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식된 황금의 땅 (10)

무저갱

by 이샤라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싹 마른 돌조각들이 부스러져 내렸다. 그 위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검은 덩어리들, 한때 무언가의 시체였을 것들이 잔해처럼 흩어져 있었다. 이미 육신은 사라지고 뒤틀린 갑각만 남은 거대 존재의 흔적의 일부는 계단을 가로막은 채 무너져 내려 있었고, 일부는 화염에 탄 듯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으며, 곧이어 그 시체들에게 대적했던 흔적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발석거에서 날린듯한 거대한 바위들이 계단 곳곳에 처박혀 있었다. 바위들은 계단을 완전히 부숴 돌층계를 깊숙이 함몰시켰고, 충격에 의해 산산이 부서진 잔해들이 난잡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 틈새로 불규칙한 균열이 번져 계단 일부는 울퉁불퉁한 절벽처럼 변해 있었다. 쇠뇌에서 발사된 거대한 볼트들은 흡사 창처럼 계단을 관통한 채 무자비하게 박혀 있었다. 수십 미터에 이르는 그것들은 녹이 슬지도, 부식되지도 않은 채 여전히 서슬 퍼런 끝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때 누군가를 꿰뚫었을지도 모를 그 거대한 화살들은 마치 전쟁의 유령처럼 계단을 지키고 있었다.


거친 돌풍이 불어오더니 부서진 잔해를 휩쓸며 계단을 넘어갔다. 공기마저도 메마르고 독기 서린 잿빛으로 물든 가운데, 마침내 신전의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을 장식했던 화려한 조각들은 이미 깎여 나가고 없었다. 벽면에는 검게 물든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었고, 문 앞의 계단마저 일부는 주저앉아 있었다.


거대한 문 앞에 다다르자, 오래된 철제 문이 돌풍에 흔들리며 삭아버린 금속이 신음하듯 거친 마찰음을 냈다. 발걸음을 멈춘 모두가 천천히 신전의 내부를 응시했다. 빛이 부재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어둠 그 자체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웅크리고 있는 듯한 불길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신전 내부의 무너진 천장의 틈 사이로 옅은 빛이 스며들었지만 그조차 검은 그림자 속에 묻혀 흐릿했다.


시즈가 손을 들어 조용히 이능을 발현하자, 푸른 등불이 공중에 떠올랐다. 희미한 빛이 신전 내부를 비추는 순간, 곳곳에 무너져 내린 천장과 깨진 신들의 조각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은 반쯤 꺼져 내린 둥글게 아치진 천장은 과거엔 정교한 황금 부조로 뒤덮여 있었던 듯했다. 수직으로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른 기둥의 표면에는 희미하게 남은 부식된 문양들이 신의 권위와 질서를 상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 속에서도 기이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금이 간 기둥 사이로는 거대한 뿌리 같은 형체가 엉켜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무너진 구조물의 일부처럼 보였다. 그러나 희미한 빛이 그 표면을 따라 흐르자, 그것이 단순한 돌이나 금속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여전히 생명력을 머금은 듯한 표면과 부서진 기둥과 얽혀 구부러진 줄기. 그제야 이곳이 완전히 붕괴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거대한 세계수의 줄기들이 신전의 기둥을 휘감아 무너지는 건축물을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줄기들은 신전의 외벽을 타고 얽혀 있었고, 가느다란 가지들이 신전 내부로 뻗어 있었다. 마치 신전이 자연의 힘에 의해 간신히 버티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어서 사방을 둘러보자, 여러 개의 문들이 보였다. 이곳저곳으로 이어진 듯한 입구들은 깊은 어둠 속으로 길게 뻗어 있었고 그중 하나, 왼쪽 끝에 자리한 문 너머에서는 무언가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검은 기운.


그것은 공기보다도 짙었고, 마치 바닥을 타고 기어 나오는 연기처럼 일렁였다. 시즈가 만들어낸 푸른 등불의 빛이 그 기운에 닿자, 마치 물에 먹물이 퍼지듯 빛의 가장자리가 검게 잠식당하며 흐려졌다. 누군가가 입을 열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모두가 그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검은 기운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공간을 잠식하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타고 스며들자 병사들 중 누군가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이 서늘했다. 한순간,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초자연적인 공포.


수없이 죽음과 맞서 싸워온 그들이었지만, 지금 느껴지는 것은 결코 익숙한 종류의 공포가 아니었다. 이 기운 앞에서는 모든 경험과 의지가 무력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압도적인 존재의 그림자, 끝없는 심연에서부터 스며 나온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돌아가세요."


시즈의 목소리가 조용히 공간을 가로지르자 병사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드미트리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떨리는 손끝이, 이곳이 지금껏 겪어온 것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그동안 맞서왔던 것들과 다릅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단순한 두려움이 아닌 경고였다. 그러나 시즈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저희는 들어가야 해요."


눈빛에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드미트리는 시즈를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병사들을 향해 짧게 턱짓하자, 그제야 병사들은 무겁게 몸을 돌렸다. 돌아서면서도 몇몇은 마지막으로 문 너머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결국 모두가 그 시선을 거두었다.


병사들이 모두 등을 돌리자 라그나르가 조용히 드미트리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이 땅에 미련을 두지 마시오. 당신들이 왜 이곳에 남아 있는지는 잘 알고 있소만... 이제는 떠날 때요."


라그나르의 목소리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 또한 한때, 떠나는 선택을 해야 했던 자였다. 터전을 잃고 싶지 않았던 타리안 주민들의 간절한 눈빛을 마주하며 그것이 패배가 아닌 새로운 길임을 역설해야만 했다. 이들 또한 마찬가지리라. 무너진 잔해 속에서 과거를 붙들고 있는 것은 늙은이 하나로 족했다.


"희망이 사라진 곳에 남을 이유는 없소. 남쪽으로 가시오."


라그나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드미트리는 그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이 뒤돌아 병사들을 따라가려던 찰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문을 돌아보았다. 세 사람은 이미 사라졌고, 문 너머의 기운은 더욱 짙어졌다.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다가갈수록 공기는 단순한 공기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쇠비린내와 축축한 시체 구덩이 냄새가 뒤섞여 정신을 갉아먹는 듯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재가 폐를 채우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처음에는 희미하던 검은 안개는 이제 발목을 휘감는 강물처럼 짙어져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던 무언가가 뚜껑을 열고 천천히 세상 밖으로 퍼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좁은 통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벽면 곳곳에 불규칙한 균열이 나 있었다. 단순한 시간이 만든 균열이 아닌 거대한 무언가가 벽을 부수며 지나간 흔적이었다. 박살 나버린 벽의 균열을 따라 벌어진 틈들은 마치 수많은 무언가가 이 벽을 뚫고 비집고 나간 것처럼 보였다. 파손된 흔적이 점점 거대해졌고, 그 끝에는 신전 밖으로 이어지는 절벽이 보였다.


거대한 틈은 신전의 외벽을 뚫고 절벽처럼 카노라스의 대로로 이어졌다. 그 광경을 뒤로한 채 세 사람은 다시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좁고 뒤틀린 통로를 지나자, 갑자기 공간이 넓어지며 거대한 회랑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에는 과거의 잔해들이 고스란히 방치되어 있었다. 부서진 기둥과 검은 액체에 젖은 돌바닥 주변으로 허겁지겁 도망친 사람들이 내던진 도구들이 어지럽게 굴러다녔다. 벽면에는 희미한 그을음이 남았고, 바닥에는 사방으로 흩어진 발자국들이 어지러이 겹쳐졌다. 살기 위해 뛰쳐나갔던 자들이 남긴 흔적들, 그리고 그 혼란을 가로질러 무언가 지나간 자취가 선명했다. 인간의 것과는 판이한, 거미처럼 뒤틀린 마디 끝이 바닥을 긁어낸 듯한 기괴한 검은 선이 길게 뻗어 나갔다. 일부는 벽을 타고 기어올랐는지 높게 솟은 천장까지 손톱자국이 깊게 패여있었고, 바닥 곳곳에는 거대한 충격이 휩쓸고 간 흔적이 가득했다.


산산조각 난 검은 형체들의 모습은 파도의 악마들 같았다. 대다수가 망치로 으깨진 듯 회랑 바닥에 무더기로 쌓인 채 널브러져 있었다. 누군가의 일격에 머리가 터져나간 흔적, 날카로운 칼날로 수많은 숫자가 한 번에 그 자리에 찍혀서 산처럼 쌓인 절단된 사지들, 어디에선가 벽면을 따라 힘없이 늘어진 육체는 마치 팔을 휘두르는 단 한 번의 충격에 그대로 내던져진 것처럼 보였다. 이곳이 한때 격전의 중심지였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했지만 이들을 쓰러뜨린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 이곳에는 엄청난 전투가 벌어졌고, 무언가가 파도의 악마들을 쓰레기를 쓸어버린 것처럼 눈앞의 흔적들은 너무도 압도적이었지만 그 싸움을 벌였어야 할 존재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회랑 끝에 다다르자, 계단이 있어야 할 공간이 뚝 끊겨 있었다. 완전히 무너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잔해만이 가득했고, 그 아래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저 아래 어딘가로 이어지는 길이 있을까. 그 답을 찾기라도 하듯, 시즈가 손에 들고 있던 푸른빛의 등불을 조용히, 아래로 떨어뜨렸다.


작은 불빛이 암흑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완전히 꺼지기 전, 희미한 빛이 무언가를 비추더니 등불은 어느 순간부터 경사를 따라 데굴데굴 굴러갔다. 매끄러운 표면이 아닌 울퉁불퉁한 바위와 균열이 드러난 경사진 절벽. 완전히 수직은 아니었지만,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바닥까지 곤두박질칠 정도의 가파른 경사였다.


등불은 5초 정도 절벽을 따라 구르다 멈췄다. 그리 깊지 않은 곳에 발 디딜 곳이 있다는 신호였다.


아로스가 조용히 시즈를 돌아보았다.


"무녀님, 제게 안기십시오."


시즈는 말없이 그의 품에 몸을 맡겼다. 아로스는 시즈를 가볍게 안아 들더니, 망설임 없이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 모습에 라그나르도 곧바로 뒤따라 뛰어들었다. 거친 바람이 휘몰아쳤고, 세 사람은 절벽을 따라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절벽 아래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시즈가 다시 푸른 등불을 띄우자, 빛이 어둠을 가르며 조금씩 퍼져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빛을 밝힌다 해도 이곳은 온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발밑은 부서진 돌과 균열, 무너진 계단의 잔해로 가득했다. 원래라면 신전의 더 깊은 곳으로 이어졌을 통로였겠지만 지금은 절벽 아래의 끝없는 어둠으로 이어진 공간이 되어 있었다. 그 앞에는 머리가 없는 거대한 세 구의 시체들이 쓰러져 있었다. 바위처럼 거친 피부 표면은 곳곳이 깨져 있었고, 잘려나간 목의 단면에서는 검은 액체가 들끓듯 고여 흘렀다. 본래 있어야 할 생명의 흔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시즈는 눈앞의 광경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숨을 삼켰다.


"...회랑에서 파도의 악마들을 막아냈던 건 이 거인들이었군요."


라그나르가 낮게 중얼거리자, 아로스가 그 주검들을 내려다보며 낮게 덧붙였다.


"아마룬이 겁을 먹고 도망쳤다는 장소가 이곳인 것 같습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종족이라 알려진 거인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철저히 파괴된 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흉물스러운 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이곳에서, 거인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나타났었다는 것.


라그나르가 말없이 부서진 바닥을 짚는 순간, 세 사람의 시야에 거인의 시체를 삼키듯 퍼져나가는 검은 기운이 들어왔다. 신전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온 공간을 뒤덮고 있던 그것은, 마침내 그 시발점에 도착한 이들 앞에서 가시적인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공기를 잠식하고, 공간 자체를 비틀어버리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하고 이질적인 감각. 이곳이 무엇인지 묻거나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세 사람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심연의 입구, 무저갱(無底坑)이었다. 시즈가 푸른 등불을 무저갱 너머로 비췄으나, 빛이 닿는 곳마다 검은 기운이 증기처럼 피어오르며 시야를 가득 채운 채 스며들어 갔다. 빛조차 닿지 않는 구덩이는 끝을 가늠할 수도 없는 어둠이 감싸고 있었다. 아무리 빛을 밝혀도, 눈앞의 구멍은 마치 생명을 삼키듯 빛조차 잠식하고 있었다.


시즈는 손끝을 꼭 쥐었다. 마른침을 삼켰지만 속부터 차오르는 불안감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대로 뛰어내리는 게 맞을까요?"


조심스럽게 내뱉은 질문은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보다, 이 아래가 과연 우리가 발 디딜 수 있는 곳인지 모르겠군요. 무작정 떨어졌다고 가정했을 때... 살아서 내려간다는 보장도 없으니 말입니다."


라그나르는 확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며 무저갱의 깊은 어둠을 응시했다. 저 밑바닥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곳은 길이 아니라, 그저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위해 벌려진 거대한 아가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발을 떼는 순간,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할지도 모른다는 원초적인 공포가 노장의 발목을 잡았다.


세 사람이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던 그 순간, 갑작스러운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져 있던 거인들의 몸이 움직였다. 잘려나간 목에서 검은 액체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더니 금이 간 표면 사이로 검은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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