해지는 동시에 수면 위로 검은 잔해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강둑을 따라 이어졌을 건물들은 이미 붕괴된 지 오래였고, 무너진 성벽과 깎여나간 돌조각만이 잔해처럼 남아 있었다. 시체조차 없었다.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죽음의 기운은 여전히 이곳을 감싸고 있었다. 축축한 돌 더미 사이, 부서진 폐허의 틈에서 어기적거리며 기어 나오는 것들은 파도의 악마였다. 물에 젖은 것처럼 축축하게 들러붙은 피부 위로 경련을 일으키던 형체는 기괴한 움직임으로 폐허 위를 기어 다녔다.
그 순간, 저 멀리 어둠 속에서 거대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터운 독구름에 가려져 있던 세계의 중심이자 엘나가 안치되어 있었던 대륙의 초석, 엘나르 딘 바르. 그것은 이 황폐한 땅에서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은 구조물이었다. 빛조차 들지 않는 하늘 아래에 우뚝 선 카노라스의 탑은 이미 과거의 찬란한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정말 가까워졌네요."
시즈의 말을 끝으로, 어디선가 낮고 축축한 파열음이 들려왔다. 나룻배가 미세하게 뒤틀리는 그 소리에 아로스가 즉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면에 잠긴 나룻배의 밑바닥이 일그러지며 부식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검게 오염된 강물에 오랫동안 노출된 탓이었다.
"배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룻배는 점점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수로에서 빠져나와야 했다. 두 사람은 힘껏 노를 저었지만 부식된 배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커져 갔고, 그럴수록 노를 젓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노마저 부식되어 닳아버릴 찰나에 나룻배가 육지에 닿는 순간, 두 사람은 재빨리 몸을 날려 배 밖으로 뛰쳐나왔다. 육지에 발을 딛는 동시에 배의 선체가 삽시간에 일그러지더니 곧바로 부스러져 강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썩은 나무가 갈라지며 강 표면에 떠올랐고, 검은 물살 속으로 천천히 삼켜졌다.
"...아슬아슬했네요."
시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러나 안심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두 사람의 시야에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성채와 그 위로 솟은 망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주변의 모든 것이 부패한 것과 달리 기이할 정도로 그곳만큼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처럼 온전하고 깨끗한 모습이었다.
"귀공, 저곳이라면 이곳의 지형을 좀 더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 아로스가 본능적으로 시즈의 어깨를 붙잡으며 몸을 숙였다.
피유우웅——
공기를 가르며 날아온 날카로운 쇳소리가 허공을 가르며 귀를 찢더니,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볼트가 부서진 바닥을 강타했다. 튀어 오른 돌조각이 두 사람의 뺨을 스쳤으나 숨 돌릴 틈도 없이 사방에서 볼트가 연이어 빗발쳤다.
"엄폐물로!"
아로스가 짧게 외침과 동시에 두 사람은 반사적으로 폐허 뒤로 몸을 던졌다. 볼트가 무너진 석벽을 강하게 후려치자 파편이 튀면서 부서진 기둥의 일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돌덩이가 흩어지며 먼지가 피어올랐다.
"아직도 이곳에 누군가 있다니...!"
시즈가 숨을 몰아쉬며 낮게 중얼거렸다. 벽 틈으로 볼트가 날아오는 방향을 바라보자 망루 위에서 움직이는 형체들이 보였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검게 흔들리는 그림자들이 차례로 움직이며 다시 석궁을 장전하는 모습이 보였다. 퇴로는 없었고,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나 무작정 움직였다간 순식간에 벌집이 될 것이 뻔했다.
"볼트 발사 간격이 일정합니다."
아로스가 낮게 중얼거리며 시즈를 돌아보았다.
"무녀님, 제게 방어막을 쳐주십시오."
"...저기를 혼자서 뚫으시려고요?"
"제가 미끼가 되어 움직이면, 저들의 시선이 집중될 겁니다. 그동안 무녀님은 기회를 보십시오."
"하지만 너무 위험해요!"
"저는 무녀님의 힘을 믿습니다."
시즈는 잠시 망설였지만, 아로스의 단호한 목소리와 흔들림 없는 눈빛에 결단을 내리듯 손을 올렸다.
공기가 울렸다. 은은한 빛이 아로스의 몸을 감싸며, 얇지만 강인한 방어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능이 그의 피부에 스며들듯 흐르면서 볼트의 충격을 견딜 힘을 부여했다.
"다 됐습니다."
시즈가 집중하며 속삭이자, 아로스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성채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곧바로 볼트가 무차별적으로 쏟아졌지만 아로스는 사격의 궤적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불규칙한 동선을 만들었다. 좌우로 흔들며 달리다가 때로는 낮게 몸을 숙였고, 때로는 순간적으로 속도를 줄이며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연이어 날아온 볼트 하나가 각도를 틀며 흉부를 강타했다. 방어막이 충격을 흡수했지만, 강렬한 타격이 전해지며 그의 발이 순간적으로 엉켰다. 아로스는 이를 악물고 균형을 되찾으며 다시 속도를 높였다. 또 한 발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으나 이번엔 몸을 낮춰 피한 뒤 폐허를 가로지르며 미친 듯한 속도로 성채를 향해 달려갔다.
성채를 향해 달려가는 아로스의 모습을 보자 그 위에 있던 병사들이 소리쳤다.
"방어막을 두르고 있다! 이능을 사용하는 놈이다!"
"쏴라! 성채로 들어가기 전에 막아야 한다!"
포화는 거세졌다. 그러나 아로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숙인 채 속도를 더욱 높이며 성채 아래 성벽으로 돌진하더니 약해진 틈새를 향해 그대로 들이받아 성벽을 무너뜨리며 뛰어 들어갔다.
"저... 저놈이 성벽을!?"
경악에 찬 외침과 함께 병사들이 검을 빼 들었지만 아로스는 이미 성채 안으로 난입해 병사들 사이에 뛰어들어 버티는 기사들의 방패를 무력으로 하나둘씩 깨부수며 순식간에 제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방에서 볼트 세례가 또다시 시작되었고, 볼트가 무차별적으로 방어막에 날아들자 방어막은 점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하늘이 갈라졌다.
"벼락이 떨어진다! 엎드려!"
병사들의 다급한 외침과 동시에 푸른 뇌격이 지상을 쪼개듯이 내리 꽂혔고, 충격파가 성채를 뒤흔들었다. 아로스가 뒤를 돌아보자, 시즈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물러서지 않고 무기를 다시 고쳐 잡았다.
"네놈들의 정체가 뭐냐!"
한 병사가 검을 겨누며 외쳤다.
"우리는 언령의 글귀를 따라 심연을 찾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
그 말을 들은 병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카노라스를 멸망시킨 그 구덩이를 찾으러 왔다고?"
"미치지 않고서야 무저갱을 들어갈 이유가 없다!"
"그곳을 드나드는 존재는 틈새의 괴물들 뿐이야! 신전에 다가간 생명체 중에 살아남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곳으로 들어가겠다고?"
순식간에 적의로 가득 찬 병사들의 모습에 시즈가 다급하게 대화를 시도했다.
"저희는 카노라스를 위험하게 만들려 온 것이 아닙니다. 심연의 본질을 알고, 그 흐름을 막기 위해서—"
"닥쳐라!"
기사 하나가 분노에 찬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 네놈들이 카노라스가 무너지던 순간을 보았느냐!"
기사의 일갈로 병사들이 다시 한번 두 사람을 향해 검을 치켜들자, 아로스 또한 반사적으로 검을 고쳐 쥐었다. 하지만 시즈는 공격을 준비하는 대신, 그와 병사들 사이를 막아서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검을 거두어 주세요! 저희는 싸우러 온 것이 아닙니다!"
시즈의 간절한 외침에도 병사들의 적의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성채 안을 채우는 순간, 무너진 성채의 안쪽 너머에서 남루한 후드를 뒤집어쓴 누군가 나타났다. 그 모습에 시즈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라그나르 경?"
라그나르 역시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푸른 뇌격 소리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달려오던 참이었다.
"설마 했는데... 이 늙은이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군요."
라그나르의 중재 덕에, 시즈와 아로스는 더 이상의 충돌 없이 오리엔 성채 안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안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병사들은 여전히 경계를 풀지 못한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지만 라그나르의 존재감 앞에 구태여 반발하지는 않았다.
성채 내부로 들어서자, 라그나르가 걸음을 멈추고 시즈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어엿한 무녀가 되셨군요, 고룡께서 주신 은총이 깃든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시즈는 예를 갖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시선을 성채 바깥,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는 병사들에게로 향했다.
"이곳을... 아직도 누군가 지키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줄로만 알았는데......"
시즈의 목소리가 말끝을 흐렸다. 폐허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폐허 그 자체가 되어버린 듯한 전사들의 모습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라그나르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이 답했다.
"이곳을 지키겠노라 맹세한 자들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연민과 존경심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라그나르는 무너진 계단에 기대어 앉아 있는 병사 하나를 가리켰다. 그의 갑옷은 여기저기 패이고 긁혀 원래 색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얼굴에는 깊은 흉터가 남아 있었으며, 왼손은 사라지고 없었지만 남아있는 오른손으로 쥔 칼은 여전히 날이 살아 있었다.
"저들에게 이곳은 단순히 무너진 고향이 아닙니다. 15년 전, 그날의 비명과 절망이 잠든 거대한 무덤이지요. 떠난 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떠났지만, 남아있는 자들은 죽어간 이들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남은 겁니다. 신들에게 버림받고, 세상이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들은 이곳에서 스러져간 가족과 동료들의 곁을 지키기로 한 최후의 수호자들입니다."
시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었다. 황금빛을 잃어도 싸움을 멈추지 않는 자들. 죽음보다 더한 공포 속에서도 검을 내려놓지 않는 자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성벽 끝에서 다가오는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구원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자리를 지키는 미련함이었을까, 그저 참혹한 폐허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할 방법이라곤 오직 죽은 맹세를 붙드는 것뿐이라 여겼던 것일까. 어느 쪽이든, 산 자가 죽은 자의 묘비가 되어버린 이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비극이자 숭고함이었으리라.
라그나르가 이끄는 방향으로 시야가 넓어지자, 무너진 성채 너머로 드넓은 폐허가 펼쳐졌다. 거대한 강을 품었던 세계의 중심지이자 수많은 신들의 가르침과 평원을 달리는 기마대로 명성을 떨쳤던 황금의 도시. 이제 그 흔적은 희미한 그림자처럼 남아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