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빛과 소음이 사라진 자리에 찾아온 것은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열기와 무거운 정적이었다. 찢겨나가는 듯한 감각의 끝에서 아로스는 자신이 단단한 대리석 바닥 위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숨을 들이키자 폐부로 스며든 것은 맹렬한 화기로 가득한 뜨겁고 메마른 공기였다. 이그니카의 작열하던 열기는 차라리 창조를 위한 생명의 몸부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눈앞으로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완전한 파괴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자욱한 붉은 연기 너머로는 하늘의 한쪽이 통째로 찢겨나간 듯 거대한 불의 강줄기가 굉음을 내며 아래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영원한 불길이 신계를 유일하게 비추는 광원이 되어 부서진 건축물들의 일그러진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거대한 기둥들은 밑동이 잘려나간 채 기울어져 있었고, 신들의 조각상이 새겨진 벽면은 반파되어 그 속의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한 채 시간 속에 멈춰버린 거대한 무덤과도 같았다. 폐허라는 말조차 사치였다. 신들이 머물던 곳조차 이토록 거대한 무덤으로 변했는데, 과연 저 아래의 대지에 희망이라는 것이 남아있을까.
아로스는 그 광경을 응시하며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불의 포효가 멀리서 고막을 울리는 가운데, 그의 갑옷과 발밑의 대리석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가까이서 유일하게 공간의 침묵을 깨뜨렸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붉은 연기가 옅어지는 구간에 다다르자 눈앞에서 거대한 원형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은 파멸의 현장 속에서도 유독 처참했다. 공간의 중앙부는 무언가 거대한 것이 폭발하며 모든 것을 증발시킨 듯 움푹 파여 있었고, 주변으로는 셀 수 없이 많은 수정 조각들이 빛을 잃은 채 바닥을 가득 메웠다. 공기 중에는 미세한 수정 가루가 떠다니며 뜨거운 열기 속에서 아른거렸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빛을 머금은 날카로운 파편들은 마치 부서진 별들이 핏빛으로 물들어 대지에 쏟아져 내린 듯, 기묘하고도 서글픈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아로스는 그 수정의 바다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발치에 채이는 파편에서는 이제 그 어떤 힘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열기 속에서 오직 이 잔해들만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수정의 바다를 뒤로한 채 열기의 근원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긴 아로스의 앞으로 거대한 정원의 흔적처럼 보이는 공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분수대처럼 보이는 하늘에 떠 있던 거대한 바위들은 대부분 부서져 추락했고, 남은 것들도 금이 간 채 위태롭게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한때 생명의 물이 흘렀을 법한 그곳에서는 이제 물 대신 잿가루가 바람에 흩날릴 뿐이었다.
잿빛 정원을 뒤로, 신전으로 향하는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 들어선 아로스는 마침내 이 기이한 정적의 이유를 마주했다.
신전으로 향하는 길목 곳곳은 검은 형상들로 가득했다. 극도로 맹렬한 불길에 순식간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숯처럼 변해버린 신들의 시체들. 어떤 이들은 공격을 하려던 자세 그대로, 또 어떤 이들은 비명을 지르던 모습 그대로 마지막 순간의 고통을 영원히 박제당한 채 서 있었다. 하지만 온전한 형상은 거의 없었다. 일부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듯 깨진 유리처럼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허리가 잘린 채 상반신만 널브러진 끔찍한 모습도 보였다. 그들 모두가 기이한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아로스는 이들이 사라진 카노라스의 신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들의 무덤을 지나자 위태롭게 버티고 선 거대한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 옆으로 무너져 내린 벽의 거대한 구멍 너머로는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의 폭포가 이전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압도적인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계단의 끝에 다다르자 눈앞으로 신전의 심장부였을 거대한 공간이 아득하게 펼쳐졌다. 열기로 아른거리는 대기의 저편,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 거대한 신좌(神座)의 희미한 윤곽이 보였다. 하늘을 떠받쳤을 법한 거대한 벽면 아래에 놓인 등받이는 통째로 무너져 내려 불타는 하늘이 폐허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아로스의 시선은 오직 저 멀리 보이는 단 하나의 점, 신좌의 윤곽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수록 주변의 풍경은 더욱 처참한 실체를 드러냈다. 바닥 곳곳이 맹렬한 불길에 할퀴어진 듯한 상처로 검게 그을려 있었고, 천장에서 떨어진 거대한 잔해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신좌의 온전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곳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그것은 온몸의 힘이 빠진 듯 축 늘어진 채 간신히 옥좌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한때 화려했을 예복은 만신창이가 되어 본래의 색을 잃었고, 넓고 긴 소매는 끝자락이 모두 그슬린 채 찢겨 나간 모습이었다. 얼굴을 가린 가면의 왼쪽 장식마저 절반이 부러져 형체가 온전치 않았다. 새까만 숯덩이처럼 타버린 오른손의 틈새로는 핏줄 같은 불꽃의 흐름이 고동쳤으며, 그의 발치로부터는 식지 않는 피를 닮은 붉은 불길이 강물처럼 흘러내려 신좌의 기단을 적시는 중이었다.
권능의 잔재만으로도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불길. 이 땅에서 이 정도의 불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뿐이었다.
불의 신, 바트라.
아로스는 불길이 시작되는 기단 앞에서 멈춰 섰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오직 불타는 하늘의 포효만이 멀리서 울려 퍼졌다.
미동조차 없던 신좌가 기이한 마찰음을 내며 움직였다. 옥좌에 기대고 있던 바트라가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부서진 가면의 어두운 틈새 너머로 이글거리는 눈빛이 물결치듯 따라 움직이더니 시선은 결국 아로스를 향했다. 눈앞의 존재가 누구인지 알아보려는 의지조차 없어 보였다. 그저 자신의 고통스러운 공간을 침범한 불경한 존재로 인식했을 뿐이었다.
분노와 자기혐오가 담긴 의식이 아로스의 정신을 꿰뚫었다.
「누가 감히... 이곳에 발을 들였는가.」
쿠르르릉————
바트라의 타버린 오른손이 아로스를 향하는 순간, 신전 전체가 울리며 그의 발밑에서부터 거대한 불길이 폭풍처럼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화염이 아니었다. 신의 권능 그 자체가 담긴 순수한 파괴의 폭풍이었다. 하지만 아로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검을 고쳐 쥔 그는 오히려 파괴의 폭풍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달려들었다. 이 지옥의 끝에서 마주한 것이 절망뿐이라면 차라리 그 심장부로 직접 뛰어들겠다는 듯한 처절한 돌진이었다.
콰아아앙——————
아로스의 검은 정면으로 쇄도하는 불기둥을 단숨에 갈랐다. 신의 권능은 강철마저 녹여버리는 용암처럼 검날을 타고 흘러 팔을 태울 듯이 밀려들었다. 그는 검을 비틀어 불길을 쳐내는 동시에 몸을 날려 바닥에서 솟구치는 또 다른 불기둥을 피했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불길의 파도 속에서 아로스는 무너진 기둥을 박차고, 부서진 석상을 밟으며 신좌를 향한 거리를 좁혀나갔다.
하지만 가까워질수록 불길의 크기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신의 분노는 피할수록 더욱 거세지는 폭풍과도 같았고, 맹렬한 일격들을 피하려 공중으로 몸을 날린 그의 눈앞으로 피할 수 없는 거대한 불의 파도가 벽처럼 덮쳐왔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아로스는 포탄처럼 날아가더니 그대로 무너진 석재 더미에 처박혔다.
바로 그 순간, 신의 불꽃이 그의 갑옷을 파고드는 동시에 안쪽에서부터 폭발적인 은백색 섬광이 터져 나왔다. 이그니카의 봉쇄실에서 온몸에 스며들었던 정화의 불꽃의 잔향이 동질의 거대한 힘과 충돌하며 일으킨 격렬한 반응이었다.
폭풍처럼 몰아치던 바트라의 공격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무너진 석재 더미에 처박혔던 아로스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리듯 몸을 일으키자, 누그러진 시선이 곧장 그에게로 향했다. 희미한 대지의 기운과 품속에서 미약하게 빛을 발하는 환시의 등불, 필멸자의 생기를 좀먹고 있는 심연의 기운, 그리고 그것을 정화하려는 또 다른 자신의 힘. 광기에 휩싸였던 신의 사고가 그 절대적인 모순 앞에서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아로스는 검을 내리지 않은 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 그를 향해, 바트라가 아주 천천히 신좌의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계단을 내디딜 때마다 만신창이가 된 신의 위압감이 공간을 짓눌렀다.
마침내 아로스의 눈앞에 선 바트라의 의식은 이전의 맹목적인 분노가 아닌, 차갑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그의 정신에 내리 꽂혔다.
「...부서진 심장의 힘을 품은 이여.」
그의 시선이 아로스의 텅 빈 듯하면서도 꺼지지 않은 눈동자를 응시했다.
「불굴의 영혼을 지니지 못한 자, 이 절망의 길을 걸을 자격이 없으리라.」
선언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숯덩이처럼 타버린 바트라의 오른손이 섬광처럼 뻗어 나와 아로스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저항할 틈도 없이 아로스의 시야가 암전 되면서 그의 의식은 끝을 알 수 없는 불길 속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찢겨나가는 듯한 감각이 멎었다. 발아래가 딛고 있는 곳은 신계의 대리석이 아니었다. 폐부를 찌르는 것은 불의 열기가 아닌 금속이 썩어가는 비린내와 축축한 냉기였다.
"...여긴......?"
아로스는 눈을 떴다. 아트마의 가장 깊은 곳. 어째서 다시 이곳에 돌아온 것인가. 바트라가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인가? 혼란이 정신을 어지럽히는 그때, 어둠 속에서 무너진 신의 상반신 가죽을 찢으며 빛이 바랜 검은색의 근육질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
순간적으로 아로스의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그는 본능적으로 검을 움켜쥐고 자세를 낮췄다. 이것은 환영인가, 현실인가. 하지만 분간할 틈도 없이 울루니아는 아로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아로스는 검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거대한 광산 벽면에 부딪히면서 맥없이 튕겨 나갔다. 터무니없는 힘으로 인해 몸은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공중으로 떠올랐다.
"———크헉...!"
광산 바닥을 수십 번은 굴렀다. 내장에 가해진 충격이 생생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마자 등 뒤의 어둠 속에서 또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입이 없어야 할 매끈한 얼굴 중앙이 거대한 소용돌이처럼 열린, 또 다른 울루니아가 서 있었다.
'......설마.'
그것은 단순한 혼잣말이 아닌 잊고 싶었던 기억의 확인이었다. 이것은 새로운 전투가 아닌 그날의 완벽한 재현, 불의 신이 자신의 기억을 강제로 끄집어내서 만들어낸 시험이리라.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아로스가 정신을 가다듬기도 전, 등 뒤에 있던 울루니아의 소용돌이 같은 아가리가 그의 등에 달라붙었다. 사정없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끔찍한 감각이 또 한 번 그의 온몸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그날의 무력함과 고통이 완벽하게 재현되었다. 그리고 그 절망의 순간, 기억 속에서 메마르고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엾군. 엘나의 마지막 사자라는 자가, 고작 저런 하찮은 것들에게 장난감처럼 부서지고 있다니. 이대로 먹잇감이 될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포식자가 될 것인가.」
바트라가 지피는 고통의 환상 속에서 기억 속 유혹의 목소리가 아로스의 이성을 흔들었다. 가슴팍에 새겨진 검은 핏줄이 그 목소리에 화답하듯 격렬하게 고동쳤다. 힘을 갈구하는 충동이 내면에서부터 차올랐다.
'힘......'
아로스는 고통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손이 향한 곳은 허릿춤의 검이나 상흔이 새겨진 가슴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