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 된 온정, 엇갈린 발길 (4)

유대감

by 이샤라

손끝은 허리 벨트에 단단히 묶어둔 거칠고 부드러운 감촉에 닿았다. 시즈의 찢어진 옷자락. 그것을 움켜쥐는 순간, 아트마의 절망적인 환영 너머로 마지막 순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무력하게 끌려가던 그녀의 모습과 절박하게 뻗었지만 허공을 움켜쥐었던 자신의 손.


아로스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아트마에서 힘을 받아들인 것은 굴욕과 분노 때문이었으나, 지금 이 힘을 다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녀를 구하겠다는 자신의 유일한 목적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심연의 유혹에 다시 굴복하느니, 아로스는 차라리 신의 불길에 타버리는 것을 택하겠다는 듯 옷자락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자신의 의지 하나만으로 바트라가 쏟아붓는 순수한 영혼의 불꽃을 정면에서 받아냈다.


그 순간, 온몸을 짓누르던 모든 환영과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로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꿇었다. 시야가 돌아오자 자신이 여전히 신좌 앞, 바트라의 손아귀에 붙잡혀 있음을 깨달았다. 숯처럼 타버린 손이 천천히 그의 머리에서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바트라의 시선은 아로스의 손에 꽉 쥐어진 찢어진 옷자락과 고통을 이겨낸 여파로 희미하게 고동치는 검은 기운에 잠시 머물렀다. 심연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음에 삼켜지기를 거부한 필멸자의 의지. 이 절망의 땅에서 마주한 꺼지지 않은 불굴의 영혼.


바트라는 말없이 왼손을 들어 자신의 오른팔에 가져다 댔다. 핏줄처럼 일렁이던 불꽃의 흐름 속으로 손가락을 찔러 넣자 그의 오른팔이 재가 되듯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형체를 유지하던 겉 부분이 바스라져 내리더니 이내 앙상한 뼈대만 남았다.


그의 왼손에는 진홍빛으로 고동치는 주먹만 한 크기의 보주(寶珠)가 들려 있었다. 바트라는 그것을 아로스에게 건넸다.


「...가라.」


바트라의 의식이 마지막으로 울려 퍼졌다.


「유폐된 사자의 신전으로. 가서... 나의 옛 사자에게 진실을 묻거라.」


뜨겁고도 차가운 보주를 움켜쥐는 순간, 진홍빛 광채가 아로스의 형체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찬란한 빛이 신전 내부를 가득 메우더니 이내 촛불처럼 사그라들었다.


아로스가 떠나간 텅 빈 신좌 앞에서 바트라는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이글거림이 잦아든 그의 시선은 무너져 내린 신전의 기둥들을 넘어 저 멀리 불타는 하늘의 찢겨진 상처를 향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거대한 무덤이 되어버린 풍경을 응시할 뿐이었다.




소금기 묻은 바람이 바위틈을 휘돌아 나갔다. 해안가에는 이제는 서로가 제법 익숙해진 세 그림자가 있었다. 작은 모닥불 옆에 웅크리고 앉은 오미누스와 그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이를 돌보는 이형의 존재, 그 사이를 오가며 조약돌을 만지작거리는 아이. 아이를 치유해 준 그날 이후로 시간은 그들의 관계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형의 존재의 노골적인 경계심은 희미해졌고, 오미누스는 더 이상 완전한 이방인이 아니었다.


아이는 자신이 쌓아 올린 조약돌 탑 꼭대기에 작은 소라 껍데기를 얹으며 모닥불을 응시하는 오미누스에게 말을 걸었다.


"누나, 불이 춤추는 것 같아."


오미누스는 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눈동자는 타오르는 불꽃처럼 맑았다.


"...춤?"


오미누스가 되물었다. 말투는 여전히 무심했지만 이전처럼 날카로운 경계심은 담겨있지 않았다.


"응! 이렇게, 이렇게!"


아이는 팔을 흔들며 불꽃이 너울거리는 모습을 흉내 냈다. 그 모습에 오미누스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이상한 춤이네."


"그래도 예쁘잖아!"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오미누스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누나 손은 언제 다 나아?"


아이의 시선이 오미누스의 붕대에 감긴 손으로 향했다.


"...글쎄. 잘 모르겠어."


오미누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붕대 아래 감춰진 검은 상흔은 애초에 상처가 아니었다.


"엄마도 아픈데... 누나도 아프고..."


아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누나도... 나쁜 괴물들 때문에 그렇게 된 거야?"


아이가 아는 세상의 '나쁨'은 대부분 해안가를 위협하는 존재들, 혹은 대지에 널린 파도의 악마들이었을 터였다. 오미누스는 아이의 순수한 질문에 잠시 침묵했다. 자신의 상흔은 아이가 생각하는 괴물과는 다른, 더 깊고 어두운 근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설명할 수도, 설명할 필요도 없었기에 그저 짧게 답했다.


"...비슷해."


"그럼 엄마랑 똑같네!"


아이는 무언가 당연하다는 듯 외쳤다. 그 말에 모닥불 너머에서 생선을 굽던 이형의 존재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하는 것을 오미누스는 놓치지 않았다. 아이를 바라보던 오미누스는 시선을 이형의 존재에게로 옮기며 다시 아이에게 물었다.


"...너희 엄마는... 왜 저런 모습이야?"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오미누스는 이형의 존재의 기형적인 하반신을 직접적으로 가리키지는 않았지만 질문의 의도는 명백했다. 아이는 잠시 오미누스와 자신의 엄마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나도 몰라. 그냥... 원래 아팠어."


아이가 기억하는 엄마는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인 듯했다. 아이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모습일 뿐이었다. 아이의 대답을 듣는 순간 이형의 존재는 애써 태연한 척 생선을 뒤집었지만 그녀의 손길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오미누스는 그 반응 속에서 아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음을 확신했다. 저 떨림은 단순한 고통의 기억이 아니거나... 무언가를 숨기고 싶은 비밀의 무게겠지.


그때, 이형의 존재가 다가와 나뭇가지에 꿰어 노릇하게 구워진 생선 두 마리를 내밀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생선 한 마리를 오미누스 앞에 조용히 놓는 그 모습은 마치 어색한 침묵을 깨려는 듯한, 혹은 더 이상 질문하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부탁 같기도 했다. 오미누스는 말없이 생선을 건네받았고, 이어서 그녀는 다른 생선 한 마리를 아이에게 건넸다. 아이도 익숙하다는 듯 생선을 받아 들었지만 표정에는 큰 기쁨이 없었다. 그저 작은 입으로 오물거리며 조용히 살을 발라 먹을 뿐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식사에 조금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음에도 아이는 투정 부리는 대신 묵묵히 음식을 삼켰다.


오미누스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엔 너무도 가혹한, 작은 어깨 위로 드리워진 세상의 무게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는 문득 시즈에게 주었던 향기로운 열매를 떠올렸다.


품 안에서 작은 가죽주머니를 꺼내 열자 달콤하고 향긋한 냄새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아이는 코를 킁킁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누나, 그건 뭐야? 먹는 거야?"


오미누스는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열매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익숙한 손길로 손톱을 세워 열매를 조심스럽게 반으로 쪼갰다. 처음 보는 기묘한 열매의 등장에 곁에 있던 이형의 존재가 몸을 꼿꼿이 세우며 경계 어린 눈빛을 보내자, 오미누스는 개의치 않고 쪼개진 열매의 반쪽을 먼저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느릿하게 열매를 베어 물어 먹어도 문제가 없음을 확인시킨 그는 나머지 반쪽을 아이에게 불쑥 내밀었다.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조심스럽게 열매 조각을 받아 입안 가득 베어 물었다. 달콤한 향과 맛이 퍼지자 아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우와, 진짜 달아! 이거 이름이 뭐야, 누나?"


"......예전에 가지고 있던 거야."


말투는 여전히 낮고 무심했다. 아이는 입가에 묻은 즙을 닦아내며 감질난다는 듯 오미누스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누나, 나 이거 더 먹고 싶어! 하나만 더 주면 안 돼?"


오미누스는 보채는 아이를 보며 아주 희미한 미소와 함께 주머니를 다시 품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치... 그럼 내일은 먹게 해 줄 거야?"


투정 섞인 물음에 오미누스는 대답 대신 아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 해맑고 행복한 미소를 지켜보던 이형의 존재는 그제야 긴장을 풀며 오미누스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그녀의 검푸른 눈동자에는 이전보다 훨씬 깊어진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날 이후, 세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벽은 더욱 허물어졌다. 오미누스는 가끔씩 아이에게 열매를 쪼개 주었고, 아이는 그 보답으로 자신이 해안가에서 발견한 예쁜 조개껍데기나 반짝이는 돌멩이를 오미누스에게 가져와 자랑했다. 얼마 전부터 아이는 눈에 띄게 혈색이 좋아져 있었다. 며칠 전에 몰래 건네준 엘라마의 혈석 덕분일까. 그 안에 남은 희미한 온기가 아이에게 전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오미누스는 여전히 말이 많지 않았지만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와중에도 가끔은 서툰 질문으로 아이의 호기심에 답해주었다.


이형의 존재는 이제 오미누스가 근처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녀가 먹을 것을 구하러 잠시 자리를 비울 때면 오미누스는 말없이 아이 곁에 앉아 모닥불을 지켰다. 아이는 그런 오미누스의 무릎에 기대 잠들기도 했고, 오미누스는 잠든 아이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낯선 평온함을 느꼈다. 이것이 유대라는 걸까. 누군가의 곁을 지키고... 그로 인해 마음이 채워지는 듯한 이 기묘한 감각.


그렇게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저녁, 아이가 평소보다 일찍 잠든 바닷가. 오미누스와 이형의 존재는 모닥불을 앞에 두고 말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타닥거리는 불꽃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만이 정적을 채우는 가운데 조용히 불꽃을 응시하던 오미누스는 낮에 아이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이형의 존재를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아이에게 물었던 것과는 다른, 좀 더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파도의 악마에게 당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오미누스는 그녀의 이형적인 하반신을 흘끗 보며 말했다. 부패에 잠식된 존재들의 뒤틀림과는 다른 기이한 조화가 느껴졌다. 마치 다른 두 존재가 불완전하게 합쳐진 듯한 모습이었다. 이형의 존재는 어깨를 크게 움찔거리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불빛에 비친 그녀의 얼굴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당혹감과 죄책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은 오미누스는 아이가 말한 '나쁜 괴물'과는 다른, 더 깊고 어두운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확신했다.


이형의 존재는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녀는 그저 타오르는 불꽃만 응시할 뿐이었다. 오미누스 역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답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그녀가 무언가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형의 존재는 마침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에 대한 긍정이자, '파도의 악마' 때문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오미누스는 그녀의 인간과 닮은 상반신을 잠시 응시하며 다시 물었다.


"...그럼, 인간을 닮은 그 모습은 뭐야?"


오미누스는 일부러 모호하게 말하며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그 질문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이형의 존재를 파고드는 듯했다. 그녀는 불에 덴 듯 움츠러들며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인간의 형상을 한 팔을 반대편의 기형적인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깊은 혼란과 혐오감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는 듯했다. 이번에도 무언가 말하려 필사적으로 애썼지만 목구멍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막힌 소리만 희미하게 새어 나올 뿐이었다.


오미누스는 그녀의 격한 반응을 보며 더 깊은 비밀이 있음을 확신했다. 그는 시선을 잠든 아이에게로 옮겼다가 다시 그녀를 보며 물었다. 이번 질문은 더욱 본질적이었다.


"...아이는 인간인데, 어째서......"


말을 끝맺진 않았지만, '어째서 너 같은 존재가 인간 아이를 지키는가'라는 의문은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그 질문에 이형의 존재의 몸짓이 변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잠든 아이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품에 안으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검푸른 눈동자에서 순간적으로 야생적인 경계심과 방어적인 빛이 스쳐 지나가며 오미누스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이내 아이가 잠들어 있는 집을 돌아보며 그 감정을 억눌렀다. 설명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과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다시 자신의 인간 상반신과 이질적인 하반신을 번갈아 가리키며 더듬거렸지만 끝내 제대로 된 소리를 내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오미누스는 그녀의 고통스러운 몸짓에서 많은 것을 읽어냈다. 그녀의 현재 모습은 단순한 부상이나 저주가 아닌 더 근본적인 변화의 결과라는 것을. 그리고... 그 변화의 원인에는 아이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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