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 된 온정, 엇갈린 발길 (7)

사자의 기억

by 이샤라

이번 환시는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안개처럼 흐릿하지도, 세상이 찢어지는 듯한 이질감도 없었다. 마치 자기 자신이 환시 안의 시간과 장소에 온전히 존재하는 듯이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열리고 있었다.


아로스는 더 이상 폐허가 된 신전의 중심에 서 있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모든 것이 달랐다. 무너졌던 천장은 온전했고, 바닥을 뒤덮었던 시체와 잔해들은 흔적도 없었다. 다만 중앙 제단을 둘러싼 네 개의 기둥에는 여전히 거대한 쇠사슬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끝은 중앙에 무릎 꿇은 거구의 사자의 양 손목과 발목에 채워져 있었다. 사슬의 길이는 약간의 움직임은 가능한 듯 넉넉했지만 벗어날 수 없는 족쇄임은 분명했다. 그의 양옆으로는 죄인을 감시하듯 거대한 신의 석상 두 개가 버티고 서 있었다. 하나는 날카로운 창을, 다른 하나는 육중한 핼버드를 쥐고 있었는데 예리한 날의 끝은 그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직접 닿지 않았지만 그 모습만으로도 이 사자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를 짐작케 했다.


그의 영혼에 겹쳐진 듯, 아로스는 사자의 감각과 생각을 읽어내고 있었다. 이곳에 유폐된 지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을 터였다. 끝없는 고독과 회한으로 사무친 사자에게 있어, 모르티아의 속삭임에 넘어가 저질렀던 그날의 탐욕스러운 죄악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낙인처럼 그의 영혼에 새겨져 있었다. 불의 신의 자비가 아니었다면 자신 또한 형제와 다른 동료들처럼 이계로 추방당했을 테니. 이곳에서의 속죄는 응당 치러야 할 당연한 대가였다.


오늘도 사자는 미동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를 곱씹고 있었다. 자욱한 안개만이 영원처럼 신전 주위를 감싸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사자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의 감각이 아주 멀리 떨어진 대륙 중심부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불길한 파동을 감지했다. 안개 때문에 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대지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무언가 근원적인 것이 뒤틀리는 듯한 불쾌한 기운. 마치 과거, 자신이 엘나를 더럽혔을 때와 유사한 종류의 파장이었다.


불안감이 사자의 마음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체감상 반나절이 채 되지 않았을 무렵—그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콰아아아아앙————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부터, 소리 없는 거대한 충격파가 신전 전체를 강타했다. 바닥이 통째로 뒤흔들리더니 사자의 머리 위에서 멀리 떨어진 천장 일부가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먼지와 석재 파편이 비처럼 쏟아지자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지만 충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사슬이 연결된 기둥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붉은 광원, 바트라의 힘이자 자신을 속박하고 감시하던 표식이 갑자기 깜빡거리더니 완전히 꺼져버렸다.


'바트라께 대체 무슨 일이......!?'


경악이 사자의 사고를 마비시키는 찰나, 또 다른 굉음이 머리 위에서 터져 나왔다. 방금 전보다 훨씬 더 가까운 곳이었다. 붉은 광원이 꺼지면서 통제력을 잃은 듯, 신전 주위를 맴돌던 거대한 감시탑 하나가 천장을 뚫고 그의 바로 앞쪽 바닥으로 추락했다. 거대한 석조 구조물이 박살 나며 일으킨 먼지 구름이 사자를 덮쳤다.


"크헉...! 콜록, 콜록......!"


사자는 잔해 속에서 몸을 일으키며 기침을 터뜨렸다. 대체 무슨 재앙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엘나가 사라졌을 때와 맞먹는,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혼돈이었다. 바트라께서 대체 무슨 일을 당하셨기에 속박의 힘마저 끊어진 것일까. 그는 자신을 유폐시킨 장본인인 동시에 자신을 이계로 보내지 않으면서 유일한 자비를 내린 신이기도 했다. 불안과 걱정이 뒤섞인 혼란 속에서 사자는 멍하니 추락한 감시탑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 눈앞의 허공에서 강렬한 청록색 빛이 터져 나왔다. 너무나 눈부신 광휘에 사자는 반사적으로 한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빛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지만 그 자리에는 무언가가 떠 있었다.


불규칙하게 깨진 유리인 듯하면서도 원석처럼 보이는 물체는 평범한 돌이 아니었다. 과거, 자신이 두려움과 탐욕에 눈이 멀어 상처 입혔던 세계수의 정수, 엘나의 핵이었다. 비록 조각나고 힘을 잃은 모습이었지만 그 근원적인 기운만은 숨길 수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어째서 대지의 심장이 자신과 같은 죄인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 뇌리를 파고드는 동시에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엘나가 스스로를 감추기 위해 이곳을 택했음을. 그리고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이자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강렬한 직감을.


사자가 경외와 혼란 속에서 엘나의 핵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가 짙은 안개를 가르면서 유성처럼 하늘로부터 강림했다. 하나는 눈부신 청푸른 은빛 비늘을 번뜩이며 강력한 마력의 파동을 뿜어내는 고룡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의 등에 올라탄 인간 기사였다. 그들의 등장은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던 신전의 공기를 단숨에 뒤흔들었다. 사자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고룡의 형상을 한 존재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우로라의 또 다른 주인이자, 마법의 지배자 아틸리엔. 그의 곁을 함께하는 안개의 땅 최강의 필멸자, 용기사 발터. 그들이 어째서, 무엇 때문에 이 버려진 유폐지까지 직접 찾아왔단 말인가.


「오랜만이군, 루드비히.」


아틸리엔의 목소리가 사자의 의식 속으로 직접 울려 퍼졌다.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다.


'루드비히... 저 사자의 이름인가.'


아로스는 생각했다.


루드비히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며 답했다.


"마법의 지배자시여... 이곳 영겁의 유폐지에는 어인 일로 강림하셨나이까."


「실로 오랜 세월이 흘렀지.」


아틸리엔의 시선이 루드비히의 쇠사슬과 신전의 황량함을 훑자, 그의 의식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고룡의 의식은 점점 차갑고 날카롭게 변해갔다.


「심상치 않은 대륙의 균열이 느껴져 근원을 쫓아왔다만... 설마 그 끝에서 네놈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곧이어 서슬 퍼렇게 불타오르는 시선이 루드비히의 손 위에 떠 있는 엘나에 닿았다.


「말해보아라. 어찌하여... 대지의 심장이 네놈의 손아귀에 있는 것이지?」


아틸리엔의 의식에 분노가 실리자, 그의 등에 올라타 있던 발터가 말없이 손에 쥔 거대한 창을 고쳐 잡았다. 창끝에서 흘러나오는 살기만으로도 신전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루드비히는 담담하게 그들의 시선을 마주했다. 수천 년의 유폐 생활이 그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을지언정, 과거 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사자의 마지막 긍지마저 사라지진 않았다.


"마법의 지배자시여, 그것은 오해—"


루드비히가 상황을 설명하려 입을 여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눈앞에 떠 있던 엘나로부터 갑자기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순수하고 압도적인 힘의 파동이 터져 나오더니 신전 전체를 환하게 밝혔고, 이어서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닌 영혼에 직접 새겨지는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의 아이들이여.
생명이 닿지 않은 깊은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라.
빛바랜 심장이 필멸자의 육신으로부터 말미암아,
모든 것을 꿰뚫는 저 너머에서 진실을 찾는 이를 기다릴 것이다.


목소리가 잦아들자, 루드비히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하니 엘나의 핵을 바라보았다. 아틸리엔과 발터 역시 예상치 못한 현상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와중, 엘나로부터 다시 한번 눈부신 빛줄기들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신전을 비추던 광휘와는 달랐다. 마치 씨앗을 뿌리듯, 수십 갈래의 가느다란 빛줄기가 안개를 뚫고 신전 밖 저 멀리 대륙을 향해 순식간에 쏘아지듯 뻗어 나갔다가 사라졌다. 빛줄기가 사라진 엘나는 이전보다 조금 더 희미해진 듯했다.


"이... 이 무슨......?"


루드비히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발터가 조용히 고개를 들어 아틸리엔을 바라보았다.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 의미심장한 발터의 시선을 받은 아틸리엔은 눈을 지그시 감더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잠시 후, 천천히 눈을 뜬 그의 시선은 다시 루드비히와 그 앞의 엘나에게 향했다.


「대지의 심장이... 스스로 뜻을......?」


아틸리엔의 의식이 조용히 울려 퍼지는 바로 그 순간—


콰과과광————


멀쩡했던 신전 천장의 가장자리 부분이 안쪽으로 폭발하듯 무너져 내렸다. 신전의 파편들과 함께 악몽 속에서나 나올 법한 거대한 괴물 하나가 안개를 헤치며 아래로 강하했다. 박쥐의 것과 유사하지만 살점 없이 뼈대만 남은 듯한 거대한 날개, 갑각류처럼 딱딱해 보이는 외피, 그리고 얼굴 부분은 통째로 벌어진 아가리처럼 무수한 이빨만이 가득한 끔찍한 형상이었다.


'울루니아......!'


아로스는 즉시 알아차렸다. 지금까지 보았던 것들과는 또 다른 형태였지만 놈들의 근원적인 악의와 이질적인 기운과 동일했다. 울루니아는 루드비히의 손 위에 떠 있는 엘나를 향해 직선으로 돌진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아틸리엔의 거대한 몸체가 움직였다. 은빛 섬광처럼 날아오른 고룡은 울루니아의 날개 한쪽을 강력한 턱으로 물어뜯어 버렸다.


"캬아아아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균형을 잃은 괴물은 그대로 신전 기둥에 처박혔다. 육중한 충돌음에 기둥이 금에 가면서 잔해가 쏟아졌고, 울루니아는 부러진 날개를 늘어뜨린 채 잔해 더미 아래 깔려 버둥거렸다. 그러나 위협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천장의 부서진 구멍 너머, 안갯속에서 또 다른 두 마리의 울루니아들이 날카로운 뼈를 창처럼 앞세운 채 수직으로 낙하했다. 이번 목표는 명백히 아틸리엔이었다.


아틸리엔은 여유롭게 몸을 비틀어 낙하하는 괴물들을 피하며 하늘로 솟구쳤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작열하는 푸른 용염이 터져 나와, 울루니아 하나를 정통으로 집어삼켰다.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순식간에 재가 되어 흩뿌려졌다. 다른 한 마리는 이미 아틸리엔의 등 위에서 뛰어내린 발터가 처리하고 있었다. 발터는 허공에서 몸을 뒤집어 낙하하는 괴물의 머리 위로 번개처럼 파고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예리한 창이 망설임 없이 괴물의 관자놀이를 꿰뚫어버리자 놈은 짧은 경련과 함께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하여 처박혔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쿠르릉—— 쾅— 콰과과과광————


신전 천장 곳곳이 동시다발적으로 무너져 내리더니, 이번에는 수십 마리에 달하는 날개 달린 울루니아들이 안개와 함께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단 하나였다. 루드비히는 다급하게 엘나를 자신의 로브 품속 깊숙이 숨겼다.


그 순간, 발터가 땅에 착지하며 손에 쥔 창으로 루드비히를 속박하던 네 개의 쇠사슬을 단 일격에 모두 끊어냈다. 수천 년 만에 자유로워진 루드비히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옆에 서 있는 신의 석상이 들고 있던 육중한 핼버드를 뽑아 들었다. 루드비히의 손아귀에 쥐어진 핼버드의 날에서 희미한 빛이 발하는 듯했다.


사방에서 울루니아들이 쏟아져 내렸다. 아틸리엔은 하늘에서 용염을 퍼부었고, 발터는 땅 위에서 창을 휘두르며 접근하는 모든 것을 꿰뚫었다. 루드비히 역시 수천 년의 공백이 무색하게 거대한 핼버드를 휘두르며 자신과 엘나를 향해 달려드는 놈들을 쳐냈다. 오랜 세월 응축되었던 속죄의 분노가 그의 무기에 실리는 듯했다.


신전 내부는 순식간에 거대한 존재들의 격전지로 변했다. 부서진 석재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용의 불꽃과 정체 모를 점액질이 뒤섞여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아로스는 그 장대한 파괴의 현장을 숨죽인 채 지켜볼 뿐이었다.


그러나 격렬한 싸움 도중, 루드비히가 휘두르던 핼버드의 날 부분이 울루니아의 단단한 갑각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 버리면서 무기를 잃은 그에게 예리한 발톱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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