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 된 온정, 엇갈린 발길 (8)

이끌림

by 이샤라

바로 그 순간, 아틸리엔의 눈동자에서 맹렬한 푸른 불꽃이 터져 올랐다. 하늘을 향한 고룡의 포효소리와 동시에, 신전의 뚫린 천장 너머 하늘 전체에서 격렬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르르릉... 콰르르르릉————


수십 개의 푸른 벼락이 포화처럼 쏟아지자 아로스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텐시아의 마력을 받은 시즈의 벼락도 강력했지만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하늘 전체를 뒤덮으며 쏟아지는 파괴의 격류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사방으로 내리 꽂히는 벼락에 울루니아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푸른 불꽃에 휩싸여 순식간에 먼지처럼 타들어가며 쓰러졌다.


파괴적인 벼락 세례 뒤로 신전 내부는 순식간에 고요해졌지만 그 정적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틸리엔의 벼락에도 살아남은 몇몇 놈들이 잔해 속에서 꿈틀거렸고, 무너진 천장 너머로는 새로운 그림자들이 끊임없이 안개를 헤치며 날아들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단 하나, 루드비히가 품고 있는 엘나의 핵이었다.


"마법의 지배자시여!"


루드비히가 다급하게 외쳤다.


"엘나께서는... 스스로 자취를 감추길 원하십니다! 이대로 세상에 드러나서는 안 됩니다! 숨겨야만 합니다!"


사자의 간절한 외침과 동시에 아틸리엔의 시선이 발터에게 향했다. 발터는 서둘러 루드비히 앞으로 다가갔다. 루드비히가 품속에서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는 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 건네자, 그것을 조심스럽게 건네받은 발터는 다시 한번 도약하여 아틸리엔의 등 위로 올라탔다.


거대한 날갯짓과 함께 아틸리엔은 신전 바닥을 박차고 하늘로 솟구쳤다. 그들은 새로이 몰려드는 울루니아 무리를 뚫으며 무너진 천장의 구멍을 통해 순식간에 신전 밖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남아있던 모든 울루니아들 또한 아틸리엔과 발터의 뒤를 따랐다. 놈들은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본능처럼 엘나의 기운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냥 가게 둘 수는 없다......!'


루드비히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방금 전 부러졌던 핼버드의 날카로운 파편들을 집어 들고는 온 힘을 다해, 가장 후미에서 아틸리엔을 뒤쫓던 놈들 중 두 마리를 향해 정확하게 투척했다.


"궤에에엑———"


핼버드 파편이 날개 막과 몸통을 꿰뚫으면서 두 울루니아는 비명을 지르며 아래로 추락했다. 그 소란에 뒤따르던 몇몇 놈들이 잠시 주춤하며 속도를 늦추자, 루드비히는 지체 없이 옆에 서 있던 남은 신의 석상을 향해 달려가 손에 들린 거대한 창을 뽑아 들었다. 아틸리엔과 발터가 발목을 잡히지 않도록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것이 수천 년의 속죄 끝에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역할일 터였다. 그는 창을 고쳐 쥐고, 다시 날아오르려는 나머지 울루니아들을 향해 돌진했다. 남아있는 울루니아들 또한 일제히 루드비히를 향해 달려들었다. 사자의 움직임은 예전 같지 않았음에도 거대한 창을 휘두르는 기세만은 과거 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용맹함을 잃지 않았다. 창날이 허공을 가르며 놈들의 갑각을 부쉈고, 날카로운 발톱이 로브와 살점을 찢었다.


피와 검은 체액이 뒤섞여 바닥을 적셨다. 루드비히는 몇 번이고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쓰러지지 않았다. 오직 속죄를 위한 집념과 마지막 순간 자신을 찾아온 엘나의 뜻을 지켜내야 한다는 책임감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마침내, 루드비히의 앞에는 단 하나의 울루니아만이 남아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서 있는 루드비히의 온몸에는 죽음에 가까운 상처들이 가득했다.


"캬아아아아아————————"


마지막 남은 놈이 돌진하자, 루드비히는 남은 모든 힘을 끌어모아 창을 움켜쥐었다. 그는 자신을 향하는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 마지막 힘을 다해 도약하며 놈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그대로 창을 수직으로 내리꽂았다.


콰드득——— 콰앙————


창날이 놈의 단단한 두개골을 꿰뚫고 바닥까지 처박히는 소리와 함께, 놈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었다.


"헉... 허억......"


루드비히는 창자루에 기댄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의 상처에서 피가 쏟아져 내렸다. 힘이 빠져나갔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마지막 힘을 다해 창자루를 땅에 박아 몸을 지탱하려 했지만 다리는 말을 듣지 않았고, 시야마저도 점점 흐려졌다.


수천 년의 고독과 속죄, 그리고 아주 짧았던 마지막 싸움. 신전 안에는 더 이상 살아 움직이는 것은 없었고, 긴 세월 동안 내면을 짓눌렀던 죄책감이 아주 조금은 가벼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이 자신의 끝인가. 그래도... 마지막은 헛되지 않았으니.


환시를 지켜보던 아로스의 시야 또한 루드비히의 의식이 흐려지듯 점점 어두워졌다. 격렬했던 전투의 소음은 멀어져 가면서 눈부셨던 청록색 광휘는 희미한 잔상만을 남긴 채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이내, 모든 것이 완전한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천천히 눈을 뜬 아로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처음 보았던 폐허가 된 신전의 모습이었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울루니아에게 창을 꿰어 박은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루드비히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환시는 끝났다. 하지만 방금 전 목격했던 모든 감각과 정보는 생생하게 아로스의 정신에 각인되어 있었다. 조각난 대지의 심장, 영혼에 직접 울려 퍼졌던 여성의 목소리와 알 수 없는 예언. 그것을 지키기 어딘가로 날아간 고룡 아틸리엔과 용기사 발터, 그리고 그들을 쫓던 끔찍한 울루니아들.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15년 전, 카노라스의 탑에서 사라진 엘나. 라그나르가 이야기했던, 망가진 엘나를 보조하기 위해 신들이 만들었다는 '아나릴'. 그리고, 오르드의 언급대로 아틸리엔과 발터가 엘나의 핵을 가지고 향했다는 금역 너머 추방자들의 은신처. 모든 것이 하나의 그림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부서진 엘나의 조각난 힘은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바트라가 자신에게 '진실을 물으라' 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아로스는 루드비히의 시신 앞에서 잠시 묵념했다. 수천 년의 속죄 끝에 맞이한 그의 마지막은 결코 헛되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묵념을 끝으로 다시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쿠르르르르릉————


신전 전체가 무너져 내릴 듯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위태롭게 버티고 있던 천장의 남은 절반마저 굉음을 내며 아래로 쏟아져 내리더니, 거대한 석재 파편들이 아로스의 바로 옆으로 떨어지면서 박살 났다. 바닥마저 비명을 지르듯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고, 균열 틈새로는 차가운 바닷물이 솟구쳐 올라왔다. 신전 전체가 통째로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곳도... 끝인가.'


아로스는 검을 고쳐 쥐고 탈출로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때, 자신이 들어왔던 입구 쪽에서 강렬한 진홍빛 광채가 터져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거대한 석문을 열기 위해 사용했던 바트라의 보주였다. 보주를 끼워 넣었던 기다란 석판은 이미 바닥 아래로 쓰러져 사라진 지 오래였고, 이제 보주만이 허공에 떠서 마치 작은 태양처럼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보주 주변의 공간은 열기 때문에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바닥은 이미 발목까지 차오른 바닷물에 잠기고 있었고, 신전은 금방이라도 완전히 붕괴될 기세였다. 아로스는 쏟아지는 잔해와 솟구치는 물살을 헤치며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불타는 보주 앞에 도달한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작열하는 열기가 손바닥을 태우는 듯했지만 아로스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보주를 움켜쥐었다.


보주를 움켜쥔 순간,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진홍빛 섬광이 다시 한번 터져 나왔다. 이전의 전송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격렬한 힘의 파동이 그의 온몸을 강타했다. 무너져 내리는 신전의 굉음과 쏟아지는 바닷물 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지고, 마치 영혼이 육체에서 뜯겨져 나가는 듯한 격렬한 감각이 덮쳐지는 동시에 아로스는 메마른 대지 위로 내동댕이쳐졌다.


진홍빛 섬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손안에 느껴졌던 보주의 감촉 또한 마찬가지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킨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지평선 너머로 끝없이 이어진 듯한, 뜨거운 열기가 아른거리는 불꽃의 고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광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본래대로라면 거대한 불의 장벽이 타오르며 고원과 평원의 경계를 이루고 있어야 했지만, 장벽은 마치 부서진 성벽처럼 곳곳이 허물어져 있거나 불길이 눈에 띄게 약해진 모습이었다. 그 무너진 불의 틈새를 통해 검은 강물과 같은 끔찍한 무리가 고원을 향해 끝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파도의 악마들이었다.


아로스의 표정은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 수는 시스테나 전선에서 보았던 것과는 비교조차 불가능했다. 지평선을 뒤덮을 듯한 검은 물결이 대지를 삼키며 저 멀리 보이는 불의 도시, 이그니카를 향하여 흘러가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꺼지지 않은 불의 장벽 잔해에 닿은 선두의 것들은 비명을 지르며 불타 재가 되었지만, 뒤따르는 무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동족의 시체를 밟고 넘어 그 틈을 비집고 나아갔다.


동시에, 이그니카 쪽에서는 하늘을 붉게 물들일 정도의 맹렬한 저항이 펼쳐지고 있었다. 비록 거리가 멀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대한 불덩이들이 밤하늘에 유성우처럼 쏟아져 파도의 악마들 무리 속에서 작렬했고, 수없이 많은 불화살 혹은 불타는 투창 같은 것들이 쉴 새 없이 날아가 검은 물결을 태워 없앴다.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지만 저 끝없는 숫자를 언제까지 막아낼 수 있을까. 노아와 아마룬은 무사할까. 오르드를 비롯한 이그니카의 거인들이 도시를 지켜낼 수 있을까.


유폐된 신전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검은 물결이 도시를 삼키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야 한다는 조급함과 자신에게 주어진 더 큰 사명 사이에서 그의 마음이 복잡하게 얽혔다. 눈앞의 참상을 외면하고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가. 하지만 짧게나마 인연을 맺었던 이들을, 저 불길 속에서 스러져갈지도 모를 생명들을 외면할 수 있을까.


그때, 갑옷 틈새, 혹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미약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아로스가 의아함에 시선을 내리기도 전에, 한 줌의 투명한 빛무리가 그의 가슴팍에서 스며 나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빛은 마치 길을 재촉하듯 아로스의 시야 앞에서 맴돌더니 이내 한 곳을 향해 쏘아지듯 날아갔다. 저도 모르게 그 궤적을 쫓던 아로스의 시선이 근처의 거대한 바위 표면에 멈췄다.


처음에는 분명 아무것도 없던 곳이었다. 하지만 다시 그곳을 보았을 때는 공간의 뒤틀림 소리와 함께 바위 표면 위로 어두운 동굴 입구가 소용돌이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굴 안쪽에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과 함께 이전에 몇 번이고 경험했던 영혼의 잔광과도 같은 익숙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마르프록스 산맥에서도, 웰리드 강에서도, 그리고 안갯속 밑바닥에서도 자신을 이끌었던 바로 그 기운.


아로스는 저도 모르게 동굴로 향했다. 보이지 않는 실에 이끌리듯, 거부할 수 없는 강한 힘이 그를 동굴 안으로 잡아당기는 듯했다. 이 미지의 부름을 따라야 한다는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짧은 갈등이 스쳐 지나갔지만, 발걸음은 이미 동굴의 어둠 속을 향해 내딛고 있었다. 누군가의 인도인지, 아니면 또 다른 운명의 장난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이끌림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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