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 된 온정, 엇갈린 발길 (5)

연민

by 이샤라

오미누스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후회해?"


낮고 차분한 목소리에 이형의 존재가 고개를 들었다. 질문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오미누스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의 텅 빈 듯하면서도 무언가를 갈망하는 눈동자 속에는 이전에 느꼈던 단순한 동질감을 넘어선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자신과 같은, 세상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선 존재만이 가질 수 있는 그림자였다.


이형의 존재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아주 힘겹게, 갈라진 목소리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니."


잠든 아이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이형의 존재의 검푸른 눈동자에는 슬픔이나 후회가 아닌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비록 기형적인 모습일지언정, 아이를 지키는 지금 이 순간을 부정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대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오미누스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진실은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 속에서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감정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그것은 '지키고 싶은 이'를 향한 맹목적이고도 강렬한 의지였다. 절벽 아래에서 서로를 지키려 했던 시즈와 아로스가 이런 마음이었을까. 이토록 절박하고,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했을까. 오미누스는 차갑게 식어 있던 자신의 가슴 한구석에서 아주 작고 따뜻한 불씨가 다시 한번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밤은 깊어갔고, 모닥불은 사그라들 기미 없이 타올랐다. 세 사람의 시간은 그렇게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타닥거리는 불꽃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단조로운 파도 소리만이 전부인 듯했다. 오미누스는 모닥불의 온기에 기대앉아 자신도 모르게 눈꺼풀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이 낯선 평온함에 취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때, 오미누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누군가 자신들을 주시하는 듯한 불쾌한 시선과 함께, 피부를 껄끄럽게 만드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밤바람에 섞여 코끝을 찌르는 듯한 불쾌한 악취는 단순한 바다도, 모래의 냄새가 아니었다.


오미누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등 뒤의 칼날로 손을 가져갔다. 푸른 시선이 어둠이 내려앉은 바위 지대 너머를 향했다.


"...느껴져?"


오미누스가 낮게 묻자, 이형의 존재도 무언가를 감지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검푸른 눈동자에는 순식간에 아이를 향한 깊은 불안감과 다가오는 위협에 대한 본능적인 적개심이 뒤섞여 일렁였다.


"빨리 집으로 가."


오미누스의 다급한 말에 이형의 존재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즉시 몸을 돌려 아이가 잠든 오두막을 향해 미끄러지듯 달려갔다.


바로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수십의 꿈틀거리는 울루니아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뒤틀린 네 개의 다리로 땅을 짚고 선 그것들은 혼종처럼 여러 생물의 부분이 기괴하게 융합되어 있었다. 문어의 촉수 같은 부속지들이 몸 곳곳에서 꿈틀거렸고, 점액질로 뒤덮인 몸체에는 얼굴이라고 부를 만한 부분은 없었다. 놈들이 뿜어내는 악의적인 기운이 해안가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선두에 있던 놈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자, 칼날을 집어 든 오미누스는 땅에 끌릴 듯 칼끝을 들어 올리며 낮게 자세를 잡았다. 첫 번째 울루니아가 점액질을 흩뿌리며 덮치는 순간, 오미누스의 몸이 회전했다. 거대한 칼날이 그리는 호선은 단순한 베기가 아니었다. 칼날의 무게와 회전력을 실어 휘두르는 파괴 그 자체였다.


콰득———


처음 달려든 놈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몸통이 반으로 갈라졌다. 뼈와 내장이 뒤섞인 육편이 사방으로 튀면서 뒤를 따르던 놈들이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놈들은 동족의 죽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오미누스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거대한 칼날의 무게를 역이용하면서 폭풍처럼 놈들의 무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칼날이 땅에 부딪혀 불꽃을 튀기며 궤적을 바꾸었고, 올려 벨 때는 육중한 칼날이 놈들을 통째로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내려찍을 때는 땅이 울릴 정도의 충격과 함께 놈들의 갑각과 뼈가 박살 났다.


칼날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둔기에 가까운 무기의 움직임에 울루니아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갔다. 새까만 점액과 비릿한 악취가 해안가를 뒤덮었지만 오미누스의 움직임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놈들의 날카로운 발톱이 망토를 찢고 붕대에 감긴 팔을 스쳤지만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수십 마리에 달하던 무리는 순식간에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오미누스가 잠시 숨을 고르며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순간—


"으아아앙—!"


오두막 쪽에서 터져 나온 아이의 울음소리에 오미누스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돌아갔다. 어설픈 나무 지붕의 중앙부는 박살 난 듯 구멍이 뚫려있었고, 그 구멍 주변으로는 미처 자신이 처리하지 못한 울루니아 몇 마리가 꿈틀거리며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때, 박살 난 지붕 위로 무언가가 불쑥 솟아올랐다가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지붕 위를 기어오르던 울루니아의 머리였다. 깔끔하게 잘린 단면에서는 역겨운 체액이 뿜어져 나왔다. 이어서 또 다른 놈이 지붕의 구멍 아래에서부터 위로 꿰뚫린 채 솟구쳤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놈의 턱 아래부터 정수리까지 단번에 관통한 듯했고, 꿈틀거리던 네 개의 다리는 허공에서 힘없이 늘어졌다. 꿰뚫린 시체는 잠시 지붕에 매달려 있다가 이내 경사를 따라 힘없이 굴러 떨어졌다.


오두막 안에서 이형의 존재가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몇몇 놈들이 집요하게 집 안으로 파고들려 했고, 아이의 울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바로 그 찰나—


우지끈———


가뜩이나 부실했던 집의 입구가 안쪽에서 터져 나오듯 박살 났다. 문짝이었던 나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면서 그 사이로 또 다른 울루니아 두세 마리가 비집고 들어갔다. 오미누스는 즉시 몸을 돌려 집을 향해 달려가려 했지만 남아있던 스무 마리 남짓한 울루니아들이 일제히 가로막았다. 이전의 무질서한 공격과는 달리 놈들은 마치 명령이라도 받은 듯, 오미누스가 집으로 가는 길목을 완벽하게 차단하며 벽처럼 늘어섰다. 그들의 움직임에는 명백히 '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 광경에 불길한 직감이 오미누스의 뇌리를 스쳤다. 아이의 목에 걸어주었던 혈석. 비록 미약할지라도 엘라마의 힘이 담긴 순수한 대지의 기운을 품은 돌이 이 심연의 존재들을 끌어들인 것일까, 혹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그것을 노리고 이 습격을 계획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의 어설픈 온정이 비극을 부른 것인가.


"저리 비켜——!"


오미누스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칼날이 다시 한번 어둠을 갈랐다.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르고, 훨씬 더 잔혹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점점 더 처참하게 부서져 가는 집을 향해 있었다. 앞을 가로막는 울루니아들은 무자비하게 베어 넘겼다. 오미누스는 길을 막는 모든 것을 그저 도륙할 뿐이었다. 칼날에 살점이 묻어 무뎌지면 부러진 단면으로 내려찍었고, 발길을 막는 시체는 그대로 짓밟고 나아갔다. 온몸은 새까만 점액과 자신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음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놈들도 필사적이었다. 마치 오미누스를 붙잡아 두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듯 팔이 잘려나가도 몸통으로 달려들었고, 다리가 부러져도 꿈틀거리며 그의 발목을 잡으려 했다.


그 와중에도 오미누스의 눈에는 집 쪽의 광경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쿠웅———


오두막 한켠을 지탱하던 바위벽이 통째로 쓰러졌다. 먼지 속에서 이형의 존재가 기형적인 팔로 울루니아 하나를 집어던지는 모습이 보였다. 내던져진 놈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바위에 부딪혀 터져 버렸고, 부서진 창문 틈으로 또 다른 놈의 시체가 반쯤 꿰뚫린 채 튕겨져 나왔다.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오미누스가 밖에서 벌이는 학살극만큼이나 격렬했다. 하지만 오두막은 점점 더 빠르게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지붕은 거의 내려앉았고, 벽 곳곳에 구멍이 뚫렸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이제 거의 들리지 않았다. 공포 때문에 목소리마저 나오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상상하기 싫은 최악의 상황인 것일까.


오미누스는 이를 악물었다. 앞을 가로막는 마지막 남은 두 마리마저 칼날 아래로 허무하게 터져나가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처참하게 부서진 나무집을 향해 뛰어갔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이미 오래전에 멎어 있었다.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는 불길한 예감이 그의 온몸을 옥죄었다.


'아니야... 제발......'


오미누스는 박살 난 입구의 잔해를 거칠게 걷어차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비좁은 오두막 내부는 아수라장이었다. 사방이 울루니아들의 시체 조각과 검은 체액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비릿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 잔해들 한가운데에 이형의 존재가 등을 돌린 채 웅크리고 있었다. 등과 어깨에는 날카로운 발톱 자국이 깊게 패여 검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목이 쉰 듯한 기괴한 신음 소리만을 반복해서 흘리고 있었다.


"아... 아아아... 아아아아......!"


오미누스는 천천히 이형의 존재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품에 안고 있었다. 오미누스는 떨리는 시선으로 떨고 있는 어깨너머, 그녀가 감싸 안은 것을 보았다.


부서진 벽 틈으로 스며든 희미한 달빛 아래, 아이는 미동도 없이 안겨 있었다. 초록빛으로 빛났을 엘라마의 혈석은 아이의 가슴팍 위로 빛을 잃은 채 부서져 있었고, 달빛마저 그곳의 깊은 어둠은 온전히 비추지 못했다.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


오미누스의 눈이 커졌다. 숨 쉬는 법조차 잊은 듯, 그는 텅 빈 눈으로 아이의 실루엣을 응시했다. 저도 모르게 손이 아이를 향해 천천히 뻗어 나가는 바로 그 순간, 이형의 존재가 짐승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오미누스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깊은 슬픔과 불타는 증오, 완전한 절망이 뒤섞여 인간도, 울루니아도 아닌 무언가로 일그러져 있었다. 검푸른 눈동자에서는 폭포수처럼 검은 눈물이 흘러내렸고, 왼쪽 눈은 이미 완전히 검게 물들어 공허한 어둠만이 남아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형의 존재는 아이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면서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한 처절한 괴성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이 기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형상을 유지하던 상반신이 부풀어 오르며 찢겨나가더니, 그 안에서 날카로운 발톱과 강인한 근육으로 뒤덮인 검은 맹수와 같은 형상이 터져 나왔다.


오미누스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집이 무너져 내림과 동시에 완전히 변모한 이형의 존재가 잔해를 헤치고 그를 향해 다가왔다. 아이를 잃은 어미의 분노는 그녀를 완벽한 파괴의 화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검은 눈물을 폭포처럼 쏟아내면서 오직 눈앞의 오미누스를 향한 원초적인 적의만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오직 상실의 고통만이 남아 모든 것을 부수려 할 뿐이니.


오미누스는 그런 그녀를 해치고 싶지 않았다. 고독과 외로움으로 가득했던 삶 속에서 자신과 같은 감정을 나누었던 존재를 차마 자신의 손으로 벨 수 없었다.


"......이런다고, 그 애가 돌아오진 않아."


떨리는 목소리는 낮게 갈라져 있었다. 그것은 눈앞의 비극을 멈추려는 마지막 시도이자 부탁이었다. 하지만 이성을 잃은 이형의 존재에게 그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한번 귀를 찢는 듯한 절규를 내지르며 오미누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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