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마의 재앙
아로스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쏘아져 오는 몸뚱이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쇳소리와 함께 충격이 팔을 타고 전해져 왔지만 괴물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아로스의 검을 거대한 입으로 물어뜯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이빨들이 강철로 된 검신 위를 긁어대며 불쾌한 소음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검날에는 희미하게 흠집이 파이기 시작했다.
검을 씹어 부술 기세로 맹렬하게 밀어붙이는 괴물의 완력은 상상이상이었다. 아로스는 순간적으로 온몸에 힘을 주어 괴물을 밀어내는 동시에 검을 비튼 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괴물의 머리를 향해 지체 없이 검을 내리찍었다.
푸각——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빨로 가득했던 머리가 수박처럼 둘로 쪼개졌지만 안도의 여운을 느낄 틈도 없었다. 방금 전의 괴성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광장 사방의 어둠 속에서 똑같이 생긴 것들이 수십, 수백 마리가 되어 달려오기 시작하자 아로스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가장 가까웠던 공방 입구로 몸을 날렸다. 뒤에서는 수많은 괴물들이 내는 기이한 발소리와 이빨 부딪는 소리가 파도처럼 그를 쫓아왔다. 어두운 공방 안을 정신없이 내달리는 와중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린 투박한 날붙이들이 들어왔다. 이곳은 아트마의 무기를 만들던 거대한 공방이었음을 그제야 알아챘다.
안쪽으로 더 깊이 도망치자 텅 빈 공간 중앙에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듯한 거대한 골렘이 어정쩡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거인을 모방해 만든 그것은 위압적이었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작동시키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키에에에엑———!"
뒤에서는 괴물들이 코앞까지 쫓아오고 있었다. 아로스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옆에 떨어져 있던 거대한 오함마를 집어 들어 골렘의 머리통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내리쳤다.
콰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골렘의 머리 일부가 부서져 내리는 순간, 골렘의 텅 비어 있던 눈에서 붉은빛이 번쩍이며 거대한 몸체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육중한 소음과 함께 일어선 골렘은 아로스를 지나쳐 쇄도해 오는 괴물들을 향해 강철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골렘의 육중한 강철 주먹이 굉음과 함께 괴물들의 무리를 짓뭉개자 터져 나가는 괴물들의 육편과 비명 소리가 공방을 가득 메웠다.
아로스는 골렘이 벌어준 짧은 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공방을 가로질러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다른 장비들과는 차원이 다른 위용을 뽐내는 거대한 모루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마치 이 공방의 심장인 것처럼 주변의 혼돈 속에서도 홀로 굳건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아로스는 그것을 발견했다.
주먹만 한 크기의 검은 정육면체에는 바닥면에는 오르드의 가면과 똑같은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운철 각인. 아로스가 망설임 없이 그것을 집어드는 순간, 등 뒤에서 거대한 금속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골렘이 괴물들의 파상공세에 결국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었다. 강철 몸체가 썩은 나무가 부서지듯 무너졌고, 붉게 빛나던 눈의 빛이 급격히 사그라들자 아로스는 즉시 공방의 더 깊은 곳으로 통하는 내리막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어둠 속을 얼마나 달렸을까. 좁고 가파른 통로를 따라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아로스는 발밑이 꺼지는 감각과 함께 몸의 균형을 잃었다. 바닥 일부가 부서져 내린 탓이었다. 그는 헛디딘 발과 함께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한참을 구른 끝에 멈춰 선 곳은 울퉁불퉁한 돌바닥 위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은 금속을 채굴하던 거대한 광산 작업 현장인 듯했다. 사방에는 채굴 장비와 광석을 나르던 수레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하지만 뒤에서는 여전히 괴물들의 섬뜩한 추격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로스는 다시 몸을 일으켜 아래로 향하는 길을 찾았지만 그 앞을 마주한 것은 끝을 알 수 없는 어둠뿐이었다. 마치 심연의 입구였던 무저갱처럼, 그 어떤 빛도 허락하지 않는 절대적인 암흑이었다. 급하게 품속에서 환시의 등불을 꺼내 들었음에도 청록빛 불꽃은 사방으로 퍼져나가기는커녕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 등불 주변만을 희미하게 밝힐 뿐이었다. 등불의 빛이 어둠을 뚫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공간의 어둠이 빛의 존재 자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등불의 빛마저 무력해지는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 아로스는 등 뒤로 다가오는 괴물들의 기척을 선명하게 느꼈다.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 뼈마디가 어긋나는 듯한 소리가 어둠을 타고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그는 등불을 다시 품속에 넣고 오직 감각에만 의지한 채 광산의 더 깊은 아래쪽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발밑은 온통 날카로운 돌멩이와 버려진 장비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등 뒤에서 들려오던 추격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 아닌 마치 다른 세상의 소음처럼 이질적으로 변해간다는 것이었다. 소리가 그의 귀에 닿기 전에 무언가에 의해 뭉개지고 흩어지는 듯했다. 공기마저 달라졌다. 먼지 섞인 광산의 공기가 아니었다. 모든 온기가 증발해 버린 듯,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가 얼어붙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로 가득한 이곳은 단순한 지하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생기가 죽어버린 거대한 무덤의 가장 깊은 곳이었다.
아로스는 벽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손끝에 닿는 암벽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이내 발치에 둔탁한 금속성의 무언가가 걸렸다. 허리를 숙여 집어 든 그 기묘하고 복잡한 형상은 어둠 속에서도 무엇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신의 가면.
가면은 일부분이 무언가에 씹어 먹힌 듯 날카로운 단면이 거칠게 남아 있었다. 아로스가 가면을 든 채 고개를 드는 순간, 저 앞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희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목이 잘린 거구의 무언가가 사라진 목 주변을 양손으로 붙들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온몸의 핏줄이 검게 물들어 피부 위로 흉측하게 돋아난 모습은 끔찍했지만 그 거대한 덩치와 위압감은 아로스에게 낯설지 않았다. 오르드와 거의 흡사한 체격에 아로스는 방금 전 주웠던 신의 가면을 떠올렸다.
이그니카에서 오르드와 대립했던 또 다른 철기장의 신. 저것은 필시 하카르임이 분명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목 없는 거구가 아로스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얼굴이 없는 그것이 어떻게 그를 인지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카르의 몸은 손에 들고 있던 거대한 망치를 들어 올리며 제대로 된 조준 없이, 그저 본능처럼 휘두르는 맹렬한 공격을 시작했다.
쿠르르릉—— 콰과앙————
망치가 바닥을 내리치자 광산 전체가 울릴 듯한 천둥 같은 굉음과 함께 돌바닥이 움푹 파여나갔다. 그 압도적인 완력은 일전에 마주했던 거인들마저 능가하는 것이었기에 아로스는 정면으로 받아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오직 회피에만 집중하며 비틀거리는 거구의 맹공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하카르의 몸은 강력했지만 머리가 사라진 탓인지 움직임은 조잡하고 불안정했다. 아로스는 거대한 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몸 전체가 크게 휘청이는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망치를 휘두른 육중한 신의 몸이 앞으로 크게 쏠리는 순간 온 힘을 실어 상체를 파고들며 검을 휘두르자, 서슬 퍼런 검날이 거구의 몸뚱이를 정확히 세로로 갈라버렸다.
신의 육신이 너무나 쉽게 베어지는 감각에 의문을 품으려는 찰나,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반으로 갈라져야 할 하카르의 몸은 쪼개지지 않는 대신, 마치 공기가 빠져나간 거대한 가죽 부대처럼 힘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육중한 근육과 뼈는 간데없이 텅 빈 껍데기만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 기어 나왔다.
무너져 내린 신의 상반신 가죽을 찢고 빛이 바랜 검은색의 근육질 야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매끈하고 창백해 보이는 검은 외피로 덮인 그것은 단순한 위압감을 넘어선 이질적인 기운을 공간에 흩뿌렸다. 이전까지 마주했던 그 어떤 울루니아와도 다른, 모든 법칙을 비웃는 듯한 초자연적인 감각이었다. 동시에, 허물어진 하반신에서는 불길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바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안개처럼 피어오른 기체는 닿는 모든 것을 침식하며 갈아버리는 듯, 바위 표면을 푸석하게 바스러뜨리고 소리마저 집어삼키는 절대적인 침묵의 영역을 만들어냈다.
아로스의 모든 신경은 오직 눈앞에 기어 나온 존재에게 쏠렸다. 그것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매끈했던 외피가 끔찍하게 갈라지며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은 근육과 여러 겹의 턱, 이빨들이 뒤엉킨 거대한 종양과 같은 진짜 아가리였다.
삐이이이이이이이이—————
금속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날카로운 고주파음이 광산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고막을 터뜨릴 것 같은 소음마저 발밑에서 피어오르는 침묵의 영역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며 사라졌다. 소리조차 잡아먹는 완벽한 정적 속에서, 울루니아가 아로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아로스는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강철이 맞부딪히는 소리는 없었다. 검신에 닿은 것은 상상 이상으로 육중하고 끈적한 질량감에 아로스의 검은 거대한 벽에 부딪힌 나뭇가지처럼 허무하게 튕겨 나갔고, 이어진 충격에 몸이 그대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크헉......!"
아로스는 광산 바닥을 수십 번은 굴렀다. 부서진 돌멩이와 금속 파편이 온몸을 찔렀지만 몸 안쪽으로 가해진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 눈앞의 어둠 속에서 울루니아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놈은 서두르지 않았다. 방금 전의 맹렬한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마치 제압된 사냥감을 관찰하듯 느긋한 걸음이었다.
아로스는 이를 악물고 검을 고쳐 쥐었다. 바르그와 싸울 때도, 뒤틀린 기사들과 맞설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눈앞의 존재는 힘의 차원을 넘어 아로스의 모든 저항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자세를 낮추고 돌진했다.
하지만 검은 또다시 허공을 갈랐다. 놈은 믿기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그의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거대한 팔로 아로스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과 함께 몸은 종잇장처럼 다시 한번 날아가 어둠 속으로 처박혔다. 등은 단단한 벽이 아닌 어딘가 질기고 차가운 것에 부딪혔다. 신음하며 고개를 돌린 순간, 아로스는 얼어붙었다.
등 뒤에는 어느새 또 다른 울루니아가 서있었다. 먼저 나타난 놈보다 덩치는 조금 더 작았지만 그 기괴함은 덜하지 않았다. 입이 없어야 할 매끈한 얼굴 중앙이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열려 있었고, 그 안은 칠성장어처럼 동심원을 그리는 무수한 이빨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로스가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등 뒤의 울루니아가 움직였다. 소용돌이 같은 아가리가 그의 등에 달라붙자, 갑옷과 살점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한 끔찍한 감각이 온몸을 꿰뚫었다. 힘, 생명력, 의지마저도 그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크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트는 순간, 정면에 있던 울루니아가 다시 달려들어 아로스의 팔을 물어뜯었다. 겹겹의 이빨이 강철 갑옷을 종이처럼 씹어 으깨면서 살점 속으로 파고들었다. 두 괴물은 저항하는 아로스를 장난감처럼 물어뜯고, 빨아들이고, 내동댕이쳤다. 무차별적인 유린 속에서 그의 갑옷은 갈가리 찢겨 나갔고,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바닥에 처박힌 그의 부러진 팔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아로스는 문득 허리춤에 매달린 너덜너덜한 천 조각의 감촉을 느꼈다.
시즈의 옷자락.
지키지 못했다. 그녀를 구하러 갈 힘도, 자격도 없었다. 결국 자신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무력한 존재였다. 자책감과 굴욕감이 그의 마지막 남은 저항 의지마저 완전히 부러뜨렸다. 모든 것이 끝이었다.
찢어진 아가리가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크게 벌어지는 그 순간, 무자비하게 짓밟힌 그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질적인 파문이 일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 속에서, 음험한 목소리가 아로스의 의식을 파고들었다.
「가엾군... 엘나의 마지막 사자라는 자가 고작 저런 하찮은 것들에게 장난감처럼 부서지고 있다니......」
아로스의 흐려진 의식이 희미하게 저항했다.
'......누구냐.'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네가 이대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사라진다는 사실이지... 분하지도 않은가......?」
'......닥쳐라......'
목소리는 그의 미약한 저항을 비웃듯 말을 이었다.
「알량한 자존심이 발버둥 치고 있나...? 좋아... 그 마지막 자존심에게 묻지. 이대로 먹잇감이 될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포식자가 될 것인가......」
아로스의 눈앞으로, 지키지 못했던 시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짐승의 먹이가 되기 직전인 자신의 무력한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분노가 그의 마지막 이성을 집어삼켰다.
'......힘을......'
그것은 질문이 아닌 갈망이었다. 목소리는 만족한 듯이 속삭였다.
「그래... 힘. 네놈을 벌레처럼 보는 저것들에게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되돌려줄 힘을... 진정으로 원하나......?」
아로스는 대답 대신, 끓어오르는 증오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