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격
거인들 말입니까? 글쎄요, 저라면 그들을 화나게 만들지 않을 겁니다. 수천 마리의 비룡들을 단 이틀 만에 도륙 낸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카노라스 주민 알버트
엘나력 4169년
시스테나 전선의 풍경은 그야말로 참혹함의 종착지였다. 다이크는 막사 밖으로 나와 어젯밤 전투가 벌어진 토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패한 흙 위로는 파도의 악마들이 뒤엉킨 채 꿈틀거리고 있었고, 토산 아래를 기어 다니는 그들은 뼈와 살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문드러진 형상이었다. 경계선 너머에서는 독기와 시체가 뒤섞인 악취가 태워진 잔해들과 함께 공기를 짓눌렀다.
다이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지평선 너머, 육안으론 보이지 않는 자신의 고향 카노라스. 그러나 다이크의 기억 속에는 신들의 탑이 여전히 솟아 있는 듯 또렷했다. 그는 천천히 검집 위에 손을 얹었다. 눈을 감는 순간, 15년 전 멸망한 도시의 기억이 방금 일어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 시작됐다. 도시의 탑에서 새벽종이 울렸고, 거리에는 상인들의 외침과 아이들의 웃음이 어우러졌다. 다이크는 여느 때처럼 동료 기사들과 함께 훈련장에 서서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평온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쿠르르르르릉—————
평화는 지진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땅이 울리더니 도심의 건물들은 미세한 균열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무너져 내렸다.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오면서 공기는 순식간에 불길한 정적으로 바뀌었다.
다이크는 망설일 틈도 없이 지진의 근원, 도시 중심에 위치한 신전으로 달렸다. 신전의 입구는 이미 혼돈 그 자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서로를 밀치며 빠져나오고 있었고, 그 틈 사이로 거대한 전신 갑주를 입은 거인 전사 하나가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신과 용이 아니고서는 결코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거인이, 공포에 질린 채 등을 보이고 있던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다이크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귀에는 이미 수십 명의 기사들이 신전 앞으로 달려오는 갑옷의 진동음이 울리고 있었다. 혼란 속에 멍하니 서 있던 그를 누군가 거칠게 흔들었다.
동료 기사, 파트로곤이었다.
"자네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정신 차려! 지금 신전 안쪽에 뭔가 알 수 없는 구멍이 뚫렸다는 말이 들려오고 있어."
"구멍이라고? 설마... 지하에서 뭔가 신전을 뚫고 올라왔다는 건가?"
"나도 자세히는 모르네. 하지만 아까 그 지진의 규모를 보면, 분명히 심상치 않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땅이 다시 요동쳤다. 단순한 진동이 아니었다. 이전보다 훨씬 깊고 무거운 충격이 도시 전체를 뒤흔들더니, 땅속 어딘가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울부짖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퍼어어어어어엉——————
신전 안에서 폭음이 터지면서 입구로부터 검보랏빛의 점액 같은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폭발하듯 입구를 뚫고 나온 그것들은 홍수처럼 꿈틀대며 사람들을 집어삼키며 쏟아져 나왔다.
"저게... 저게 대체 뭐야!?"
누군가가 절규했다. 인간을 닮은 괴이한 형체의 존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검을 뽑아 들고 맞섰지만 그 생명체들은 찔리고 베어도 멈추지 않았다. 쓰러지면서도, 잘려 나가면서도 달려들었다. 놈들에게 물린 사람들은 피부가 검보랏빛으로 변하면서 형체가 일그러졌고, 이내 이성을 잃은 채 주변의 사람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신전 앞 거리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도시 봉쇄령을 내려야 한다! 저 괴물들이 외부로 퍼지는 것만은 막아야 해!"
다이크와 파트로곤은 병력을 이끌고 도시 외곽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또 다른 악몽이었다. 신전이 또 한 번 무너지는 소리와 동시에, 하늘 위로 검은 장기를 뿜어내는 이형의 존재들이 날아올랐다. 거대한 날개를 가진 그것들은, 마치 어둠 아래에서 태어난 파멸의 조각이자 용을 닮은 형상으로 도시 상공을 날아다녔다.
"저건... 이 세상의 것이 아니야......!"
"신들은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런 파멸 속에서 우리의 신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주민들의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며 혼란 속에서 도망쳤다. 넘어진 이들에게 손을 내밀 틈은 없었고, 거리 곳곳은 짓밟힌 시체와 비명이 뒤섞인 아수라장으로 변해갔다.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명. 그 충격적인 광경은 다이크와 파트로곤의 정신마저 무겁게 짓눌렀다.
"이곳에서 싸울 순 없어! 병력을 정비하지 않으면 전멸이다!"
다이크의 외침에 파트로곤이 고개를 끄덕였고, 곧 두 사람은 병사들을 이끌고 도시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뒤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카노라스는 이미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공포에 완전히 삼켜져 있었다. 그러나 성문이 보일 무렵, 파트로곤이 다이크의 어깨를 조용히 붙잡았다. 전우로서, 그리고 오랜 시간을 함께한 동료로서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미안하네. 여기서부터는 따로 움직이겠네. 아내와 딸이 아직도 도심 안에 있어. 게다가 아내는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야. 성채가 함락되기 전에 어디로 피신했을 리가 없어. 확인하지 않으면... 난 분명 죽을 때까지 후회할 거야."
다이크는 짧은 침묵 끝에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부디 가족이 무사하길 바라네."
그 말에 파트로곤은 순간적으로 눈을 피했다. 뭔가 더 말할 듯 입술이 달싹였지만, 이내 슬픈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이해해 줘서 고맙네."
대답을 마친 파트로곤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병사들의 행렬에서 빠져나온 그는 도심의 혼란 속으로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어깨는 단단히 굳어 있었지만 그 뒷모습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 이후로 파트로곤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카노라스의 붕괴는 시작에 불과했다. 연이어 들려오는 비보들은 살아남은 이들의 마지막 희망까지 짓밟았다. 서쪽 대륙과 이어지던 주요 진입로가 붕괴되고, 엘나가 사라지면서 대륙 전체는 격변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전쟁의 여신 카야가 쓰러졌다는 소식까지 퍼지며 모든 흐름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괴물들이 흘려보낸 검보랏빛 점액이 땅을 침식시키며 부패를 퍼뜨리면서 대지는 차츰 생명을 거부하는 죽음의 땅으로 변모해다. 뒤늦게 파도의 악마들이 불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판도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엘나가 사라진 자리는 더 깊은 두려움만을 남겼다. 남쪽으로 후퇴를 거듭한 다이크가 도달한 곳은 엘라리모스의 최북단, 시스테나 교회였다. 타리안 마저 뚫린 이상 그곳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마지막 보루였다. 이곳마저 무너진다면 초록빛 생명이 숨 쉴 수 있는 땅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절망은 끝없이 이어졌다. 파국의 혼란 속에서 나타난 공허의 신도들은 혼돈에 불을 지피듯 상황을 악화시켰다. 그들의 악행은 도처에서 퍼져갔고, 5년 전에는 시스테나 교회의 무녀마저 납치했다. 남겨진 병사들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하루하루를 가까스로 버텨낼 뿐, 전선의 모든 것은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위태로운 형국이었다.
그럼에도, 희망이라는 말이 다시 속삭이듯 떠돌기 시작했다. 언령이라는 기원조차 불분명한 그 신비로운 말이 다시 한번 전선을 지키는 이들의 귓가에 한 줄기 기적처럼 번져갔다. 사선에서 살아 돌아온 전사가 세계를 바꿀 열쇠를 지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그것은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이자, 마지막 망상처럼 퍼져 나갔다.
다이크는 그 말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 신들조차 침묵하는 이 세상에서 전사 한 명의 힘으로 무엇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언령이라는 것이 고작 헛된 기대감만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마저도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싸워야 하나.
마지막 희망마저 스스로 내려놓는다면 남쪽 땅은 돌이킬 수 없는 파멸 속으로 떨어질 것이 자명했다. 다이크는 세계의 무게가 실린 무거운 어깨로 끝을 향해 기울어가는 지평선을 응시했다.
마을을 떠난 지 어느덧 열흘 하고도 사흘째 되던 밤, 모닥불이 타닥이며 적막한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불빛은 세 사람의 얼굴에 주황빛 그림자를 드리우며 흔들렸고, 불꽃이 부서지는 소리는 밤의 적막을 깨우듯 바스락거렸다.
노아는 타오르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며 지난 여정을 반추했다. 겉으로는 평온한 길이었으나 그 이면에서 매 순간 자신만의 도전을 치르며 조금씩 세상을 배워가는 중이었다.
말을 다루는 일부터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온순한 다리아의 등에 올라타는 것조차 버거워 흙바닥에 나뒹구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슬픈 모습을 본 시즈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딱 봐도 아직 멀었네요!'라면서 놀렸다. 노아는 포기하지 않고 딸기를 미끼로 삼아 말들과 친해지는 기묘한 전략을 시도했다.
처음 딸기를 미끼로 사용한 날에는 레클레스가 코웃음을 치며 그를 무시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의 손길은 어느새 안정감을 찾았다. 결국은 말들을 스스로 다루며 걷는 데에까지 이른 그 기억을 떠올리며 노아는 모닥불 앞에서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어느덧 세 사람의 발걸음은 이제 제법 잘 맞춰지고 있었다. 낮에는 묵묵히 길을 걸었고, 밤이면 모닥불 주위에 앉아 하루를 정리했다.
역시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함 속에 길어져가던 와중, 노아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불을 다루게 된 거였죠. 아주 어렸을 적에 형이 직접 알려준 방법이라 지금도 형이 쓰던 방식 그대로 따라 하긴 하는데, 아무래도 전 형만큼은 안 되는 것 같아요."
"언젠가는 그 능력을 꽃피울 수 있지 않을까요? 집안 내력이라면 그 재능이 어디 가진 않을 텐데 말이에요."
"그럴까요? 그랬으면 좋겠는데. 가만 보면, 저는 쓸데없이 장난에만 재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돌이켜보니 어른들이 저 때문에 참 많이도 곤란해하셨을 거예요."
"음... 예를 들면 어떤 장난인가요?"
"어릴 때 전선에서 스승님이랑 같이 지낼 때였나... 제가 이상한 돌가루에 불을 붙였거든요. 스승님이 그걸 보시 더니 욕을 하시면서 저를 안고 냅다 달리시더라구요. 아마 3초 뒤쯤에 펑! 하고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둘 다 멀리 날아갔는데 그날 저녁에 죽도록 맞았죠."
"안톤 님께서 잘하셨네요."
시즈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웃고 넘길 수 있지만 그땐 얼마나 놀라셨을까요?"
"'폭발은 예술이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저는 그 말이 너무 좋아요. 솔직히 그날로 다시 되돌아가도 분명 똑같이 그랬을걸요?"
아로스는 두 사람의 웃음 섞인 대화를 뒤로한 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영지 밖으로 걸어 나온 그는 고요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게 가라앉은 창공에는 별빛이 가물거리고 있었고, 희미한 빛은 그의 갑주 위에 맺혀 있는 이슬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언령을 따라 걸어야 할까. 그 끝에... 내 과거의 조각들이 정말 기다리고 있을까.'
문득 떠오른 생각이 마음을 잠식하려는 순간,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스쳤다. 본능적으로 몸을 낮춰 방패를 들어 올리자 수리검과 단검이 연달아 날아들면서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어둠이 잠시 찢어지며 땅에 떨어진 날붙이들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것들을 본 아로스의 미간이 곧바로 일그러졌다. 날아온 흐름과 비뚤어진 균형, 녹슬고 지저분한 모양까지. 모두 보름 전 무덤 앞에서 마주쳤던 것들과 동일했다.
"습격입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다급한 외침에 시즈와 노아는 즉시 반응했다. 허겁지겁 짐을 추려 챙긴 뒤 노아는 다리아의 고삐를 쥐었고, 시즈는 아로스와 함께 레클레스 위에 올라탔다.
숲길을 빠져나오자 공기는 점점 냉랭하고 무거워졌다. 추적자들의 그림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안심하지 않았다. 사방은 점점 어두워졌고 바람 사이로 스멀스멀 고약한 냄새가 밀려들었다.
죽음이 깃든 대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짙은 어둠 속에서도 세 사람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말을 몰았다. 말발굽 아래로 무슨 땅을 밟고 있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바람도, 별빛도 없이 어둠이 삼킨 숲길은 불안의 형상처럼 뒤엉켜 있었다.
그 순간, 아로스의 품에 있던 등불이 천천히 빛을 더해가기 시작했다. 마을에서부터 줄곧 희미했던 은빛 불씨가 이제는 주변을 밝히고도 남을 만큼 강하게 타올랐다. 빛이 닿은 길 위로 검고 거칠게 갈라진 대지와 부서진 창들, 금 간 방패, 그리고 반쯤 흙에 묻힌 투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언젠가 이곳을 스쳐간 전투의 잔재들이 어둠 속에서 칼날처럼 되살아났다.
"환시의 등불이 점점 밝아지고 있습니다. 교회와 가까워진 게 분명해요!"
시즈가 놀란 듯 외치자, 아로스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등불을 건넸다. 양손으로 고삐를 쥐고 말을 몰아 속도를 더 높이려던 그때―
"――커어어어어엉!"
맹수의 포효가 어둠을 찢고 울려 퍼졌다. 저 멀리서 퍼진 소리가 아니라 바로 등 뒤, 바로 곁에서 쏟아져 들어온 괴성과 함께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검은 형체가 아로스를 정통으로 덮치자 아로스는 말에서 튕겨져 나가며 비탈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귀공!"
시즈는 레클레스가 급히 멈춰 세우면서 망설임 하나 없이 고삐를 돌렸다. 비탈 아래를 향해 어른거리는 그림자들이 보이자, 시즈는 곧바로 그곳을 향해 돌진하면서 뒤따르던 노아를 향해 등불을 던지며 외쳤다.
"등불을 따라가세요! 교회나 전선이 보이면 반드시 도움을 요청하세요!"
"무녀님은요!? 무녀님은 어쩌시려고 그쪽으로—"
노아는 떨리는 손으로 등불을 받아 쥐었지만 시즈는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노아는 이를 꽉 깨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리아의 고삐를 강하게 당기며 빛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시즈는 부디 아로스가 무사하길 바라면서 레클레스를 몰아 다시 그가 굴러 떨어진 길을 향해 내달렸다. 고삐를 잡은 그녀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