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비상
평소에는 말없이 앞만 보던 아로스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어딘가 누그러져 보이면서도 묵은 사유, 어쩌면 회한까지도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렇게 아우로라를 향하던 두 사람은 검은 늑대들과 조금씩 더 가까워지면서 이전에는 듣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에 대해 알게 되었다.
짐승의 형상이 짙을수록 강함을 상징한다는 수인들의 전통, 전쟁의 여신 카야가 남긴 생전의 일상, 그리고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와 규범들. 그것들은 낯설었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특히 타리안의 콜로세움에 얽힌 이야기는 잔혹함과 숭엄함이 뒤섞인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카야는 전쟁의 신이었음에도 무의미한 살육을 금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존재였다. 그러나 콜로세움의 규칙만큼은 그녀조차 바꿀 수 없었다고 한다. 그곳은 타리안 전사들 사이에서 최고의 전사를 가려내는 장소였으며, 오직 상호 동의가 이루어진 순간에만 열리는 피의 결투의 장이었다.
경기의 규칙은 명확했다. 한쪽이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멈추지 않는 싸움. 외부인의 눈에는 그것이 잔인하고 야만적으로 보였을지 몰라도 타리안의 전사들에게 있어서는 명예와 자부심을 증명하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콜로세움은 단순한 싸움의 장이 아니었다. 그곳은 수인들의 문화를 정의하고, 전사로서의 자격을 새기는 거룩한 무대였다. 핏빛이 번진 돌바닥 위에서 벌어지는 결투는 야만이 아니라 통과의례인 동시에 타리안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결투에서 승리한 자들은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바르그로부터 검은 늑대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단순한 힘이 아닌 내면에 도사린 야수를 길들이는 권한이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아로스는 그들 사이에 흐르는 결속과 명예, 그리고 피로 맺어진 신뢰가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새삼 실감했다. 그것은 단순히 강함을 넘어선 삶의 철학이었다.
그때, 무언가 생각난 듯 자이론은 불현듯 무심하게 말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콜로세움에 외부인이 뛰어든 적이 있군. 한창 결투 중이었는데, 의사 하나가 쓰러진 검투사를 살리겠다고 경기장 한복판으로 달려들었어. 전사 둘이 목숨 걸고 싸우는 와중에 생명이 먼저라며 경기고 뭐고 뛰어든 거지. 결국 어떻게 됐는 줄 아나?"
"...죽었나요?"
"아니, 기어코 경기를 멈췄지. 의사는 경기를 망쳐놓고 나서 '아무리 문화라지만 이건 미개하고 야만적이다'라면서 분개하더군. 결국 검투사는 치료받고 목숨을 건졌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또 뭔가 있었나요?"
"치료를 받은 검투사가 깨어나자마자 화가 잔뜩 나서 난리가 났지. 명예롭게 죽을 기회를 빼앗겼다면서 말이야. 자신을 치료한 인간을 죽여버리겠다면서 발악했지만 의사는 진작에 치료를 끝내자마자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타리안에서 사라졌어."
시즈는 그 말에 작게 웃었다.
"그 검투사님의 심정이 어떤지 알 것 같아요. 누군가를 구하겠다는 마음은 귀하지만, 그 문화 속에서는 방해일 뿐이었겠죠."
"그렇지. 우리의 입장에서는 방해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장로님께서 그를 말리지 않으셨던 건... 아마, 의사로서 지키려 했던 그 신념을 높이 사신 것이 아닐까."
그 말에는 묘한 여운이 있었다. 가볍게 흘린 듯한 이야기였지만, 자이론의 눈빛은 그 의사를 단순한 해프닝으로 보지 않았다.
"...그 인간, 꽤 괜찮은 의사였지. 벌써 50년 전이군."
그리고 말끝을 흐렸다. 자이론의 시선은 멀리, 바람이 스치는 언덕 너머로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아무튼, 검투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런 식이다. 앞서 말했듯 바르그의 선택을 받은 전사들은 검은 늑대로서의 자격을 얻지. 그건 단순한 힘이 아니라, 내면의 짐승을 길들일 수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증표야."
아로스가 조용히 물었다.
"그렇다면, 바르그가 영면에 든 지금은... 더 이상 새로운 검은 늑대는 생겨나지 않는다는 뜻인가?"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더군. 애초에 바르그께서 우리에게 직접 능력을 '나눠주신 것'이 아니라 그 힘을 '다룰 수 있는 자격'을 준 것이라 했어. 장로님의 말씀대로라면 그렇다는 거지."
자이론은 손가락으로 턱을 긁적이면서 말을 이어갔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그 힘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깨어나기만 한다면 여전히 강력할 거야. 문제는... 그걸 다룰 줄 모르면 절대 깨어나지 않는다는 거지. 그 힘은 누군가 억지로 끄집어내려 한다고 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면."
아로스의 눈빛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만약 그 힘이 잘못된 방식으로 깨어난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군."
"그래. 아주 드문 일이라지만... 불행하게도 며칠 전에 모두가 그 모습을 마주했지."
자이론의 말이 머릿속에서 퍼지며 얼마 전 라그나르의 모습과 환시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모르티아의 존재, 그리고 그녀의 음모에 물든 채 폭주했던 과거의 검은 늑대. 이성을 잃고 맹수로 변한 라그나르의 모습은 바르그조차도 단번에 제압하지 못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장로님 정도의 힘이 그렇게 된다면... 그걸 막으려면 거인, 아니 신에 버금가는 존재가 와야 할 거다."
자이론은 얼굴을 찡그리며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시즈도 그의 말에 공감하듯 불안한 모습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내 표정은 풀어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불필요한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싶다는 듯 조용히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뿌연 안개가 여전히 대지를 감싸고 있었지만, 그 너머로 드러난 맑은 하늘빛이 마치 그녀를 위로하는 듯했다.
한 줄기 숨을 길게 내쉰 시즈는 다시 다리아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가벼운 걸음과 함께, 얼굴에는 어딘가 홀가분한 기색이 배어 있었다. 아로스는 묵묵히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짧은 순간, 눈부신 하늘빛에 반사된 얼굴이 시야에 깊이 박혀 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시각적 인상을 넘어선 기묘한 감각이었다. 기억이라고 부르기엔 형체가 없었으나, 잊고 지낸 감정의 파편이라 하기엔 너무도 선명하게 가슴 한구석을 찔러오는 느낌.
그는 자신이 왜 그토록 시선을 떼지 못했는지 따로 정의하지 않으려 했다. 함께 사선을 넘으며 쌓인 신뢰의 무게 때문일까. 아니면, 애초에 넘어서선 안 될 선을 긋고 있기에 느껴지는 낯선 긴장감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즈의 옆모습이 잠시 스쳐갈 때 설명할 수 없는 낯섦이 마음 어딘가에 머물렀다.
무덤 앞에서 처음 보았을 때도 이상하리만치 익숙하게 느껴지는 정서였다. 언어로 붙잡을 수 없는 감각,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무언가를 어렴풋이 떠올릴 때와 비슷한... 방향조차 알 수 없는 공허한 잔상. 아로스는 그 감정의 정체를 파헤치지 않았다. 하지만 시즈를 바라보면 마음속 어딘가에서 묘한 고요함과 이질감이 동시에 일렁인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때였다. 생각의 흐름이 채 가라앉기도 전, 선두에 있던 검은 늑대의 외침이 울려왔다.
"이야, 드디어 도착했군. 저길 봐라. 아우로라의 기사들이야."
뒤따라오던 시즈와 아로스를 돌아보며 검은 늑대가 소리쳤다. 그 말에 두 사람과 다른 검은 늑대들이 절벽 끝에 다다라 걸음을 멈췄다. 지평선 끝으로는 끊겨버린 서쪽 대륙이 잔잔한 실루엣으로 드러나 있었고, 절벽 맞은편의 흐릿한 시야 너머로 은빛 갑주가 햇살에 반짝였다.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갑주의 윤곽과 깃발의 움직임으로 보아 아우로라의 기사단임이 틀림없었다.
"에스트라 가도를 얼마 만에 보는 건지... 그런데 저기로 어떻게 건너가죠?"
그곳에서 내려다본 아래는 아득한 어둠이었다.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의 모습에 막막해하던 그 순간, 하늘빛이 변했다. 바람이 갑작스레 거세졌고, 절벽 위를 휘감고 지나간 회오리 속에서 하늘의 구름이 갈라졌으며, 그 틈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청푸른 은빛이 감도는 비늘로 감싸인 날개가 우아하게 펼쳐지면서 순식간에 하늘을 덮었다.
고룡.
그 존재 하나만으로 대지가 숨을 죽였고, 절벽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떨려왔다.
"저건...!"
아로스의 손이 본능적으로 검에 닿았다. 하지만 그는 곧 깨달았다. 이건 맞설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
창공을 뒤덮은 그림자가 천천히 선회하며 곡선을 그렸다. 공기마저 순응하듯 따라 흘렀고, 그 모습은 마치 하늘과 이어진 선처럼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거대한 존재가 숨결을 뿜자 두 대륙 사이에 푸른빛이 피어올랐다. 하늘에 새겨지는 듯한 광채는 실처럼 얽혀들며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교차하는 빛줄기들은 점점 굵어지며 빛나는 다리로 모습을 드러냈다.
빛의 다리는 절벽과 대륙을 매끄럽게 잇고 있었다. 그 위를 걷는다면 발이 닿을 수 있을까 의심이 들 만큼 다리는 실재와 환상의 경계에 선 '마법' 그 자체였고, 모두가 그 광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 순간, 시즈의 마음속 어딘가가 조용히 울렸다. 절벽 너머로 퍼져나가는 푸른 기운을 바라보며, 문득 타리안을 떠나기 전 라그나르가 들려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최근, 서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그랬습니다. 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설명하기 어려운 감촉이었죠. 그런 징조들은 보통 이유 없이 오는 법이 없지요.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고, 누가 다녀간 것도 아닌데... 간혹 그런 날이 있지 않습니까. 그저 어떤 흐름이 도달했다는 느낌처럼, 아주 멀리서 말입니다.
그때는 그저 바람처럼 지나가는 수수께끼인 줄로만 알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웅대한 존재가 하늘을 가르고 다리를 만들어내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그 말의 진의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예고였고, 혹시나 했던 바람은 여정을 이끄는 신호였으며, 눈앞의 광경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시즈는 푸른 광휘를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몇 달 전, 순례를 떠나는 자신을 위해 아우로라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던 지고의 존재. 그것 조차도 이례적인 일이었기에 아우로라 밖으로 나온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로 오신 거구나.'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인 시즈는 감탄과 경외를 모두 뒤로 숨기며 눈을 감고 기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무엇보다도 이 방문이 얼마나 중대한 결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시즈는 말로 하지 않아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군."
뒤에서 걸음을 멈춘 자이론이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아쉬움보다는 무거운 책임을 끝낸 자의 안도감이 담겨 있었다.
"우린 이제 돌아가야 해. 주민들이 기다리고 있거든."
시즈는 자이론과 검은 늑대들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짧고 정중했으며, 담담하게 감사를 담고 있었다.
"여러분 덕분에 무사히 이곳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텐시아의 지혜가 함께하시길."
그 인사를 들은 늑대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에 맺힌 긴장을 풀었다. 이어서 아로스도 자이론에게 다가가 조용히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덕분에 지루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여정이었다."
아로스의 말에 자이론은 큼지막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대답과 함께 자이론의 시선은 잠시 시즈에게 스쳤고, 이내 아로스에게로 돌아와 작은 미소를 지었다.
"무녀를 잘 지켜줘라."
아로스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끄덕이자, 자이론은 만족스러운 듯 윙크를 한 뒤 타리안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럼, 우린 이만 가보도록 하지. 주민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서둘러야겠군."
검은 늑대들은 몸을 푸는 듯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바람을 가르듯 달려 나간 그들의 모습은 곧 타리안을 향한 길 너머로 사라졌다.
시즈는 한동안 그들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도 움직일까요?"
두 사람은 빛나는 마법의 다리를 향해 발을 옮겼다. 끊어진 대륙과 대륙을 잇는 다리는 차갑고도 투명한 유리처럼 보였으며, 그 끝자락에서 무언가가 부드럽게 손을 이끄는 듯한 느낌을 남겼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으로 다리 위의 빛이 일렁이자 그 모습은 마치 푸른 무지개가 하늘과 대지를 잇는 듯 신비롭고도 숭고했다.
다리를 건너오는 두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아우로라의 기사들이 조용히 다가왔다. 은빛 갑주를 입은 기사들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고, 그들의 머리 위로 고룡이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