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의 유혹 (6)

탈출

by 이샤라

감옥의 외곽은 여느 때처럼 한적했다. 소수의 추적자들과 감시자들만이 왕래할뿐더러, 그들마저도 이곳에서 머무는 시간은 극히 짧았다. 드나드는 이유는 오직 단 하나. 온몸이 마비된 시즈에게 물을 먹이기 위함이었다. 그때마다 추적자들은 더러운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유독 시즈에게 집착을 한 것은 크라인이었다. 반년 전, 자신의 얼굴을 단검으로 긋고 도망쳤던 시즈를 향한 증오와 욕망은 여전히 마음속에 독사처럼 뒤엉켜 있었다. 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억눌렀던 치욕이 되살아났지만 샤비트의 감시가 있기에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


'이런 개 같은... 떠먹으라고 눈앞에 던져놨는데 손도 못 대는 꼴이라니.'


크라인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시즈를 덮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샤비트에게 온몸을 갈가리 찢길 것이 분명했다. 샤비트는 유능했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였다. 그에게 있어 추적자란 언제든 쓰고 버려지는 장기말에 불과했고, 자신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두려움 이면에는 지워지지 않는 원한이 또렷이 자리하고 있었다. 도구처럼 쓰이다가 버려질 자신의 운명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살아남은 자의 비굴함과 함께 꺼지지 않는 적개심이 뒤엉켜 있었다. 크라인은 매번 그 감정을 눌러 삼켰지만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언젠가 기회만 있다면, 그동안 당한 모든 굴욕을 되갚아주리라 다짐했다.


감옥에 들어선 크라인은 의식이 없는 시즈의 입술 사이로 주전자 주둥이를 억지로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주변을 훑어본 뒤 몰래 시즈의 검은 정복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 끝에서 느껴지는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의 부드러운 살결. 그것은 단순한 욕정을 넘어서 자신을 모욕했던 여인을 마침내 손아귀에 넣었다는 정복감이었다. 얼마 만에 느끼는 감촉인가. 금단의 열매에 손을 뻗은 듯한 흥분과 쾌락이 한순간에 그의 가슴팍을 훑고 지나갔다.


잠깐 동안의 욕망을 즐기던 크라인은 이내 정신을 차린 뒤 서둘러 감옥 밖으로 나섰다. 그는 추적자들이 모여 있는 낡은 막사로 발걸음을 옮기며 아쉬움을 속으로 삭였다.


'아쉬워 죽겠군. 조금만 더 느끼고 싶었는데.'


하지만 찰나의 여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늘한 아우라가 그의 온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 기분 나쁜 기운은, 몇 달 전 카브르를 따라 들어갔던 동굴 속에서 느꼈던 것과도 같았다.


샤비트가 나타난 것이었다.


"역시... 네놈의 그 더러운 본성은 변함없구나. 잠깐의 욕정조차 참지 못해 그분의 제물에게 손을 대다니. 네놈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샤비트의 아우라가 크라인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크라인은 살점이 도려지던 그날의 끔찍한 밤이 되살아났다. 그는 공포에 떨며 비굴하게 자비를 구걸하기 시작했다.


"자... 잘못했습니다! 저... 저는 그저... 제물이 깨어 있는지 확인하려고─"


"감히 누굴 속이려고 드는 것이냐!"


샤비트는 단번에 변명을 끊었다. 아우라의 압박이 더 강해졌고, 크라인은 뼈가 으스러질 듯한 고통이 온몸을 휘감았다.


"자, 잘못했습니다! 제발! 제발 목숨만은...! 아아아아아아아악!"


크라인의 비명소리에 추적자들과 감시자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욕망에 절어있는 네놈들의 속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네놈을 본보기로 삼아, 제물에 손을 대면 어떻게 될지 똑똑히 보여줘야겠구나."


샤비트의 아우라가 시즈의 몸을 탐한 크라인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뱀이 먹잇감의 숨통을 조이듯 촉수가 크라인의 손을 비틀기 시작하자 이내 검게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악——!! 잘못, 잘못했습니다! 제발! 제바아알! 끄아아아아아악——!"


크라인의 손은 순식간에 미이라처럼 변해버렸다. 살점은 바스러지다 못해 뼈 마저 검게 타들어갔다. 샤비트는 몸을 돌려 크라인을 무참히 바닥에 내동댕이 쳐 버린 뒤 보란 듯이 자신을 향한 모든 시선들에게 경고했다.


"또 한 번 제물을 탐하는 자가 있다면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본보기를 보고도 멍청한 행동을 할 놈이 다시 나타날진 모르겠지만 말이지."


샤비트는 감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크라인은 자신의 오른손을 끌어안고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로지 분노만을 삼켰다.


"개자식... 반년 전에는 온몸을 난도질하더니, 이번엔 오른손을......!"



감옥으로 돌아온 샤비트는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감시자들의 눈빛은 기묘하게 풀려 있었고, 바닥에는 뭔가 끌린 자국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곧장 철창을 열자 그곳에는 무녀대신 눈이 뒤집힌 주술사가 힘없이 누워 있었다. 도망치면서 겉옷을 바꿔놓은 그 모습은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헷갈릴 것이 분명했다.


샤비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살기 어린 기운에 정신 차린 감시자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벌벌 떨었다. 어떤 변명도, 어떤 핑계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제물은 어디 있지?"


"모, 모르겠습니다! 제물은 한 발짝도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무슨 착오를 하신 게—"


푸각———


샤비트는 말을 끝까지 듣지 않은 채 감시자의 이마에 구멍을 내버렸다. 순식간에 두개골에 바람구멍이 나버린 감시자는 뇌수와 검붉은 피를 쏟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옆에 있던 또 다른 감시자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공포에 질린 채 뒷걸음질 쳤다.


"정, 정말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제물에 손도 대지 않았습니다!"


샤비트는 두 감시자의 몸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들의 몸에는 알 수 없는 환상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무녀가 자신의 부재를 틈타 감시자들의 눈을 가리고 탈출했다는 흔적이었다.


빼도 박도 못한 자신의 실수였다. 제물에 손댄 부하를 처벌하러 간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비디아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간 쌓아온 모든 공적이 무너질 것이 뻔했다.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샤비트는 이를 악물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모든 연락망을 총 동원해서 무녀를 찾아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네놈부터 죽여버릴 것이다!"


명령을 받은 감시자는 부리나케 감옥의 꼭대기를 향해 뛰어올라갔다. 관악기의 리드처럼 생긴 무언가를 불자 기묘한 피리 소리가 도시 전역으로 울려 퍼졌다. 소리는 봉화처럼 도시를 깨웠고, 그 피리소리를 따라 샤비트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교 비디아가 아끼는 제물. 세 번이나 손아귀에서 놓쳤다는 것은 곧,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안식교회에서. 시스테나 전선에서.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샤비트의 눈빛은 잔혹하게 빛났다.


'......5년 전의 무녀처럼... 이번에도 그 버르장머리를 뜯어고쳐주마.'


한편, 시즈는 인적 드문 골목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낡은 벽돌과 검은곰팡이로 가득 찬 벽에 박힌 희미한 분홍빛 등불 아래, 그녀는 조심스럽게 숨을 죽였다.


시즈의 의식은 이미 하루 전부터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이능의 순환은 주교가 사라진 뒤로 점차 원래의 흐름을 되찾고 있었기에 그 틈을 타서 어떻게든 탈출해야 했다. 나흘 동안 입에 넣은 것이라곤 정해진 시간마다 억지로 떠먹여 진 물 뿐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몸을 탐하는 추적자들의 더러운 손길조차 찰나의 순간일 뿐, 진짜 두려웠던 것은 감옥 안에 남겨진 억압의 흔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미친 듯이 달려 도시 외곽에 숨은 시즈는 마비된 채 이송되던 순간을 떠올렸다. 지상에서부터 내려가던 구불구불한 지하계단, 거대한 운하, 그리고 죽은 듯한 골목길들을 기억 속에서 더듬었다.


도시의 입구에 가까워졌지만 시즈는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망설였다. 처음 카타디오에 발을 들였을 때 그녀의 이능을 어지럽히던 검은 그림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림자가 또 이능의 흐름을 헤집지 않을까? 어떡하지... 도시로 들어가도 괜찮을까......?'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주술사의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지금, 그림자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주술사의 옷이 자신의 기척을 숨겨주고 있는 듯했다. 적어도 지금은 그림자가 자신을 쫓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긴 시즈는 도시 내부로 조심스럽게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순간,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이이이익————


멀리서부터, 도시 전체를 덮어오는 듯한 진동과 섬뜩할 정도로 통일된 피리의 울림이 퍼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 시즈는 그 소리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엘라리모스에서 추적자들의 은신처에서 들었던 피리소리와 똑같았다. 불길한 징조는 공허처럼 골목길을 타고 퍼졌고, 시즈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쫓아오는구나.'


시즈는 숨을 죽이며 골목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골목을 돌고 또 돌았다. 너덜너덜한 시장터 옆, 무너진 다리 아래, 갈라진 담벼락 뒤를 돌 때마다 도시의 토착 주민들과 지속적으로 마주쳤다. 곳곳에는 피부가 거칠게 벗겨진 혼종과 늘어진 귀를 가진 수인, 몸집이 왜소한 아인 등 이름 모를 종족들이 섞여 어둠 속에 섞여 있었다. 그들은 전혀 다른 종족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경계하지 않았다.


골목을 가로지르는 찰나, 담벼락 뒤에서 날카로운 눈빛이 번뜩였다.


"...거기, 멈춰."


뒤통수에 날아든 쉰 목소리에 시즈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심장이 서늘하게 식었고, 뒤이어 또 다른 그림자들이 골목 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더러워진 겉옷을 걸친 창백한 피부의 군중들은 혼탁한 눈빛과 함께 거칠게 숨을 내쉬는 수인족이었다. 눅눅하게 가라앉은 공기 속에 섞인 숨결은 뿌리 깊은 불신과 적개심을 토해냈다. 낡은 쇠사슬을 끌며 다가오는 그림자들, 주먹을 움켜쥔 손등에 떠오른 핏줄, 움켜쥔 돌멩이마다 깃든 묵은 분노.


시즈는 점점 포위되어 가고 있었다. 이들은 낯선 이방인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래전 자신들을 짓밟고 버린 이들의 잔영을 보고 있었다.


"껍데기를 뒤집어써도... 지상의 냄새를 감출 수는 없지."


군중 사이에서 누군가 낮게 중얼거리자 금세 다른 이들이 그 뒤를 따랐다. 조롱, 경멸, 무언의 폭력이 서서히 틈을 메워갔다. 시즈는 조심스럽게 한 발 물러섰지만 골목은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달아날 틈 앞으로는 서슬 퍼런 눈빛들이 버티고 있었다.


잠시 후, 누군가가 숨을 죽인 채 중얼거렸다.


"잡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움직임이 터졌다. 가장 가까운 군중이 돌을 던지자, 파공음을 가르며 날아든 날카로운 돌멩이가 시즈의 손목을 스치듯 스쳐 지나갔다. 짧은 아픔이 스며들었지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곳은 대화로 풀릴 곳이 아니었다. 오로지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숨을 깊게 들이쉰 시즈의 왼쪽 가면 아래로 희미하게 이능의 흐름이 피어올랐다. 바닥에 깔린 어둠이 기묘하게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골목 전체가 꿈틀거렸다.


군중들의 눈은 환상으로 뒤덮였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로와 골목, 그리고 그림자들로 인해 혼탁한 눈빛들이 혼란에 휩싸였다. 그 틈에 시즈는 몸을 웅크리며 골목의 빈 틈을 향해 달렸다. 달아나는 뒤편으로 어둠이 흔들렸고, 누군가 분노를 터뜨렸다.


"거기야! 그쪽이다!"


"아니다! 이쪽으로 갔어!"


쉰 고함들이 골목을 뒤흔들었지만 시즈는 곁눈질도 하지 않고 달렸다. 무너진 담장과 벗겨진 벽돌 사이를 비집고 악취 나는 하수구 통로를 따라 몸을 낮췄다.


숨 가쁜 질주 끝에, 시즈는 폐허처럼 무너진 건물의 틈새로 몸을 밀어 넣었다. 벽돌 틈으로 스며드는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몸을 구겨 넣을 수 있는 좁은 틈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숨을 죽였다. 멍한 숨결 속, 가슴 어딘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굶주린 눈빛. 분노와 공포로 얼룩진 손들. 결국... 어디든 다를 게 없는 걸까.


시즈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슬퍼할 여유 따위는 없었고,, 지금은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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