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 된 온정, 엇갈린 발길 (9)

비참한 재회

by 이샤라

차가운 돌바닥의 냉기가 등 뒤로 스며들었다. 희미한 분홍빛 불빛만이 감도는 어둡고 축축한 감옥아래, 시즈는 텅 빈 눈으로 얼룩진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름지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뺨과 목덜미에 들러붙었고, 한때 그녀의 왼쪽 눈을 가렸을 가면은 산산조각 나 바닥에 나 뒹굴었다.


그 아래 드러난 왼쪽 눈동자의 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용성당에서의 세례 이후 푸른 불꽃처럼 타오르던 신비로운 빛은 빛바랜 잿빛 유리구슬처럼, 아무런 감정도 의지도 비추지 않는 공허함만이 남아 있었다. 빛과 함께 시야마저 잃어버린 휑한 동공은 더 이상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초점을 잃은 시선뿐이었다.


몸 위로는 전신을 짓누르는 역겨운 무게와 거친 숨소리, 주변은 땀과 오물이 뒤섞인 악취로 가득했다. 벌써 며칠째인지, 시간 감각마저 무뎌진 채 반복되는 짐승 같은 탐욕 속에서 시즈의 정신은 육체로부터 까마득히 멀어져 있었다. 찢어진 의복 사이로 드러난 피부 곳곳에는 멍들고 할퀴어진 끔찍한 흔적들이 가득했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은 상대의 움직임에 맞춰 속절없이 흔들렸다. 위에서 헐떡이는 간수가 몇 번째 놈인지 알 수도 없었다. 탐욕스럽게 시즈의 몸을 유린하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간수는 땀에 젖은 얼굴로 그녀의 귓가에 비웃음을 흘렸다.


"헤헤... 고룡의 힘을 다루는 무녀라더니... 밑에서는 그냥 똑같은 년이잖아?"


하지만 시즈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저 숨 쉬는 살덩이가 되어 이 지옥 같은 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릴 뿐, 눈꺼풀을 깜빡일 힘조차 없었다. 텅 빈 시선은 여전히 초점 없이 천장의 어둠만을 향했다.


바로 그때였다.


쨍그랑—— 챙——


쿠당탕——


"——크아아악!"


감옥 복도 쪽에서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날카로운 칼날이 맞부딪히는 소리, 무언가 부서지는 굉음이었다. 난데없는 비명 소리들이 뒤섞여 희미한 불빛 너머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자, 시즈 위에 올라타 있던 간수는 욕정을 채우던 움직임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씨발, 뭐야?"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지금 도시에는 병력 대부분이 이그니카로 향했을 터였다. 이런 외곽 감옥까지 소란이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주교가 벌써 돌아온 것인가? 아니면......


간수는 투덜거리며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너저분하게 벗어 내렸던 바지를 꿰어 입었다. 문 쪽으로 향하며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대체 뭘 하고 있길래—"


궁시렁거리며 감옥 문을 향해 몸을 돌리려는 순간, 그의 등 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소리 없이 일어섰다.


콰앙————


간수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살기를 미처 인지하지 못한 사이, 피칠갑을 한 아로스의 괴력에 감옥의 철문이 안쪽으로 찌그러지며 튕겨져 나갔다.


"......!"


간수는 예상치 못한 침입자의 등장에 잠시 얼어붙었다. 살기 어린 기사의 시선이 자신을 지나쳐 누워있는 시즈에게 닿는 것을 보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으나, 강철 같은 손이 번개처럼 뻗어 나와 그의 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벽으로 밀어붙였다.


"케흑—"


간수는 숨 막히는 소리와 함께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아로스의 손아귀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목뼈가 으스러질듯한 고통 속에서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고, 이어서 다른 손이 간수의 팔을 붙잡았다.


빠각——


"꺼읍...! 끄르읍......!"


뼈가 부러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간수의 팔이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목이 졸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간수의 눈앞에는 아로스의 청록빛 눈동자가 차가운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는 목을 움켜쥔 손은 놓지 않은 채 팔을 부러뜨린 다른 손으로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간수의 심장을 향해 무자비하게 찔러 넣었다.


꾸드득—


갈비뼈와 내장이 뒤섞여 분질러지는 소리와 함께, 간수는 짧게 경련하다 이내 축 늘어졌다. 그제야 아로스는 목을 움켜쥐었던 손을 놓았다. 힘없이 늘어진 간수의 시체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지자, 그는 검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곧장 시즈에게 달려갔다. 시즈는 여전히 텅 빈 눈으로 천장만 응시하고 있었다.


"무녀님!"


아로스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터져 나왔다. 와락 시즈의 상체를 끌어안았지만 그녀의 몸은 차갑고 미동조차 없었다. 그의 품 안에서 느껴지는 것은 생명의 온기가 아닌, 깊은 절망의 냉기뿐이었다. 아로스는 시즈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를 마주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무녀님. 접니다. 제가... 제가 왔습니다."


목소리는 평소의 냉정함 대신 죄책감과 안도감, 그리고 그녀를 잃을 뻔했다는 두려움이 뒤섞여 격렬하게 울렸다. 격렬한 감정이 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 듯했다. 자신이 거리를 두었던 시간 동안 이런 참변을 겪고 있었단 말인가. 지켜주겠다는 맹세는 어디로 갔는가.


절박한 목소리와 따뜻한 체온이 마침내 굳어버린 의식에 닿은 것일까. 시즈의 공허했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며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가늘게 떨리던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고, 텅 비었던 시선에 아주 희미하게 초점이 맺히는 듯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여, 자신을 붙잡고 있는 아로스의 얼굴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 희미하게 훑었다. 하지만 그의 청록빛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기억의 둑이 터졌다. 갑자기 머릿속으로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이 밀려들었다. 청푸른 나무 아래에서 함께 웃던 얼굴, 강을 끼고 달리던 기억, 작은 손을 마주 잡았던 온기... 너무나 따스하고 선명해서 현실감을 잃게 만드는 과거의 파편들. 하지만 그 따스한 기억 속으로, 설명할 수 없는 차가운 그림자가 스며드는 듯한 불쾌한 감각이 함께 느껴졌다. 기억이 떠오르는 과정 자체가 어딘가 뒤틀리고 강제적인 것처럼, 그녀의 정신을 날카롭게 헤집었다.


"...아... 로스......?"


아주 오랜만에 말을 내뱉는 듯, 갈라지고 마른 목소리가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시즈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방금 전 스쳐 간 기억 속 얼굴과 눈앞의 아로스가 고통스럽게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목소리, 눈빛, 그에게서 느껴지는 가슴 시리도록 익숙한 기운. 그리고... 잊고 있었던 이름.


그 익숙함 끝에, 잔혹한 현실 감각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그리고 눈앞의 이 사람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선명하게 되살아난 과거의 온기와 현재의 시린 고통이 충돌하며 감각 또한 함께 돌아왔다. 온몸을 짓누르는 고통과 역겨운 냄새, 그리고... 죽고 싶을 만큼의 수치심.


"아... 아아......!"


깨달음과 동시에, 과거의 순수했던 기억은 현재의 끔찍한 현실과 충돌하며 그녀의 정신을 더욱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텅 비었던 눈동자에 자기 파괴적인 혐오감이 급류처럼 차올랐다.


"아... 안돼... 보지 마......!"


시즈는 숨을 헐떡이며 아로스의 품 안에서 벗어나려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흐윽... 나, 나는... 더러운......!"


그의 온기와 되살아난 기억 속의 따스함이 오히려 비수처럼 느껴져 견딜 수 없었다. 그 이름을 차마 지금의 자신의 입으로 부를 수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봇물 터지듯 흘러내렸다. 이런 모습으로 어떻게... 어떻게 그와 마주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로스는 시즈의 갑작스럽고 격렬한 거부에 순간 얼어붙었다.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깊은 혐오감이 그녀의 온몸에서 느껴졌다.


"무녀님... 왜......?"


힘겹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그녀의 울음소리에 묻혀버렸다. 처절한 몸부림과 울음 섞인 단말마 같은 외침 앞에서 아로스는 차마 시즈를 더 강하게 끌어안지도, 그렇다고 놓아버릴 수도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함께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


"...서둘러 이곳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한 아로스는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시즈의 찢어진 정복을 여며주고 싶었지만 여전히 격하게 떨고 있는 그녀의 몸에 차마 손을 댈 수 없던 아로스는 자신의 낡은 망토를 벗어 온몸을 감싸듯 덮어주었다. 시즈는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처럼 아로스에게 몸을 맡긴 채, 조심스럽게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아로스는 주변을 경계하면서 시즈를 거의 안다시피 부축한 채 감옥을 빠져나왔다. 복도에는 자신이 쓰러뜨린 간수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지만 더 이상의 소란은 들리지 않았고, 서둘러 이곳으로 들어섰던 동굴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차원의 동굴은 그 어느 때보다 불안정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내부를 맴돌던 빛들은 마치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하게 깜박였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음을 직감한 아로스는 시즈를 품에 안은 채 망설임 없이 그 희미한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공간이 이전보다 훨씬 거칠게 뒤틀리는 감각과 함께 두 사람은 거의 튕겨져 나오듯 동굴 밖으로 밀려났다. 거칠게 튕겨져 나온 아로스의 시야 끝으로, 동굴 안쪽을 부유하던 마지막 빛의 조각들이 흩날리는 재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아로스는 직감했다. 이제 다시는 그 신비로운 빛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서늘한 예감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동굴의 입구가 사라지고, 뒤틀린 시야가 초점을 되찾자마자 비릿한 탄내를 머금은 밤공기가 폐부를 날카롭게 찔러왔다. 붉은 화염과 검은 연기로 뒤덮인 밤하늘 아래, 저 멀리 보이는 이그니카의 성벽은 여전히 거대한 검은 파도에 잠겨 들고 있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어둠의 물결을 향해 필사적인 저항의 불꽃들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함성과 비명, 재가 뒤섞인 바람이 두 사람의 뺨을 스쳤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가야—"


아로스가 시즈를 보며 말하는 순간, 시즈가 중간에 그의 말을 끊으며 고개를 저었다. 흐느낌은 잦아들었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깊은 절망으로 젖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문득 아로스의 허리춤에 묶인 너덜너덜해진 천 조각에 닿았다.


찢어졌던 자신의 옷자락. 서로를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 쳤던 그 처절한 이별의 흔적을 그가 계속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의 더러워진 자신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아니요."


시즈는 애써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아로스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잠시 말을 잃었다. 눈앞의 참상보다 더한 절망이 그녀의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단 여기서 벗어나—"


"아닙니다."


시즈는 다시 한번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러고는 아로스의 부축을 뿌리치고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섰다.


"보시다시피... 저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마력도 느껴지지 않아요. 더 이상 귀공의 여정에... 짐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의 결의는 확고했다. 이 너덜너덜한 몸으로, 더럽혀진 영혼으로... 어찌 그의 곁에 설 수 있단 말인가. 그와 함께했던 소중한 기억들마저 이 더러움 속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짐이라니...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로스는 격하게 반박하며 시즈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절망 앞에서, 자신의 두려움 때문에 그녀를 밀어냈던 과거가 날카로운 파편처럼 가슴을 찔렀다.


"제가 지키겠습니다! 다시는 무녀님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겠습니다. 무녀님께서 제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고통은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아니요, 아로스."


시즈는 그의 이름을 말함과 함께 다시 한번 그의 말을 단호히 가로막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로스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눈에는 깊은 슬픔과 함께 흔들리지 않는 결연함이 담겨 있었다.


"제 몸은... 이미 더럽혀졌습니다. 지고의 존재께서 내리신 힘도, 당신 곁에 설 자격도...... 모두 잃었습니다."


애써 담담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저는... 더 이상 예전의 제가 아니에요. 그러니...... 제발 저를 붙잡지 마세요. 귀공께서 남은 여정을 이어 사명을 완수하는 것만이...... 제가 바랄 수 있는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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