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폐된 사자의 신전
오미누스는 눈을 감았다. 아주 짧은 순간, 아이의 웃음소리와 그녀가 힘겹게 답했던 '고마워'라는 대답이 뇌리를 스쳤다. 다시 눈을 떴을 때, 흔들리던 눈동자에는 슬픔보다 무거운 단호함이 맺혀 있었다. 거대한 칼날을 고쳐 쥔 오미누스는 달려드는 그녀를 향해 정면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퍼어어억——————
육중한 칼날이 변이 된 가슴팍 중앙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단단한 흉골이 부서지고 심장을 꿰뚫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이형의 존재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꿰뚫린 상처에서 검은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음에도 이형의 존재는 쓰러지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자신의 꿰뚫린 가슴팍 아래를 기형적인 손으로 감쌌다. 마치 그 안에 여전히 아이가 살아 있다는 듯 마지막까지 지켜내려는 듯한 필사적인 몸짓이었다.
잠시 후, 거대한 몸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맹수의 형상이 신기루처럼 스러지자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던 하반신은 힘없이 바닥으로 녹아내리듯 잦아들었다. 그녀는 원래의 기괴하지만 익숙했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꿰뚫린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피와 검은 액체로 온몸이 범벅이 된 상태였지만,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품 안에 '아이였던 무언가'를 으스러질 듯 꼭 껴안고 있었다. 그녀가 쓰러진 자리 옆, 축축한 모래 위로는 빛을 완전히 잃어버린 혈석 조각만이 남아 있었다. 오미누스는 말없이 혈석을 집어 들었다. 손안에 남은 것은 싸늘한 돌의 감촉뿐이었다. 오미누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제는 완전히 꺼져버린 모닥불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따스했던 불꽃, 아이의 웃음소리, 그 안에서 피어났던 유대감. 모든 것이 한낱 재가 되어버렸다. 역시... 온기 같은 건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는 사치였을 뿐일까.
잿더미 속에서 더 이상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밤바다는 여전히 조용했고, 세상에는 다시 그 혼자만 남겨져 있었다.
차가운 안개 입자가 뺨을 스치는 감각에 아로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자 온몸의 뼈마디가 삐걱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바트라와의 짧은 접전과 환영이 남긴 여파였다.
아로스가 몸을 일으킨 곳은 단단한 석재 바닥 위였다. 하지만 신계의 대리석과는 다른, 풍파에 거칠게 마모된 질감이었다. 사방은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회색빛 안개에 휩싸여 있었으며, 발밑으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허공을 가르는 바람 소리와 멀리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인지 모를 음산한 울림만이 전부였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 그는 자신이 거대한 다리 위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발을 디딘 곳부터 저 안개 너머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돌다리. 폭은 제법 넓었지만, 난간은 대부분 부서져 나갔고 바닥 곳곳에는 금이 가거나 아예 무너져 내려 아슬아슬하게 철골 구조물만 남아있는 구간도 보였다. 마치 거인의 뼈대처럼, 혹은 세상의 끝에 걸쳐진 위태로운 길처럼. 얼마나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돌 틈 사이사이에는 이름 모를 거대한 검푸른 덩굴들이 달라붙어 음울한 기운을 더했다.
고개를 들어 안개 너머를 응시하자 아주 희미하게, 저 멀리 거대한 건축물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보였다. 무너져 내린 거대한 파편들이 하늘에 떠 있는 듯 기괴하게 뒤엉켜 있었고, 육중하고 폐쇄적인 성벽과 뒤틀린 구조물들이 마치 추락하는 고대 도시의 잔해처럼 위태롭고 불길했다. 화려함보다는 잊혀진 슬픔과 고독함이, 신성함보다는 무거운 침묵과 영원한 유폐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
유폐된 사자의 신전. 저곳이 바트라가 말한 장소일 터였다.
아로스는 손바닥을 펼쳐 아직 희미한 온기를 품고 있는 진홍빛 보주를 바라본 뒤, 망설임 없이 안갯속 실루엣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다리는 상상 이상으로 길고 험했다. 구멍과 균열로 가득한 다리는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듯한 돌조각들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안개를 가르며 불어오는 강풍은 몸을 휘청이게 만들었다. 방향 감각마저 흐릿했지만, 그는 오직 저 멀리 보이는 신전의 실루엣만을 따라 나아갔다. 이곳에는 해와 달도 없는 듯, 오직 자욱한 안개와 바람 소리만이 영원처럼 이어졌다.
마침내, 발밑의 다리가 끝나는 지점이 안갯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아치형 관문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짙은 안개 때문인지 관문은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매끄러운 표면처럼 보였던 관문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깊게 팬 균열과 마모된 흔적이 가득했다. 다리에 비하면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운 상태였다. 주변은 여전히 짙은 안개에 휩싸여 있어 관문 너머나 옆으로 무엇이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관문 앞에는 굳게 닫힌 거대한 석문이 버티고 있었다. 문에는 손잡이나 열쇠 구멍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문의 정중앙, 아로스의 눈높이쯤 되는 위치의 기다란 바위에 움푹 파인 홈이 하나 있었다. 아로스는 손에 쥔 진홍빛 보주를 들어 올렸다. 홈의 크기와 모양이 보주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보주를 홈에 끼워 넣었다.
쿠구구구궁———
보주가 제자리를 찾자, 신전 전체가 울리는 듯한 깊고 무거운 소리가 다리 전체를 진동시키며 울려 퍼졌다. 마치 열쇠로 자물쇠를 따듯, 보주가 박힌 기다란 돌이 바닥으로 내려가면서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석문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문틈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빛이 아닌, 더욱 짙고 서늘한 어둠이었다.
석문이 완전히 열린 신전 내부는 예상대로 처참한 아수라장이었다. 천장의 절반 가량은 거대한 충격을 받았는지 뻥 뚫려 있었고, 그 구멍으로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흘러들어와 내부 시야를 희미하게 가렸다. 부서진 천장의 거대한 석재 파편들이 바닥 곳곳에 산처럼 쌓여 있었으며, 그 사이로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괴된 기둥의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신전을 그대로 꿰뚫고 추락한 듯한 광경이었다.
스산한 바람이 텅 빈 공간을 울리며 지나가자, 아로스는 검을 뽑아 든 채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발밑에는 딱딱한 석재가 아닌 어딘가 질척하고 부서진 갑각 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이자, 바닥을 뒤덮고 있는 것은 수많은 이질적인 파편과 점액질의 흔적들이었다. 그 너머로 집채만 한 크기의 날개를 지닌 울루니아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봐왔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였다.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것이 거의 없어 정확한 모습을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바닥에 처참하게 나뒹구는 찢겨진 날개 막 하나의 크기만으로도 아로스가 평원에서 마주했던 놈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시체들의 상태는 제각각이었다. 어떤 것들은 날카로운 것에 의해 사지가 절단되거나 몸통이 도륙난 채 주변의 바닥을 검보랏빛 부패로 물들이고 있었다. 또 다른 것들은 마치 거대한 벼락에 직격 당한 듯 온몸이 숯덩이처럼 새까맣게 타버린 채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아로스는 조심스럽게 시체 중 하나에 가까이 다가갔다. 거대한 날개의 잔해에는 여전히 희미한 열기가 남아있었고, 그는 불타버린 외피의 단면을 유심히 살폈다. 푸른빛이 감도는 고열로 인해 모든 것이 녹아내린 그 중심에는 익숙한 형태의 상흔이 남아 있었다. 마치 시즈가 사용했던 고룡의 벼락과 같은 흔적이었다. 아로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정황상 이 정도의 존재들과 싸웠을 존재눈 단 하나뿐이었다.
아우로라의 또 다른 주인이자 아텐시아의 쌍둥이 형제, 아틸리엔. 그가 어째서 이곳까지 와서 이 끔찍한 전투를 벌였던 것일까. 이 정도의 존재들을 상대로 혼자 싸웠단 말인가.
아로스는 시체 더미를 넘어 신전 안쪽으로 향했다. 바닥은 평탄했지만 중앙으로 갈수록 완만하게 경사를 이루며 높아지고 있었다. 넓고 낮은 계단들이 원형으로 펼쳐지며 거대한 중앙 제단처럼 보이는 곳으로 이어지는 공간은 마치 타리안의 콜로세움 경기장 중심부 같기도 했다. 그곳으로 향하는 계단 위에도 거대한 날개 달린 시체들이 몇 구 더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같이 전부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모습이었다. 아로스는 그 잔해들을 보며 깨달았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자신이 지금까지 겪어온 그 어떤 싸움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마치 신화 속 거대 존재들의 처절한 사투였음을. 발 디딜 틈 없이 널린 파괴의 흔적들이 그 격렬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마침내, 아로스는 신전의 가장 높은 중앙부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네 방향으로 뻗어 나온 거대한 쇠사슬의 잔해만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사슬이 끊어진 자리 주변으로는 오래된 핏자국이 검게 말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있어야 할 존재는 보이지 않았다. 바트라가 유폐시켰다는 그의 옛 사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로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앙 제단 주변은 천장에서 떨어진 신전의 거대한 석재들과 시체 파편으로 더욱 어지러웠다. 그는 묵묵히 잔해 더미를 헤치며 유폐된 사자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거대한 날개 아래 깔린 잔해를 들추고, 무너진 기둥 파편을 밀어내며 나아갔다.
한참을 뒤진 끝에, 마침내 아로스는 잔해 더미 한가운데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땅바닥에 처박힌 거대한 울루니아의 머리로 보이는 것의 정수리에 창을 꿰어 박은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었다.
무릎을 꿇고 있음에도 아로스와 키가 거의 비슷해 보이는 거구였다. 바닥까지 끌리는 낡고 해진 로브는 난도질당한 듯 수없이 찢겨 피로 얼룩져 있었다. 찢어진 로브 사이로 드러난 곳은 깊게 팬 치명적인 상처들이 가득했고, 그 어디에서도 살아있는 자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로브 밖으로 회색빛 갈기가 삐져나와 있었고, 푹 눌러쓴 후드 아래로는 닳아버린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희미하게 보였다. 그 모습은 심연에서 보았던 추락한 사자, 루드레스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둘이 형제였던 걸까. 바트라가 말한 옛 사자가 바로 이 자일까. 아로스는 숨을 죽이고 그의 상태를 살폈다. 미동조차 없는 모습은 이미 죽은 지 오래된 시체처럼 보였지만 어딘가 기묘한 기운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단순한 죽음이 아닌, 무언가에 의해 강제로 붙들려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로스는 품속에서 환시의 등불을 꺼내 들었다.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등불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심연에서 루드레스의 유해에 이 등불을 사용했을 때, 예기치 않게 바트라의 불꽃이 터져 나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자에게도 같은 반응이 일어날까. 아니면... 이곳에 갇힌 그의 영혼이 등불의 빛에 반응하여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위험을 불러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할 수 있는 일은 달리 없었다. 바트라는 진실을 물으라 했고, 그 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눈앞의 이 존재뿐이었다.
망설임은 짧았다. 결심을 굳힌 아로스는 환시의 등불을 무릎 꿇은 사자의 미동 없는 형체를 향해 들어 올렸다. 희미한 빛이 사자의 몸에 닿는 순간, 등불은 격렬하게 반응하며 눈부신 청록색 광휘를 터뜨렸다.
순식간에 신전 전체를 집어삼킬 듯이 팽창한 광휘와 함께 아로스의 의식 또한 그 강렬한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주변의 모든 풍경이 녹아내리며, 그는 다시 한번 과거의 환영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