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요새
사도들조차 혼신의 힘을 다해 기운을 밀어붙이며 가까스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그때, 또 한 번 시즈의 몸 안에 들어가 있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순식간에 이능의 흐름이 틀어지면서 방금까지 쏟아져 나오던 기세가 급격히 어그러지자 네 명의 근위병들이 동시에 달려들어 시즈의 사지를 붙잡았다.
"놔!! 이거 놔——!!"
시즈는 사지를 붙잡힌 와중에도 격렬히 몸부림쳤다. 다시 한번 왼쪽 눈에서 뇌광이 뿜어져 나와 근위병들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기 직전, 나우레스와 사도들이 시즈의 귀와 입을 향해 주술로 만들어낸 시꺼먼 줄기를 난폭하게 쑤셔 넣었다. 의식을 꿰뚫는 날것의 기운이 억지로 흘러들어왔다. 정신을 찢는 강제적인 침식은 마치 안과 밖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칼날처럼 시즈의 내면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귀를 찢는 비명이 감옥 안을 뒤흔들었다. 의식이 깊은 어둠 속으로 추락해 갔다. 눈앞의 세계가 흔들리고 마지막 남은 저항마저 산산이 부서진 시즈는 한 줄기 힘도 남지 않은 채 정신을 잃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감옥 안은 다시 정적이 내려앉았지만 나우레스는 쉽게 숨을 고르지 못했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고, 어깨는 가쁘게 들썩였다.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시즈를 노려보았다.
"......독한 년."
이를 악문 짧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시즈는 눈을 뜬 채 쓰러져 있었다. 허공을 멍하니 응시하는 듯한 시선은 생기가 완전히 가신 듯했으나 그럼에도 나우레스는 등줄기를 타고 스치는 오싹한 감각을 지울 수 없었다. 확실히 기절한 것이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주저 없이 군홧발로 시즈의 복부를 발로 짓밟았다. 몸이 가볍게 들썩였으나 저항도, 미동도 없었다. 그제서야 나우레스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발을 거뒀다.
잠시 후, 감옥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추적자 셋이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별다른 말 없이 쓰러진 근위병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더미처럼 검게 그을린 몸뚱이들이 하나씩 감옥 밖으로 옮겨졌고, 공기 속엔 비릿한 피와 타버린 살점의 냄새가 역하게 뒤섞였다.
철창 앞에 멈춰 선 나우레스는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누워 있는 시즈를 다시금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벼락으로 감옥을 뒤흔들던 압도적인 모습이 떠오르자 나우레스는 지금 이 침묵이 불안했다.
"크라인!"
나우레스가 외침에 크라인이 그림자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대답은 없었지만 나우레스는 그의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이 감옥의 감시는 네가 맡아라. 죽이지 않는 선에서 무슨 짓을 벌여도 상관 않겠다만, 사지를 온전히 남겨두는 선까지만은 허락하지."
"알겠습니다."
크라인의 대답을 끝으로, 나우레스는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고 철창을 등진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를 따라 사도 둘도 말없이 도시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감옥 안은 다시 음울한 적막만이 남았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크라인은 마침내 철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함께 남아있던 추적자들 셋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눈빛이 변해 있었다. 공허하고 무표정하던 얼굴 위로 알 수 없는 환희와 뒤틀린 욕망의 그림자가 짙게 어른거렸다. 네 사람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지도 않고, 자연스럽게 시즈가 누워 있는 철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옥문은 조용히 닫혔다.
수백 킬로미터를 가로지른 전장은 주검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파도의 악마들이 아닌 안개의 땅에서 같은 피를 나눈 자들끼리 서로를 찢고 밟아 으깬 흔적들로 가득했다.
황폐한 전장을 따라 걷는 동안 아로스는 낯익은 풍경과도 같은 잔해들 곁을 며칠에 걸쳐 지나쳤다. 바퀴가 찌그러진 전차와 동체에 금이 간 포탑, 무릎 아래가 잘린 채 철제 관절을 드러낸 골렘의 잔해들이 끝없이 널려 있었다. 이따금씩 바닥 아래서, 혹은 부서진 골조 너머에서 병기 하나가 갑작스레 경련하며 움직였다. 폭약을 담았던 동체가 불완전하게 재점화되며 불쑥 몸을 일으키다 그대로 땅에 처박히면서 짧은소리와 진동이 땅 아래를 울렸다. 죽은 자들이 남긴 병기들은 아직 온전히 식지 않은 채 죽음을 모방하듯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폐허 속을 걸어가던 시야 너머로 산맥의 윤곽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전장의 폐허 너머로 간신히 모습을 드러낸 망루 하나가 뿌연 공기 위에 솟아 있었다. 산맥 사이로 돌기처럼 튀어나온 첨탑 구조, 바람에 흔들리는 외벽, 무너질 듯 위태로운 골조는 단숨에 아로스가 다다르려던 장소임을 알려주었다.
철의 요새 아트마. 그러나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의 감각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기척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생명의 냄새, 피의 흔적, 적의 시선. 그 어느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로스는 걸음을 멈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공기조차 숨을 죽인 듯했다. 죽음의 땅조차 이곳보다는 다른 의미로 더 생기가 넘칠 것이다. 꺾인 듯, 소리 없이 삭아가는 땅. 이곳은 살아 있는 것의 기척이 증발한, 문자 그대로 무의 영토였다.
한동안 발을 떼지 못한 아로스는 조심스레 망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풀 한 포기 없이 갈라진 대지 위로 작은 먼지가 들썩였고, 곧이어 폐허로 둘러싸인 구조물에 좀 더 가까워지자 그늘 아래로 두 개의 형체가 보였다. 하나는 이미 싸늘히 식어 있는 인간의 시신, 나머지 하나는 여우를 닮은 귀를 지닌 여성 수인이었다. 그녀는 망루 벽에 등을 기대어 두 무릎을 세운 채 팔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옷자락은 그을리고 찢겨 있었고 손가락은 힘없이 양 팔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흙먼지와 화약가루에 절어 있는 온몸에는 온전한 피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화상이 퍼져 있었다.
아로스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멈춰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혹은 본능적인 공포였는지 수인이 돌연 고개를 치켜들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악——!!"
갑작스러운 비명과 함께 수인은 몸을 비틀며 발작하듯 벽 쪽으로 밀려났다. 갈라진 손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온몸을 떠는 모습에 아로스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낮게 입을 열었다.
"비명 지를 힘이 있다면 들어라. 난 널 해치러 온 게 아니야."
그 목소리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다만 도망칠 곳 없는 막다른 길에서 상대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제시하듯 단호했다. 수인이 발작을 멈추고 거친 숨을 내뱉으며 응시하자, 아로스는 더 이상의 불필요한 대화 대신 시신을 피해 조심스럽게 자세를 낮췄다.
아로스는 수인의 화상 입은 팔을 눈으로 훑은 뒤, 허리춤에서 노아에게 받았던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깨끗한 천에 연고를 덜어내어 짓무른 상처 위를 덮자 수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아로스는 그 떨림에 개의치 않고 묵묵히 처치를 마친 뒤 다시 물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로스가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지만 수인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을 흐느끼듯 숨을 토해낸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재앙이...... 거대한...... 검은 무언가가 요새를...... 그냥 삼켜버렸어......"
시선은 허공을 맴돌았고, 목소리는 마치 타들어 가는 목에서 억지로 쥐어짜 내는 듯 갈라져 있었다.
"다 죽었어...... 아무도 안 남았어...... 심지어...... 신조차도.......!"
공포로 굳은 입술과 밀려드는 울음이 수인의 말끝을 붙잡아 끌어내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뻗으려다 힘없이 떨어뜨리면서 결국 몸을 웅크린 채 그대로 떨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풀리지 않은 눈빛은 다시 흔들리고 있었고, 방금 전 쥐어짠 말은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힌 족쇄가 된 듯했다.
아로스는 조용히 화상 치료제가 남은 병을 꺼내 수인의 옆 바닥에 내려놓은 뒤 말없이 산맥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산맥 아래에 버티고 선 거대한 성문과 마주했다. 한때는 견고한 산의 일부였을 거대한 암벽을 통째로 깎아 만든 성문은 이제 그 위용을 잃은 채 안쪽으로 처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경첩째 뜯겨나간 자리에는 검은 균열이 거미줄처럼 번져 있었고, 부서진 문 너머로 보이는 어둠은 마치 거대한 짐승의 목구멍 같았다.
성문 안으로 첫발을 내딛는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완전한 파괴의 풍경이었다. 요새 내부는 밖에서 본 것 이상으로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거대한 돔이었을 천장에는 구멍이 뚫려 산맥의 일부를 드러냈고, 사방을 밝혔을 거대한 화로들은 모두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부러진 병기와 박살 난 갑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발 디딜 틈조차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기이한 점은 따로 있었다. 이토록 처절한 파괴의 흔적 속에서도 시체는커녕 핏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해변처럼 전투의 잔해만 남았을 뿐, 그곳에 있었어야 할 생명의 흔적은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시체가 썩는 냄새나 피비린내 대신 모든 것이 침식되어 사라지는 듯한 기묘한 냄새만이 감돌았다. 무너진 식당으로 보이는 곳의 테이블 위에는 음식이 담겼을 법한 접시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지만 그 안의 음식은 모두 한 줌의 검은 먼지로 변해 있었다. 무심코 만진 나무 의자에 손을 얹자 겉보기엔 멀쩡했던 의자는 수분이 모두 빠져나간 것처럼 소리 없이 바스러져 가루가 되어버렸다.
그 섬뜩한 광경 속에서 아로스는 오르드가 남겼던 불길한 침묵의 의미를 비로소 실감했다. 아트마에 닥친 재앙은 단순한 전쟁의 패배가 아니었다. 이곳을 집어삼킨 것은 그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무언가였다.
아로스는 부서진 성문 안쪽으로 더 깊이 발을 들였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아래에서 바스러지는 금속 파편 소리가 유일한 소음이었지만 그 소리마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메아리가 없었다. 소리는 발생하는 즉시 주변의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중앙 광장으로 이어진 넓은 통로를 따라 걸었다. 양옆으로 늘어선 거대한 석상들은 머리가 깨지거나 허리가 잘린 채 서 있었고, 벽면을 가득 채웠을 정교한 조각들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마치 거대한 손이 요새 전체를 찰흙처럼 주무르기라도 한 듯했다.
그때,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아로스는 걸음을 멈췄다. 살기는 아니었지만 마치 무덤을 떠도는 망령처럼 집요한 시선이었다. 뒤를 돌아보았으나 텅 빈 폐허 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착각이었을까. 고개를 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지만 등 뒤에 달라붙은 시선의 감각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위화감이 점점 짙어는 그 순간, 저 멀리 광장 끝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앙상한 팔다리를 기이한 각도로 꺾으며 마치 부서진 꼭두각시처럼 다가왔다.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가 어긋나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침묵을 갈랐지만 그 소리조차 금세 어둠 속으로 삼켜졌다. 몸은 비쩍 마른 인간의 형태였으나 있어야 할 얼굴이 없었다. 눈도, 코도, 이마도 없는 목 위에는 오직 거대한 입만이 찢어질 듯이 자리하고 있었다. 입 안에는 번뜩이는 상어 이빨 같은 것이 겹겹이 돋아나 있었다. 닫히는 법을 잊은 듯 영원히 벌어진 턱에서는 침인지 위액인지 모를 점액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며 돌바닥을 부식시켰다.
그것은 주변에 널린 시체 없는 갑옷을 향해 다가가 거대한 입으로 우악스럽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쇠를 씹는 것이라곤 믿기지 않는, 뼈를 으깨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옷 조각들은 이빨 사이에서 분필처럼 으스러져 점액과 뒤섞여 흘러내렸다. 그것은 영양을 섭취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달래기 위한 맹목적인 탐식 그 자체였다.
한참 동안 갑옷을 씹어 삼키던 그것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없는 머리는 마치 무언가를 감지한 것처럼 아로스가 서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이빨로 가득한 거대한 입이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했다는 듯, 미세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에에엑———!"
고막을 찢는 듯한 괴성이 정적을 깨뜨리며 광장 전체를 울렸다. 그것은 앙상한 팔다리를 기이한 각도로 꺾으며 믿기지 않는 속도로 아로스를 향해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