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의 중심으로
활기가 넘쳤던 도시는 지독한 부패의 손길에 스며들어 어둡고 메마른 황무지로 변해 있었다. 검보랏빛 얼룩이 진흙처럼 굳어 있는 땅 위로는 바람이 불 때마다 부식된 먼지가 피어올랐고, 강물이 흐르던 자리에는 끈적거리는 검은 점액이 얕게 고여 역겨운 형체들이 표면 위로 일렁였다. 한때 강력한 방어선을 자랑하던 도시의 성벽도 수많은 크고 작은 균열을 머금었다. 성벽 곳곳에는 거대한 발톱에 긁힌 듯한 흔적이 선명했고, 망루들은 반쯤 무너진 채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었다. 거리에는 갑옷을 입은 시체들이 오래된 잔해처럼 방치된 상태였다. 부식된 철갑과 뒤틀린 뼈들, 그리고 피가 흘렀을 자리에는 검게 말라붙은 얼룩만이 고착되어 그날의 참상을 증언하는 듯했다.
그곳을 지나 성채 너머로 시선을 돌리자, 가라앉은 재와 독기를 머금은 잿빛 소용돌이가 성채 바깥에서 울부짖듯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위에 서 있는 탑만은 붕괴되지 않은 채 우뚝 서있었다. 마치 모든 것이 부식되고 사라졌음에도, 홀로 억지로 버티고 서있는 비석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모든 것들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처참하네요."
시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조용히 두 손을 모아 묵념했다.
바람이 죽은 땅을 스쳐 지나갔다. 피로 물든 역사의 끝자락에서, 그녀는 침묵을 지키며 짧은 기도를 마쳤다.
잠시 뒤, 침묵을 깨는 듯 아로스가 라그나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경께서는 어떻게 이곳까지 오시게 된 겁니까?"
라그나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탑을 향하여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강풍에 먼지가 휘날리는 폐허 속에서, 오직 흑진주 같은 깊은 눈동자만이 빛을 머금었다.
"...이곳에 오기 전, 지하에 숨겨진 거대한 문명을 발견했습니다.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요. 카타디오라 불리는 도시였죠."
낯선 이야기가 시작되자, 시즈와 아로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곳 외곽의 신전에서 카노라스와 카타디오에 대한 기록을 찾았습니다. 두 도시는 거의 공존한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더군요. 신들의 도시였던 카노라스... 카타디오는, 신들을 지켜보던 자들의 도시였습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신들을 지켜보다니요?"
시즈가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신전의 서고에 있던 기록에 따르면, 카노라스의 신들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서서히, 심연의 기운에 물들어 갔습니다. 불행하게도, 신들은 스스로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더군요."
조용히 탑을 바라보던 아로스가 라그나르를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모르티아가 카타디오를 이용해 신들을 타락시키고, 신들이 자리를 비운 순간 파도의 악마들이 이곳을 덮쳤다는 것이군요. 이 모든 것이 수천 년에 걸쳐 짜인 계획이었다니......"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사이, 시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그나르 경, 혹시... 익인들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뜬금없는 질문에 라그나르가 의아한 눈빛으로 시즈를 돌아보았다.
"익인이라... 날개를 지닌 수인들을 말하시는 겁니까?"
시즈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그나르의 흑진주 같은 눈동자가 아주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듯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기억을 더듬는 것이 아닌 억지로 삼키는 듯한 표정이었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불의 심판이 있던 날... 그들은 하늘을 잃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라그나르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 짧은 한마디 속에 담긴 무언가가 너무도 무거워 시즈조차 잠시 말을 잇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그들은 그날 이후로 역사에서 지워진 것과 다름없습니다. 헌데, 사라진 그들의 이름은 왜 꺼내십니까?"
"마르프록스 산맥에서... 그들의 둥지를 발견했어요."
"......!"
"그곳에는 날개를 잃은 수많은 익인들이 숨어 살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들을 이끄는 거대한 검은 날개를 가진 익인은 달랐어요. 칠흑 같은 깃털이 돋아난 거대한 날개를 가지고 있었고... 하늘을 날고 있었습니다."
라그나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늘을 잃었던 자들이 다시 날아올랐다라... 그것은 단순히 날개를 되찾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는, 아니 이 세계를 지탱하던 거대한 섭리의 한 축이 무너져 내렸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시즈의 다음 말은 더 큰 재앙을 예고했다.
"그리고... 산맥 아래의 무너진 서쪽 신계의 관문에 있던 틈새의 존재들이 그 검은 익인을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없으면 '그곳'을 칠 수 없다고요."
"그곳... 이라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 검은 익인은... 불꽃의 사제들과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불꽃의 사제들이 익인들과...?"
상상치 못한 조합에 라그나르가 경악하자, 시즈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불의 장벽으로 왕래가 끊겨버린 지금 불을 숭상하던 자들이 정체 모를 이들과 손을 잡았다는 것... 그들이 노리는 곳은 단 한 곳뿐이지 않을까요? 불의 도시... 이그니카를 말이에요."
라그나르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하늘을 잃은 자들이 다시 비상했다는 것만으로도 불길한 징조일진대, 불을 지켜야 할 사제들이 도리어 그들과 손을 잡았다라. 확언을 할 수 없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모든 것을 하나로 잇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을 통해 장벽을 우회할 테고, 그 길로 도시를 궁지에 몰아넣겠지. 북쪽으로 향하는 길을 갈라놓은 불의 장벽 너머로 고립된 이그니카가 그 안에서 살아남았는지, 멸망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15년이라는 침묵의 세월. 허나 이대로라면 그 장벽은 단순한 단절이 아닐 터였다. 대체 그들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일까.
"신들을 타락시킨 것으로 모자라... 기어이 이 땅의 마지막 불씨마저 꺼트리려 하려는 건가......"
라그나르의 중얼거림 속에는 천근만근의 바위가 짓누르는 듯한 무거운 근심이 서려 있었다. 아로스 역시 굳은 표정으로 시즈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이야기를 그동안 꺼내지 못했던 이유를 굳이 묻진 않았다. 벨라미와의 정신없는 여정, 그리고 자신이 의도적으로 세웠던 벽 때문에 그녀가 홀로 그 불안감을 삼키고 있었음을 짐작했기에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의 위중함을 받아들였다.
"...상황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군요."
라그나르는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이미 폐허가 된 카노라스를 넘어, 보이지 않는 북쪽의 불길을 향하고 있는 듯했다.
"만약 그들의 흉계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단순히 한 도시의 문제가 아닌 대륙 전체가 또 다른 재앙에 휘말리는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침묵하는 그의 눈빛은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아로스는 라그나르에게 느껴진 기묘한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노장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단순한 관찰자의 것이 아닌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마주한 자만이 풍길 수 있는 지독한 결의에 가까웠다.
"라그나르 경,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로스가 라그나르의 눈을 직시하며 물었다.
"저와 무녀님은 그렇다 치더라도, 경께서는 이렇게까지 엘나에 관한 일에 연루될 이유가 없으실 텐데요."
그 말에 라그나르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유가 없다라... 너무도 큰 이유가 하나 있지요."
짧은 한숨과 함께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흑진주 같던 깊은 눈동자는 돌연 깨져버린 흑요석처럼 싸늘하게 변했고, 그 안에서 차오르는 감정은 날이 선 칼날처럼 서슬 퍼렜다. 그 눈빛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억누를 수 없는 원한, 그리고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빚어낸 지독한 증오였다.
"이 늙은이의 사명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 잔악한 '악신'을 제 손으로 직접 찢어 죽여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주군의 명예를 되찾는 것... 그것만이 제가 살아있는 이유입니다."
시즈와 아로스는 순간적으로 드러난 살기에 강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누구보다도 온화한 성품을 보였던 라그나르는 강한 힘을 가졌음에도 쉽게 휘두르지 않았고, 깊은 분노를 품고 있어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말속에는 여태껏 억눌러 온 감정의 찌꺼기들이 선명하게 섞여 있었기에 대화의 분위기는 돌이킬 수 없이 무거워졌다.
라그나르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르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제게는 아직 정보가 부족합니다. 신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단순한 복수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요. 그래서 홀로 떠난 것이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단서를 모으며 길을 찾는 과정에서 이렇게 두 분과 마주하게 된 것은... 얄궂은 운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라그나르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지면서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그 웃음 아래에는 여전히 깊은 상실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아무래도 제 운명의 끝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두 분과 함께 동행을 해야 할 듯싶군요. 그 탐욕스러운 악신은... 필시 엘나가 제자리에 돌아오는 순간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니, 저 또한 이 여정에 함께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차분히 요청하는 그의 마지막 말에는 조금의 배려가 담겨 있었다.
"폭주가 걱정되신다면... 대비책은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 말에, 아로스가 시즈를 한번 바라본 후,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경께서 함께 해주신다면... 그보다 든든할 수는 없겠군요."
아로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작게 미소 지은 라그나르의 시선이 그들의 뒤편에 서 있던 기사를 향했다.
"우리 셋을 무저갱의 입구까지 안내해 줄 수 있겠소?"
드미트리라는 이름의 기사는 깊은 흉터가 패인 얼굴로 잠시 고민하다가 낮게 대답했다.
"입구까지의 길은 알고 있습니다만, 신전으로 향하는 길목의 독기는 상상 이상으로 지독합니다. 살아있는 생명들은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할 겁니다."
그 말에 시즈가 나섰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를 안내해 주세요."
드미트리는 여전히 망설였지만, 결국 병사 몇을 선발한 뒤 세 사람과 함께 요새 밖으로 향했다.
빛이 바래고 무너져 내린 금빛 계단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희미한 기운이 깃든 공기는 점차 옅어졌다. 요새를 감싸고 있던 어떤 힘이 점진적으로 흐려지는 듯했다. 시즈는 천천히 손끝을 움직이며 주변의 기운을 느끼자 어렴풋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스라져 가는 얇은 막과도 같은 감각이었다.
어느 정도 요새를 벗어난 순간, 드미트리가 발걸음을 멈추며 경고했다.
"이 지점부터는... 요새를 지키는 성물의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병사들 사이에서 긴장된 기색이 돌자, 시즈가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손끝에서 빛이 나면서 공기 중에 푸른 아우라가 퍼져나갔다. 빛은 부패한 대지를 밀어내는 듯한 기운으로 변하며 일렁이더니, 곧이어 사람들을 감싸주는 투명한 정화의 장막이 형성되었다.
"이제 괜찮을 거예요."
병사들은 경이로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 중 일부는 이능이 만들어낸 장막을 향해 손을 뻗으며 감탄했다. 드미트리 역시 놀란 듯 시즈를 바라보았지만, 시즈는 굳이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라그나르는 조용히 결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짧게 말했다.
"저는 필요 없습니다."
그 한 마디만 남긴 채 라그나르는 드미트리와 병사들을 따라 결계 밖으로 움직였다. 부패한 기운이 스며들 듯 감돌았지만 그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세 사람과 병사들은 무너진 대로를 따라 신전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바싹 마른 대지 위로 독기 가득한 돌풍이 몰아쳤다. 시야를 가리는 먼지와 함께 몇몇 파도의 악마들이 바닥을 기면서 모습을 드러냈으나 드미트리와 병사들은 감정의 동요 하나 없이 무심하게, 마치 징그러운 벌레를 밟아 죽이듯 머리에 칼날을 내려찍어버렸다.
돌풍을 뚫으며 꽤 오랜 시간 움직이자, 거대한 쇠뇌에 꿰뚫린 형체를 알 수 없는 잔재들이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흔적들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로 위로는 무언가가 이곳을 지나간 것처럼 발자국도 아닌, 그렇다고 정확한 형체도 아닌 기괴한 패턴을 이루는 궤적들이 잔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끝에서 카노라스의 심장부, 신전 엘 아니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불의 심판으로 사라진 세계수를 기리기 위해, 그날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세워진 대륙 최대의 신전. 신전은 폐허 속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 채 여전히 도심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으나 이제 검은 부패에 뒤덮인 쑥대밭이나 다름없었다. 거대한 기둥들은 마치 시간에 의해 서서히 깎여나간 듯한 형태를 하고 있었고, 입구로 이어지는 계단은 여기저기 무너진 채 부패의 잔해로 뒤덮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