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의 유혹 (8)

붕괴

by 이샤라

카타디오 병동의 한쪽, 깊숙한 회색 병실.


샤비트는 천으로 덮인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왼쪽 가슴 아래를 꿰뚫은 마력의 상흔은 살갗 아래에서 여전히 경련하듯 떨려왔다. 주위로는 새카만 혈관이 엉겨 붙은 채 검붉은 피를 울컥울컥 토해냈고, 숨은 간헐적으로 끊겼다 이어졌다. 의사는 그의 상처를 응급으로 봉합한 뒤 급히 진통제를 가지러 자리를 비웠다. 방 안은 침묵과 더불어 무거운 숨소리만이 눅눅하게 깔려 있었다.


샤비트는 눈을 부릅뜬 채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의 고통 따위는 머릿속을 가득 채운 기억 앞에선 희미한 배경음에 불과했다.


'그 오만한 버릇을 고치질 못해서 꼭 뒷감당을 못해. 내 언젠가는 이럴 줄 알았지.'


나우레스. 그가 보였던 눈빛, 비웃음과 싸구려 연민, 그리고 확신에 찬 경멸. 뇌리를 후벼 파듯 맴도는 그 모든 것들이 상처의 통증보다 지독했다. 능력도 없으면서 권모술수만으로 위에 앉아 있던 교활한 뒷방 늙은이가 끝내 비웃음만 남긴 채 등을 돌리던 장면이 떠올랐다.


"감히... 나를 비웃어......?"


그 순간, 병실의 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크라인이 들어왔다. 검은 후드를 느슨히 걸친 채 작게 웃으며 다가오는 모습에 샤비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닥치고 꺼져라."


샤비트는 거친 숨소리를 몰아 쉬며 매몰차게 쏘아붙였다. 크라인은 그의 행동이 익숙한 듯이 미동도 하지 않았고, 대신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병을 들어 보이며 중얼거렸다.


"의사 양반이 치료 도구를 가지러 가면서 제게 진통제를 맡기더군요. 물에 타면 조금은 편안해진다면서 말이죠. 드시겠습니까?"


샤비트는 크라인을 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크라인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작은 주발에 물을 부은 뒤 진통제 병의 액을 천천히 따라 넣었다. 적갈색의 액체가 물 위에 둥둥 떠올랐다가 서서히 섞여 들었고, 진통제 특유의 고약한 냄새가 병실 안을 맴돌았다.


크라인이 진통제가 담긴 주발을 입가로 가져가자, 한순간 망설이던 샤비트는 결국 고개를 기울여 마시기 시작했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싸한 감각과 함께 고통은 점점 무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손끝에서부터 무언가가 이상해졌다.


마치 온몸이 진흙에 빠지는 것처럼 힘이 빠져나갔다. 혀끝이 마비되고, 숨결은 걸쭉해졌다.


"...네놈... 대체... 이게 무슨......?"


샤비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크라인을 바라보았다. 불신과 공포로 얼룩져 있는 그 시선에 크라인은 입꼬리가 찢어질 듯이 웃고 있었다.


"뭐긴요. 그토록 경멸하던 버러지에게 가장 비참하게 죽어가는 중이지. 이 개자식아."


그 말에 샤비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크라인은 가시를 꾹꾹 눌러 담은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꼴이 아주 좋아. 사람을 짐승 부리듯 다루던 그 잘난 사도께서 뒤질 때가 되니 말 한마디 똑바로 못하고 벌벌 떠는 모습이라니. 왜? 나 같은 밑바닥 쓰레기한테 당하니까 뼛속까지 억울한가?"


샤비트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이미 사지는 말을 듣지 않았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고, 시야는 점점 어둠에 잠겼다.


그를 내려다보던 크라인의 눈에, 몇 시간 전의 기억이 스쳤다.


문드러진 오른손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핏물이 굳으며 까맣게 타들어간 뼈 위로 끈적한 진물이 흘렀다. 오른손을 감싼 채 의무대에 들이닥쳐 서랍과 진열장을 모두 뒤졌지만 손을 되돌릴 약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팔뚝까지 썩어 들어가며 몸을 잠식해 갔다.


"으아아아아악! 빌어먹을! 개 같은 새끼가——!!"


분노와 고통을 뒤섞어 탁자를 내리치던 그때, 조용히 열린 문틈 사이로 누군가가 들어섰다. 남색의 로브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크라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주저앉았지만 로브의 주인은 나우레스였다. 그는 문드러진 크라인의 손을 내려다보며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쯧쯧... 더는 못쓰겠구만. 제물에 손 한번 댔다고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무자비하군 그래."


크라인은 위축된 채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나우레스는 예상과 달리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참고만 있을 셈인가? 그 정도 모욕을 받고도?"


침묵이 흘렀다. 나우레스는 한심하다는 바라보고 뒤돌아섰다.


"글렀군. 딱 패배자의 모습이야. 반항도 못하고, 평생 그렇게 살겠지."


"그럼 뭘 어쩌란 말입니까!"


크라인이 울컥하며 외치자 나우레스는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돌며 말했다.


"간단하지. 죽이면 그만 아닌가?"


나우레스는 품 안에서 얇은 플라스크 하나를 꺼냈다. 검푸른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낸 그는 뚜껑을 열어 크라인의 문드러진 손 위에 몇 방울 떨어뜨렸다. 고통이 멎는 동시에 손가락이 검은빛으로 물들며 천천히 형태를 되찾기 시작했다. 비록 색은 불길했으나 움직임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이럴 수가... 손이... 손이 다시......!"


경이로운 표정으로 손을 쥐었다 피던 크라인은 나우레스를 향해 몸을 숙여 절을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나우레스는 웃으면서 크라인에게 적갈색 액체가 담긴 병을 하나 건넸다.


"맹독이 들은 병이다. 조만간 기회가 올 것이니,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테지."


샤비트는 헛숨을 몰아쉬며 크라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떨리는 시선이 그 오른손을 쫓았다. 검게 물들었으나 완전한 인간의 형태를 한 그 손을 보는 순간, 그제야 모든 것을 깨달았다.


"감히... 네놈 따위가......!"


그러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왈칵 쏟아낸 핏덩이가 크라인의 손등에 튀었다. 곧이어 핏줄이 꿈틀대며 불어 터지기 시작했고, 호흡은 마치 물속에서 질식하는 듯 끊겼다. 목이 비틀리고 입이 벌어졌지만 더 이상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크라인의 멱살을 붙잡았지만 그 마저도 얼마못가 힘 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니 처음부터 잘했어야지, 안 그래? 곱게 뒤져버려."


그 말과 함께, 샤비트의 온몸이 경직되었다. 거칠게 솟았던 갈색 핏줄이 피부 밑에서 터져나가더니 그대로 심장이 멎었다. 샤비트는 눈을 뜬 채 죽었다. 자신이 가장 멸시했던 자에게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크라인은 피로 번들거리는 자신의 오른손을 천천히 닦아냈다. 분노도, 후회도 사라진 표정 속에는 오직 지난날의 치욕이 사라졌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병실을 나서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 너머로 남아 있던 시체는 더는 사도라 불릴 수도 없는 존재였다.


다리의 바닥이 일그러졌다. 허공을 가르던 뇌격이 굽이쳐 내리 꽂히면서 또 하나의 근위병이 무참히 튕겨 나갔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난간 밖으로 떨어져 내동댕이쳐진 근위병의 몸은 깨진 항아리처럼 갑주째 찢겨져 산산조각 났고, 그 끔찍한 광경을 마주한 다른 근위병들이 괴성을 지르며 시즈를 향해 달려들었다. 동료의 몰락에 주저함은커녕 오히려 더욱 거친 분노를 칼끝에 모았다.


그 틈을 노린 사도들의 검은 아우라가 요동쳤다. 촉수처럼 형체를 갖춘 아우라는 다리의 난간을 타고 시즈를 향해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기세는 가늘고도 집요하게 옆구리와 목덜미, 발치까지 동시에 노렸지만 시즈는 그것들이 닿기 직전에 방어막을 펼쳐 흘려보냈다. 한 순간만 늦었어도 그녀의 몸은 벌집처럼 뚫렸을 것이다. 시즈는 공격을 무마시키자마자 곧바로 반격을 가했다. 다리 위를 타고 뻗어나간 뇌격이 연달아 번쩍이면서 달려들던 근위병들은 순식간에 감전당한 듯이 튀겨졌다. 나우레스와 사도들은 눈빛을 바꾸며 공격을 강화했지만 시즈는 연이어 벼락을 떨어뜨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소멸시켰다.


수적으로 불리했음에도 시즈의 힘은 오히려 전장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격렬히 내리 꽂히는 벼락 아래, 동료들이 쓰러지는 것을 본 근위병들은 마침내 진격을 망설이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채 한 걸음조차 쉽게 떼지 못했다. 점점 맹렬해져 가는 벼락은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연속해 내리쳤고, 푸른 섬광은 어느새 나우레스와 사도들이 서 있는 다리 위까지 집요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쇠망치처럼 낙하하는 뇌격 앞에서 그들은 필사적으로 장막을 펼쳤다.


두 사도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벼락을 받아내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했다. 나우레스 또한 이를 악물고 벼락을 정면에서 견디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 속엔 당혹보다 오히려 뜨거운 탄성이 담겨 있었다.


"과연, 강대한 고룡의 힘이구나......! 이토록 강대한 마력을 휘두르는 무녀는 여지껏 본 적이 없다!"


그 순간, 멀리 어둠에 잠긴 기둥 너머에서 날아든 무언가가 공기를 가르며 다리를 가로질렀다.


키이잉——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대궁화살이 시즈의 오른쪽 어깨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피는 튀지 않았지만 어깨 위 두건에 매달린 분홍빛 광물이 깨지듯 금이 갔다. 작게 진동하는 그 보석에서 미세한 균열이 파문처럼 번져나가더니 공기의 결이 뒤바뀌었다.


주위를 떠돌던 그림자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지금껏 시즈를 비켜가던 기척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더니, 마치 안개 너머에서 정체를 확인한 듯 뚜렷하게 그녀를 향해 시선을 꽂았다. 그 소름 끼치는 변화에 시즈는 심장 가까운 어딘가에서 서늘한 감각이 일었다.


'......설마, 그 돌이!?'


스스로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몸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 광물이 지금까지 그림자들의 인식을 흘려보내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단지 장식인 줄로만 알았던 그것이 시즈를 위협으로부터 숨겨주고 있었던 것이다. 경계가 깨지면서 그림자 하나가 무언의 틈을 파고들듯 시즈의 몸속으로 스며들면서 이능의 흐름이 끊기기 시작했다. 빈틈은 길지 않았지만 사도들에게는 충분했다. 매끄럽고 날카로운 궤적이 허공에 그려졌고, 그 중심에서 검은 창 하나가 뽑히듯 솟구쳤다. 시즈는 눈으로는 반응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창이 그녀의 왼팔을 스치듯 지나가자 피가 흘러내렸고, 관절 뒤로 퍼지는 무력감이 손끝까지 번져가면서 응축되던 벼락의 결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방어막도 끝내 펼치지 못했다.


이어진 사도들의 아우라가 발밑에서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리의 틈 사이로 솟은 검은손이 촉수처럼 시즈의 발목을 휘감았고, 곧바로 다른 사도가 불러낸 그림자 줄기가 허리 언저리를 감고 죄어들었다. 균형이 무너졌다. 무릎이 꺾이며 등이 굽었다. 손끝에서 마지막 잔광이 깜빡이다 꺼지면서 벼락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근위병 하나가 시즈를 향해 돌진하더니 주저 없이 그녀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퍼어억——


"—커흑.....!"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시즈의 입에서 신내 나는 위액이 흘러나왔다. 곧바로 두 명의 근위병이 양팔을 붙잡았고, 불붙은 살 냄새와 파괴된 다리 위의 전장 속에서 시즈의 맥없이 바닥에 질질 끌리며 도시 밖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탈출한 지 한나절도 채 지나지 않았다.



감옥에 도착한 근위병들은 아무렇지 않게 시즈를 철창 안으로 내동댕이쳤다. 무겁게 돌바닥에 부딪힌 시즈의 몸은 반쯤 구겨진 채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결국 다시 돌아왔군."


나우레스가 천천히 시즈 앞에 다가서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조용히 숨어 있지 그랬나. 그 난리를 피워서 이 모양 이 꼴이라니, 주교께서 필히 노하시겠어."


시즈는 대답 대신 엎어진 채로 고개를 들며 그를 노려보았다. 노골적인 경멸의 감정이 드러나자 나우레스는 그 모습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


"눈빛 한번 살벌하구만. 하지만 그 몸뚱이로 뭘 어쩌겠다는 건가. 꺼림칙한 주교님의 그림자 하나가 자네 안에서 똬리까지 틀고 있는 마당에 이능이 제대로 흐르긴 할까?"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시즈의 왼쪽 얼굴을 가린 가면에서 격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아————


형체 없는 폭풍처럼 마력의 소용돌이가 감옥 안을 휘감았다. 섬광이 튀면서 벽이 진동했다.


"뭐냐, 이건! 제압해! 당장 제압해라!!"


나우레스가 뒷걸음질 치며 외치자, 사도들이 일제히 손을 뻗어 주술의 고리를 형성했다. 검은 줄기들이 시즈를 제압하려는 듯 감옥 바닥을 뒤덮었지만 시즈의 마력은 가소롭다는 듯이 그 위를 찢듯이 솟구쳤다. 폭주에 가까운 전류가 감옥 내를 휘감으면서 가까이 다가가려던 근위대들은 벼락에 맞은 듯 몸이 튕겨져 나갔다. 하나는 허공에서 검게 타올랐고, 다른 하나는 철창에 부딪혀 고꾸라졌다. 누군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나뒹굴었다.


"막을... 막을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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