꺾이지 않는 푸른 뇌격
바깥의 소란이 잠잠해졌다. 조용히 일어나 틈을 빠져나온 시즈가 주변을 살피기 위해 폐건물 밖으로 나온 그 순간—
"저쪽! 저쪽을 찾아봐!"
낮게 깔린 목소리와 함께 무거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깨진 벽돌을 짓밟으며 다가오는 거친 숨소리들이 틈새를 메워갔다. 시즈는 황급히 틈으로 다시 들어가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죽였으나 그곳에서 더 이상 숨어있을 수 없었다. 낡은 천장이 덜컥 흔들렸고, 누군가 틈새 사이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잡았다!"
두건에 손길이 닿으려는 찰나, 시즈는 본능처럼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키잉——
"...뭐 하는—"
콰아앙————
눈부신 섬광과 동시에 고막을 울리는 폭발이 터졌다. 충격파가 좁은 골목을 가로지르자 먼지와 파편, 비명과 돌부스러기가 사방으로 튀어 오르면서 골목 전체가 단숨에 뒤집혔다. 폐건물 위에서 시즈를 잡으려던 무리들은 폭발에 휘말려 그대로 나가떨어졌고, 그 틈을 타 시즈는 또다시 달렸다. 뒤에서는 뒤엉킨 고함과 쓰러지는 소리, 달려드는 발소리가 이어졌다. 그 소란 너머로부터 피리 소리보다도 불길한 기운이 서서히 다가왔다.
어느새 도착한 샤비트가 낡아빠진 건물과 골목을 가로지르는 높은 다리 위에 서 있었다. 뒤로는 그림자처럼 늘어선 근위병 수십 명이 함께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군세를 본 군중들은 더는 들끓지 않았다. 위압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움직임으로 서서히 시즈로부터 물러나기 시작했다.
"잘도 잔재주를 부려 빠져나왔더군."
샤비트는 시즈를 내려다보며 냉소를 흘렸다. 간신히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는 골목을 메운 적막 속에서 망치처럼 울려 퍼졌다.
"몇 번이고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널 보자니 진절머리가 나. 정말이지, 누군가를 진심으로 죽여버리고 싶다는 감정이 드는 건 처음이야. 주교님께는 실례지만, 네년을 반쯤 죽여놔야 내 속이 가라앉을 것 같군."
샤비트는 뒤에 줄지어 있는 근위병들을 향해 손짓했다. 곧이어 준비되어 있던 수십의 대궁들이 일제히 시즈를 겨냥했다. 번뜩이는 시위가 줄지어 팽팽해지더니 짧은 구령과 함께 굵은 화살들이 날아들었다.
"쏴라!"
쐐액——
공기를 가르며 내리 꽂히는 화살은 단순한 공격이 아닌 퇴로를 끊는 듯한 정밀한 위협이었다. 발밑에서 튀어 오른 돌조각들이 시즈의 다리를 스치듯 흩날렸고, 좌우는 순식간에 화살의 비로 막혔다. 시즈는 숨을 몰아쉬며 곧장 방향을 틀었다. 샤비트가 처음 자신을 내려다보던 다리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대궁의 궤적은 의도적으로 다리 쪽만 비워두고 있었고, 그것은 곧 샤비트가 이 모든 흐름을 미리 짜둔 것이란 뜻이었다.
샤비트는 다리를 향해 달려오는 시즈를 보며 근위대들에게 말했다.
"무녀는 내 손으로 직접 굴복시킬 것이다. 너희들은 물러나라."
시즈의 발끝이 마지막 계단을 딛는 순간, 샤비트도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다리 중앙을 향해 무심히, 그러나 우아하리만치 느린 걸음으로 움직였다. 이제 두 사람의 거리는 30걸음도 채 되지 않았다.
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근위병도, 군중도, 벌레 한 마리조차. 지금 이곳은 오로지 굴복시키려는 자와 살아남으려는 자, 둘만을 위한 단절된 무대였다.
"......역겹군. 참으로 역겨워."
샤비트는 시즈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시선은 단순한 적의가 아니었다. 혐오와 더불어 오래도록 곪아 있는 듯한 멸시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대지의 심장은 진작에 사라졌는데, 아직도 고귀한 눈을 가진 척 아둔한 버러지들을 구원하는 흉내는 계속되는구나. 바른 길? 세상의 질서? 잿더미 위에서 너희의 가르침이 대체 무슨 소용이지?"
시즈는 눈썹을 찌푸렸다. 가슴 언저리에서 분노가 일렁였지만 감정을 터뜨리진 않았다.
"우린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 길을 밝히지 않아. 무너져 가는 세상에서도 마지막까지 걸으려는 이들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데 너희는... 그 빛을 볼 때마다 어떻게든 꺼뜨리려 들었어. 남은 것마저 꺾고, 버티는 것조차 모욕했어. 그렇게까지 해서...... 뭘 얻고 싶었던 거야? 왜 그렇게까지 무녀를 증오하는 거야!?"
시즈의 말에 샤비트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의 뇌리에 5년 전, 시스테나 교회의 진창 속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한 무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을 지키겠다며 자신을 경멸하던 그 눈빛. 샤비트는 그 위선이 토악질이 날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그래, 그 입만 산 소리. 5년 전에 내가 직접 짓밟았던 무녀도 똑같이 지껄이더군. 자기희생? 올곧은 뜻? 개소리하지 마라. 너희 무녀들의 말에 기대어 버텼던 자들에게 남은 것은 결국 문드러진 유해와 바보 같은 기도뿐이었다. 그 따위 쓸모없는 신념을 믿었다가 모든 걸 잃은 것이 누구인데!!"
샤비트는 시즈를 향해 천천히 다가들었다. 멸시로 가득했던 눈빛은 어느덧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한 자의 냉소로 변해 있었다.
"구원이라는 헛소리 집어치워라. 그날부로 난 깨달았다. 끝까지 고개를 들고 순진하게 웃는 것들일수록 더 뿌리째 꺾어 짓밟아야 한다는 것을. 그러니 네년은... 특별히 더 가혹하게 유린해 주마."
샤비트는 말이 끝나는 동시에 움직였다. 허공에 손을 뻗어 그린 여섯 궤도가 동시에 회전하며 어둠의 결을 새겼고, 그 결에서 피어오른 문양에서는 마치 촉수 같은 그림자들이 기어 나와 맹렬하게 시즈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결계를 깨부수기 위해 만들어진 지독한 주문이었다.
시즈는 곧장 방어막을 펼쳤다. 맹렬하게 들이친 주문이 방어막을 찢어발기려 들었지만 그 위력이 줄어들자마자 곧바로 반격을 시작했다. 손끝을 타고 흘러든 전하가 순간적으로 형체를 갖췄고, 시즈는 샤비트를 향해 지체 없이 뇌격을 내던졌다.
"——!!"
샤비트는 본능적으로 허리를 틀었다. 소리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온 뇌격은 허공을 가르며 비껴갔지만 뒤에 있던 근위병 두 명을 단번에 꿰뚫었다. 그들은 반응조차 제대로 못한 채 감전된 인형처럼 몸을 떨며 쓰러졌다.
"제법이군, 무녀."
샤비트는 다리 바닥을 검게 물들이며 시즈를 몰아넣기 시작했다. 한 걸음 씩 걸을 때마다 정제된 검은 액체의 파동이 그의 손에서 파문을 일으켰고, 다섯 번째 발걸음을 딛는 순간 검은 파동은 순식간에 원형으로 퍼지면서 시즈의 발목을 덮쳐왔다. 그러나 시즈는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은 파동에 날카로운 뇌격을 쏘아 하전 시켰고, 수십 개의 작은 벼락이 물결을 타고 되려 샤비트를 향해 날아갔다.
예기치 못한 반격에 피할 틈조차 없던 샤비트는 팔을 들어 막았다. 기름막처럼 번들거리는 검은 막이 팔 위로 덧씌워지자 벼락은 그 껍질을 완전히 뚫어내지 못한 채 사라졌다. 시즈는 그 틈에 벌저니 미세한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스무 걸음도 되지 않는 거리, 시즈는 허리를 낮춰 샤비트의 옆구리 아래의 허리띠 보호대 틈새로 이능의 파동을 날려 보냈다.
퍼억——
묵직한 파동이 박히는 소리와 함께 샤비트의 몸이 반보 밀려났다. 로브 자락이 뜯어지면서 피가 공중에 튀었다. 숨이 한순간 끊겼고, 무릎이 휘청였다. 그러나 샤비트는 쓰러지지 않았다. 자신의 피를 본 그의 눈빛이 짧게 일렁이더니 다시금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살아났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싸울 맛이 나지."
샤비트가 웃으며 내디딘 발끝에서 검은 그림자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발끝에서 손끝으로 이어진 형상이 뭉쳐지더니 어둠의 창이 만들어졌다. 샤비트는 즉시 찌르듯 그것을 내지르며 시즈의 방어막을 정통으로 강타했다. 그 충격에 방어막 표면에서 맹렬한 파열음이 터졌음에도 시즈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마르프록스 산에서 마주했던 데미안의 불꽃에 비하면 지금의 공격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즈는 왼손을 들어 올리며 다시금 뇌격을 뿜어냈다. 손목을 타고 움직이는 이능의 흐름을 따라 고주파처럼 날아든 전하가 다리 위를 통째로 뒤덮었다. 샤비트는 급히 창을 변형시켜 장막을 펼쳤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시즈가 쏜살같이 장막을 향해 뛰어들면서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졌고, 칼날 같은 마력이 일그러져있던 손끝이 그대로 샤비트의 장막을 가격했다. 마치 데미안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무슨——"
퍼어어억————
이능으로 빚어진 칼날은 그대로 샤비트의 심복을 꿰뚫었다. 몸 안쪽에서 터져 나온 폭발음과 함께 샤비트는 곧장 두어 걸음을 물러섰다. 동그란 구멍이 생겨난 왼쪽 가슴 아래의 보호대에 검붉은 피가 폭포처럼 앞뒤로 흘러내렸다.
샤비트는 무릎을 꿇었다. 한 손으로 땅을 짚으며, 식은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토해냈다.
"끄윽...... 네년이... 감히 무녀 따위가......!"
이빨을 악다물고 다시 일어나려는 순간, 그의 뒤편에서 또 다른 불쾌한 기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샤비트의 표정이 뒤틀리듯이 일그러졌다. 시즈 역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연이은 전투와 이능의 사용으로 누적된 피로가 어깨를 짓눌렀지만 그녀는 무너지지 않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어이쿠,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짙은 남빛 로브를 휘날리며 느릿하게 다가온 것은 나우레스였다. 나우레스의 등장에 샤비트의 근위병들은 말없이 길을 열었고, 그 뒤로 몇 겹의 그림자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샤비트와 같은 계급의 사도 둘, 그리고 나우레스를 따르는 12명의 근위병들이었다.
"바람구멍 난 모습이 보기 좋아 보이는구만. '무녀 사냥꾼'이라 불리던 자네가 그만한 중상을 입을 정도라면 꽤 흥미로운 싸움이었겠지?"
피웅덩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 나우레스는 쓰러진 샤비트를 내려다보며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의 말끝에는 숨기지 못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네놈답다고 해야 할까? 능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본인을 맹신하는 그 오만한 버릇을 고치질 못해서 꼭 뒷감당을 못해. 내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지. 주교님께서야 나름 기대하신 모양이지만... 우리 입장에선 뭐, 딱히 아쉬울 것도 없지 않겠나?"
작게 혀를 차는 나우레스의 표정은 어딘가 안타깝다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눈빛은 전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몸을 옆으로 비껴서며 손짓 하나로 샤비트의 근위병 몇을 불렀다.
"주인 잘못 만나 고생들 했지. 얼른 데려가라. 그때까지 숨이 붙어 있으면 기워보기나 하고. 아니면... 알아서 처리하고."
근위병들은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샤비트를 부축했다. 그들의 손끝이 닿으면서 샤비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지만 더는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 나우레스는 더 이상 샤비트를 쳐다보지 않았다. 흥미는 이미 떠난 지 오래였고, 그의 시선은 곧장 시즈에게로 향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날 불꽃을 터뜨리던 놈이 워낙 요란해서 자넨 별로 눈에 안 띄었어. 소문도 많이 들었지만 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주의여서 말이야. 그런데 이번엔 확실히 알겠더군. 그 힘, 샤비트가 당한 것도 무리가 아니지."
나우레스의 뒤에 선 사도들이 조용히 움직였다. 두 사도는 전열을 정비하는 근위대와 함께 반원을 그리듯 자리를 넓혀갔다. 그 모습을 흘끗 확인한 나우레스는 다시 시즈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자네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네. 괜히 혼자 덤볐다가 저 친구처럼 바람구멍이 생기는 건 질색이거든. 그래서 준비를 좀 했지. 근위병 열두 명에 사도 둘, 그리고 나까지. 조금 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뭐, 신중해서 나쁠 건 없잖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우레스의 손끝이 일렁였다. 어둠 속에서 촉수처럼 꿈틀거리던 아우라들이 형체를 이루며 서서히 솟아올랐다. 사도들이 동시에 호흡을 가다듬었고, 근위대는 무언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공격 자세를 취했다.
"한 번 확인해 보자고. 과연, 자네 혼자서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