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마주하는 발걸음 (11)

새로운 인연

by 이샤라

"흐음... 이 혼란 속에서도 신앙으로도 희망의 끈이 이어질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큰 힘이 되겠군요."


대답을 마친 안톤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오늘 밤은 편안히 쉬시고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안톤 님도 편안한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세 사람은 거의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톤이 먼저 문을 열고 배웅하려는 순간, 아로스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며 문가 옆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기다렸다는 듯 정확히 한 지점을 향하고 있었다. 잔뜩 움츠러든 기척. 그리고, 미숙하지만 숨기려 애쓴 흔적.


"거기, 언제까지 숨어 있을 생각이지."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르자 문 옆의 어둠 속에 조용히 붙어 있던 노아가 어색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를 움츠린 그는 더 이상 숨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게... 저...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듣지 말아야 할 말도 있다는 것을 배워야겠군."


아로스가 천천히 한 발 다가섰다. 날이 선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경계로 가득 차 있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 더 큰 체격의 아로스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에 놀란 노아는 한 걸음 물러서며 말을 더듬었다.


"저... 그... 그게... 두 분이......"


그때, 안톤이 나서며 두 사람 사이에 섰다. 눈빛은 차분했지만 말투에는 꾸짖음이 섞여있었다.


"노아, 이건 분명 네 잘못이다. 남의 대화를 몰래 엿듣는 행동은 용납할 수 없는 짓이야."


노아는 고개를 떨궜다. 부끄러움인지 두려움인지, 그 감정은 말로 다 드러나지 않았다. 안톤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이 아이가 겉으로는 나약해 보여도 마음은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방금 행동은 분명 실수지만... 그 실수 너머로 무언가를 보고 싶었던 것일 테지요."


아로스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다시 입을 열지 않은 것은 더 따질 가치도 없다고 여긴 탓일지 모른다. 시즈는 조용히 노아를 바라보았다. 숨죽인 눈빛 너머로 무언가를 말하려다 삼킨 듯한 기색이 그의 얼굴을 스쳤고, 그 결을 조용히 읽어낸 시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시즈가 마지막 인사를 건넨 뒤, 두 사람은 조용히 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짧게 울리며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안톤은 한동안 노아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들어가자꾸나. 이 시간까지 여기에 서 있을 일이 아니잖느냐."


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없었지만 안톤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그가 등을 돌려 의사들의 오두막으로 돌아가자 안톤은 천천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음을 다잡은 게로 군."


그 말은 노아에게 들리지 않았다. 안톤의 눈길은 노아의 뒷모습이 아닌, 아직도 희미한 불빛이 남아 있는 창가 쪽을 향하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이 안식 교회를 뒤덮었다.


무너진 성역은 이제 완전히 악몽의 장으로 변해 있었다. 성소 안팎은 교회를 지키던 병사들과 기사들의 처참한 시체로 가득했다. 부러진 검과 방패, 사방에 튄 피가 바닥에 엉겨 붙으며 전투의 참상을 그대로 증언하고 있었다. 한쪽이 무너져 있던 교회의 벽은 반대쪽마저 무너져 내려 안쪽이 완전히 드러났고, 하늘을 향해 서 있던 종탑조차 균형을 잃은 듯 위태로웠다.


그 무너진 틈 사이로 사도 카브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액체의 영향 때문인지 이전보다 팔다리가 기이하게 길어져 있었으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은 딛는 바닥마다 불길한 흔적을 남겼다. 그의 기척이 스칠 때마다 공기는 더욱 무겁고 서늘해졌고, 잔해로 가득한 내부는 마치 숨을 죽인 듯 조용해졌다.


교회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카브르는 잔해 속에서 무너진 머릿돌 하나를 발견했다. 그 위에는 누군가가 언령을 읽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후드로 가려진 얼굴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한참 동안 머릿돌을 살펴보는 그의 손끝이 글귀를 스칠 때마다 짧은 진동이 울리며 잔먼지가 일었다.


"늦었군."


카브르는 낮게 중얼거리며 머릿돌에 새겨진 문장을 연거푸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뒤편에서 따라오던 추적자들은 말없이 광경을 지켜봤고, 카브르는 그들에게 고개를 돌려 명령을 내렸다.


"빼앗은 물자는 전부 은신처로 옮기고, 몇 명은 나를 따라온다. 사냥꾼들은 지름길을 이용해 놈들을 쫓아라."


명령이 떨어지자, '사냥꾼'이라 불린 이들이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왜소한 체구에 깊은 검붉은 후드를 눌러썼고, 손에는 휘어진 은빛 칼날을 들고 있었다. 그들이 올라탄 짐승들은 사자와 개가 뒤섞인 듯한 흉측한 모습의 혼종이었다. 카브르의 손짓과 함께 사냥꾼들은 혼종을 몰며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추격을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엘라리모스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미지의 힘은 자신의 새로운 힘마저 제약했기에 섣불리 들어설 수 없었지만, 방금 출발한 '사냥꾼'들이라면 놓친 무녀와 기사를 추적하여 처리하는 임무를 충분히 완수할 수 있을 터였다.


카브르는 무너진 기둥 너머, 교회의 중심을 바라보았다. 팔이 잘려나갔던 그날의 기억이 피비린내와 함께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 수치심은 지금껏 단 한순간도 기억을 떠난 적이 없었다. 반드시 무녀를 다시 잡아, 자신의 팔을 자른 기사에게 받은 수모 이상의 고통을 안길 것이라 다짐한 그는 이를 악물며 뒤돌아선 뒤 추적자들을 이끌고 폐허를 빠져나갔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여전히 불길이 남아 있었다. 기둥과 성화가 모두 타들어 갔고, 하늘은 연기에 물들어 검붉게 변해 있었다. 타오르는 화염 너머로 마르크의 시신이 교수형을 당한 채 매달려 있었다. 그의 몸은 바람에 흔들리며 끼익 거리는 음산한 울림은 불길과 함께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잿빛 하늘 아래로 수십 마리의 까마귀들이 교회 상공을 선회하며 날아올랐다. 그 울음은 마치 황천을 부르는 노래처럼 적막을 찢었다. 불타는 교회는, 마치 절망과 죽음의 상징처럼 어두운 지평선 위에서 사그라지지 않는 불길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른 새벽, 여명의 신앙을 믿는 주민들이 시즈가 머무는 숙소 앞에 모여들었다.


여명을 맞이하며 조용히 기도를 올린 그들은, 기도가 끝난 뒤 시즈에게 앞으로의 지침을 내려달라며 요청했다. 그러나 시즈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정중하게 고사했다.


"저는 아직 견습 무녀에 불과해서 그만한 혜안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대신 여러분을 위한 작은 축복의 기도를 올리겠습니다."


모두가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시즈는 두 손을 모아 조용히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자, 무리 중 한 늙은 노파가 다가와 주름 깊은 손으로 시즈의 손을 감싸 쥐었다.


"감사합니다, 무녀님. 다섯 해 전 시스테나의 무녀님께서 사라지신 이후로... 이 땅에서 아텐시아의 축복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거라곤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 기쁩니다."


노파의 떨리는 음성에는 진심 어린 경외와 기쁨이 뒤섞여 있었다. 그 순간,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기도는 잘 마치셨습니까?"


안톤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는 시즈를 향해 다가왔다.


"떠날 채비는 다 되셨는지요?"


"말과 짐을 챙기는 대로 출발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시즈의 말에 안톤은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본 후 말없이 돌아서서 마을 안쪽의 종군 의사들과 환자들이 모인 곳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시즈와 아로스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묵묵히 짐을 챙겨 마구간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헌이 레클레스와 다리아를 끌어내고 있었고, 그 곁엔 미사도 함께 서 있었다.


"말들은 제가 간밤에 잘 보살폈습니다."


헌이 레클레스의 튼튼한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정말 훌륭한 말들입니다. 바다 건너 제 고향에도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위풍당당하고 영리해 보이는 말들은 처음 봅니다."


"...저희에게는 과분한 선물이죠."


시즈가 따뜻한 눈길로 말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제부터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정말 편히 머물 수 있었어요."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제가 부족하진 않았나 내심 걱정했는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헌은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인사했다. 그 옆에 선 미사를 바라보던 시즈는 다가가 그녀의 손을 살며시 감쌌다.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를 올린 뒤, 진심을 담아 말했다.


"도움을 드리지 못해 마음이 무겁지만... 꼭 완쾌하시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무녀님. 부디 몸 조심하세요."


미사는 여전히 불편한 몸을 이끌고 조심스레 허리를 숙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환한 감사를 담은 체념과 기대가 동시에 스며 있었다.


잠시 후 시즈와 아로스가 여관을 나가려는 순간, 헌이 뭔가를 깜빡한 듯 자신의 이마를 두드리며 급히 그들을 불러 세웠다.


"아,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그는 허둥지둥 뒷문 쪽으로 달려가더니, 이내 커다란 자루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자루 속에는 붉게 익은 산딸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잘 익은 열매에서 퍼져 나오는 은은한 단내가 주변 공기를 채웠다.


"급히 준비한 거라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산딸기......?"


시즈는 자루를 내려다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릴 적 아우로라에서 한 번 맛본 기억이 떠올랐다. 달콤하고도 새콤했던 그 맛이 아직도 생생했지만 엘나가 사라진 뒤로는 쉽게 볼 수 없는 귀한 열매였다.


"어제저녁 과일 드시는 걸 보고 혹시나 싶어서 해가 뜨기 전 뒷산에서 급히 따왔습니다. 단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헌은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한 듯 말했다. 시즈는 자루를 받아 들고 잠시 말을 잊었다. 산딸기는 들기 벅찰 만큼 가득했고, 그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렇게나 많이... 정말 저희가 다 가져가도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근처 외진 곳에 조금만 나가도 널려 있습니다. 여정길에 마음껏 드시면서 가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히 잘 먹을게요."


시즈는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그 미소에는 짧은 머무름 동안 받은 따뜻한 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헌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아로스에게 다가가 작은 가죽 가방 하나를 건넸다. 가방 안에는 칼을 가는 숫돌, 그리고 작은 주머니 하나가 들어 있었다.


"짐승을 쫓아내는 가루입니다. 야영하실 땐 주변에 꼭 뿌리십시오. 전선으로 가는 길엔 들짐승이 많습니다. 특히, 부패에 오염된 맹수들은 위험합니다. 전선에 가까워질수록 더 자주 출몰할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아로스는 담담하게 대답한 뒤,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헌과 미사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말에 짐을 싣는 손길에는 더 이상 머뭇거림이 없었다.


준비를 마친 시즈가 헌과 미사를 향해 작게 말했다.


"두 분께 아텐시아의 지혜가 있기를."


그 작별을 끝으로, 두 사람은 마을 입구로 향했다. 입구 끝자락에 다다르자 안톤과 노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을 타고 이동하시니, 북서쪽으로 보름 정도면 교회에 도착하실 겁니다. 다만, 가는 길도 안전하지 않을뿐더러 교회 앞으로는 부패와 대치하는 전선이 있으니... 의사가 필요할지도 모르지요."


안톤은 말을 잇는 대신 곁에 선 소년을 바라보았다. 노아가 주춤하며 스승의 시선에 작게 고개를 들자, 안톤은 그의 허리를 툭 치며 앞으로 나서게 했다.


"아직 미숙한 제자이긴 하지만 분명 여정에 도움이 될 겁니다. 괜찮으시다면 이 녀석을 데리고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노아는 낯을 가리듯 시즈와 아로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망설임이 느껴졌지만 시즈는 그의 표정 속에 '이곳을 떠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떠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오래전 헤어진 형을 만나러 이그니카로 가고자 합니다."


노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안에 담긴 결심은 또렷했다. 형의 얼굴과 함께 어릴 적 함께 웃던 기억들이 가슴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며 반드시 찾겠다는 결심이 마음을 재촉했다. 시즈는 그런 노아의 내면을 읽어낸 듯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정을 함께하시게 되면... 지금까지 겪은 것보다 더한 현실들을 마주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으신가요?"


노아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 햇살이 마을을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고, 긴 여정의 그림자가 멀리까지 뻗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그 길 위에 있었다.


"지난밤에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고, 눈빛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빛났다. 시즈는 웃으며 노아에게 손을 건넸다.


"알겠습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죠."


"감사합니다!"


노아는 기쁜 얼굴로 시즈의 손을 맞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여정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편하게 노아라고 불러주세요."


시즈와 인사를 나눈 노아는 아로스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어제의 일이 아직 마음 한켠에 남아 있는 듯 그의 손끝과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아로스는 그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 본 뒤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맞잡았다. 서툰 악수였지만 그 안엔 묵묵한 수용이 담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노아는 안톤에게 다가갔다. 스승의 품에 와락 안긴 그의 어깨는 떨리고 있었다.


"스승님... 그동안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안톤은 조용히 그를 안아주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더는 말이 필요 없는 이별이 흘렀다.


"아니다. 우리가 너를 너무 오랫동안 붙잡아 두었는지도 모르지. 부디 형을 꼭 다시 만나길 바란다."


노아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스승에게 마지막 인사를 올린 뒤, 시즈와 아로스와 함께 마을을 떠났다.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마음속에는 형을 향한 희망이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침 햇살이 내려앉은 마을 입구에 홀로 남은 안톤은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는... 보내줄 때도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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