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
무덤은 생각보다 작았지만 정돈된 질서가 느껴졌다. 한쪽에는 검과 방패를 놓지 못한 피투성이의 갑옷을 입은 시신들이 미처 수습되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 반대편에는 누군가 정성껏 사후 처리를 마친 듯 깨끗한 옷을 입은 채 가지런히 누워 있는 시신들이 있었다. 단지 먼저 수습된 이들과 아직 손길이 닿지 못한 이들의 차이인 듯 보였다. 하지만 무덤 어디에도 시신의 부패 냄새는 나지 않았다. 낮게 깔린 고요함과 묵직한 냉기만이 감도는 이곳은 죽은 전사들을 위한 안식의 공간이자, 그들이 떠날 준비를 마칠 때까지 머무르는 마지막 쉼터인 듯했다. 기사는 잠시 시신들을 향해 묵념했다. 그들에게 보내는 짧은 예의를 마친 후 무거운 돌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갑고 거친 돌의 감촉이 양 손바닥에 전해지면서 느릿하게 열리는 문의 소음이 퍼져 나갔고, 묵은 먼지와 함께 시린 공기가 한꺼번에 밖으로 빠져나갔다.
문턱을 넘어 무덤 밖으로 나선 기사를 맞이한 것은 짙은 안개와 모래벌판이었다. 거친 바람이 투구 속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모래가 녹슨 철을 때리는 마찰음이 짧게 울렸다. 기사는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듯 잠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그는 무덤의 문을 닫은 후, 기억을 더듬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한순간 방향을 틀었다. 안개가 잠깐 걷힌 찰나에 바닥에 반쯤 묻힌 무언가의 윤곽을 발견한 기사는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모래에 반쯤 잠긴 채 드러난 형체 앞에 무릎을 꿇자 쇠 냄새가 바닥에서 피어올랐다.
죽어있는 병사였다. 손끝은 칼자루에 닿지도 못한 채 굳어 있었다. 시선이 목 아래로 내려가자 갑옷 틈새 목덜미 밑으로 짧고 얕게 찔린 흔적이 나타났다. 그 자리는 정확히 급소를 찔린 흔적이었다.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자 반대편에도 동일한 모습의 병사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암살을 당한 건가.'
기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공기 속에는 스멀스멀 스며드는 낯선 기척이 있었다. 발소리는 없었지만 누군가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가볍지도, 숫자도 짐작할 수 없었지만 기척은 조밀하고도 깊었다. 마치 포위에 가까웠다. 기사는 검을 조용히 뽑았다. 철이 공기를 가르며 낮게 울렸고, 바람과 안개도 그 울림을 삼키지 못했다.
그 순간, 낯선 목소리들이 안개 너머로 들려왔다.
"정말 이곳에 무덤이 있는 것이 확실한가요?"
"바로 이 앞입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안개가 이렇게 빨리 밀려올 줄은 몰랐습니다."
한 쌍의 남녀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과 자신을 옥죄는 기척의 방향이 달랐다. 기사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대화의 주인공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외침이 이어졌다.
"기마대!"
그러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기마대! 대답해라!"
기사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 틈새로, 검은 기척이 움직였다.
"기마대......?"
그 말이 허공을 맴도는 동시에, 기사는 문득 뼛속까지 스며드는 낯선 직감을 느꼈다. 기척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 전의 무겁고 날 선 기운은 바로 지금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저 두 사람을 향해 집중되어 있었다.
마르크의 암구호에는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고, 안갯속 어둠은 이내 움직임을 품었다. 소리 없는 발걸음과 들리지 않는 숨결. 그것들이 갑작스레 속도를 높이자 기척은 허공을 찢듯이 일그러졌다. 놈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마르크의 목소리가 안개를 가르며 울렸다.
"무녀님, 물러나 계십시오!"
마르크는 시즈의 앞으로 몸을 내던지며 검을 휘둘렀다. 그제야 스스로를 자책했다. 이 정도의 매복을 예측하지 못했을까. 주기적으로 뒤덮는 안개, 응답 없는 경계병들, 이상할 만큼 조용한 무덤 앞. 모든 징후가 이미 경고하고 있었거늘.
추적자들은 수적 우위를 믿고 전면으로 밀고 들어왔다. 한 놈이 시즈를 향해 팔을 뻗었지만 마르크는 검으로 그 손목을 튕겨냈다. 놈들의 공격은 단순한 살의가 아닌 시즈를 노리고 있었다. 확실한 목적을 지닌 채 그녀를 끌고 가려는 움직임이었다. 마르크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그가 홀로 감당하기에는 추적자의 숫자 너무 많았다. 그중 일부는 그를 무시한 채 시즈를 향해 파고들었다.
"위험합니다!"
마르크는 다시 시즈를 지키려 몸을 던졌으나 창 끝이 오른팔을 스쳐 지나가며 갑옷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다른 칼날이 허벅지를 넘어 무릎까지 길게 자상을 입히자 마르크는 비틀거리며 쓰러졌고, 검이 땅에 부딪히며 금속음을 냈다. 시즈는 환영을 만들어 추적자들을 따돌리려 했지만 놈들은 더 이상 속지 않았다. 환영을 돌파한 추적자 하나가 망설임 없이 시즈를 향해 돌진하자 거리는 불과 몇 걸음 남짓까지 좁혀졌다.
그렇게 추적자 하나가 시즈에게 손을 뻗으려는 찰나, 시즈의 눈동자가 무언가에 반응하듯 흔들렸다. 기척도, 예감도 아니었다. 그저 순간적으로 느껴진 직감. 그다음, 안개 뒤편에서 칼날이 낮게 휘둘러졌다.
추적자의 등 뒤로 피가 튀면서 짧은 비명이 안갯속을 찢었다. 놈들은 당황했다. 누구도 그쪽에서 공격이 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칼날이 다시 한번 공중에서 그려지자 또 하나의 추적자가 땅에 쓰러지면서 비로소 동요가 시작되었다. 마르크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시즈의 어깨를 빌려 겨우 무기를 들어 올린 그는 무덤 아래에 쓰러진 동료들을 바라보며 이를 드러냈다. 전투를 지속하기는 힘든 몸이었지만 무엇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때, 눈앞에서 추적자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꽁무니를 빼는 놈들이 전부 도망치는 동시에 안개가 걷히더니 그 한복판에서 오래된 갑옷과 낡은 가죽으로 덧댄 장비를 걸친 장신의 기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의 칼끝에는 여전히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덕분에 위험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시즈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기사님이 아니었다면 저희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르크 역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숨소리는 거칠었지만, 목소리에서는 진심 어린 감사가 담겨 있었다. 그러자 기사는 투구를 벗으며 말없이 짧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받았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어떤 자랑도, 망설임도 없었다.
시즈는 조용히 기사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본 그의 체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컸다. 모진 풍파를 겪은 듯한 인상 속에는 묘한 앳됨이 있었다. 어깨까지 흘러내린 긴 회색 머리카락이 안개를 머금은 듯 흐릿하게 빛났고, 청록빛 눈동자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침잠이 어린 채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전장에서 무수한 사선을 드나든 이들과는 어딘가 결이 달랐다.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침묵에서 느껴지는 낯선 고독은 마치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듯했다. 시즈는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도, 연민도 아니었다.
"일단, 지금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안개는 걷히고 있지만 금방 어두워질 것입니다. 교회로 돌아가 정비를 서둘러야 하니 무덤은 나중에 확인하시죠."
마르크의 말에 시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쓰러진 추적자들의 시체와 무너진 무덤과 피로 얼룩진 들판, 그리고 의문의 기사.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았지만 지금은 자리를 정리할 때였다.
세 사람은 붉게 물든 모래벌판을 따라 천천히 교회를 향했다. 안개가 거의 걷혀가는 지평선 끝으로 땅거미가 가라앉고 있었다.
찢어진 천막 아래, 낮고 거친 말들이 날을 세우며 엉겨 붙었다.
"그게 내 잘못이란 말이야?"
벽에 기대고 앉아 있던 추적자 하나가 들고 있던 칼자루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누가 확인했는지 기억도 못 하면서, 이제 와서 손가락질을 해?"
"그래서 내가 무덤 앞에서 덮쳐야 된다고 말했잖아, 이 병신아!"
"닥쳐, 넌 그때 병사 모가지 하나 제대로 못 따서 무덤 뒤에 처박혀 있었잖아."
"기사가 온 줄 모르고 꽁무니나 빼던 새끼가 어디서—"
"그만 안 해? 죽일 년은 따로 있지."
그때, 불 꺼진 등불 앞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쓸모없는 새끼들끼리 서로 남탓하는 꼬락서니는... 언제 봐도 역겹구만."
크라인의 말이 떨어지자 공기가 식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며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얼굴 절반을 감싸고 있던 붕대 틈에서 희미한 핏물이 다시금 번지기 시작했다. 무녀의 이능이 남긴 푸른 화상은 깊었지만 그 상처 위로는 수치심과 분노가 뒤덮여 더는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누굴 탓할 건데? 기사 하나 끼어들었단 이유로 무녀 하나도 제대로 못 잡고... 이딴 식이면... 하아."
크라인의 한숨에 누구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흐트러진 시선을 거두고 천막 안쪽을 가로질렀다.
"......설마 내려가려고?"
누군가 조심스러운 물음에 크라인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대답은 들으러 가야지."
크라인이 지하로 향하면서 은신처는 다시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계단을 따라 한 걸음씩 내려갈수록 축축한 공기 속에 무겁고 불쾌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 끝에는 조명 하나 쓰지 않은 어둠 속에서 남색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인물이 벽을 등지고 명상하듯 앉아 있었다.
사도 카브르였다.
"용건이 뭐냐."
짧고 건조한 목소리가 등을 보인 채로 날아오자, 크라인은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찔였다.
"...무녀를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무덤 앞에서.... 처음 보는 기사가 나타났습니다. 여섯 명이 순식간에 당했습니다. 움직임도 빠르고, 놈의 무력이—"
"그래서, 겨우 놈 하나에 밀려서 나한테 부탁하러 온 것이냐?"
카브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을 돌렸다. 후드 아래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이자 크라인은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정말입니다! 놈의 무력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교회는 이미 경계태세에 돌입했습니다. 지금 저희들만으로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건... 어렵습니다."
크라인의 말을 끝으로, 어둠이 찢어지듯 카브르의 그림자가 계단 쪽으로 길게 늘어졌다.
"실수하지 말라고 그리 당부했거늘... 좋다. 이대로 놔두면, 더 귀찮아질 놈일 수도 있지."
한참 동안 크라인을 바라보던 카브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드 너머의 목소리는 여전히 감정이 없었으며, 그가 말할 때마다 공기 속 어딘가가 서서히 식어가는 기분이었다.
"준비해라. 오늘 밤, 교회를 함락시킨다."
크라인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등 뒤로, 마치 그림자 그 자체가 형체를 얻은 듯한 사도의 발걸음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교회로 돌아온 시즈 일행은 마르크의 치료를 마친 뒤 곧장 교회 전체를 경계 태세로 전환시켰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교회 밖은 숨죽인 정적만이 감돌았다. 차가운 밤공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지만 그보다 더 무거운 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의 기척조차 사라진 침묵이었다. 말 그대로, 고요가 짓눌렀다.
저녁이 되자 시즈와 기사, 마르크는 배급된 식사를 들고 교회 광장으로 향했다. 어린아이의 팔뚝만 한 크기의 딱딱한 빵 한 조각과 소량의 따뜻한 스튜가 전부였다. 건장한 장정에게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오랜 순례 끝에 먹을만한 음식을 제대로 구경해 본 적 없던 시즈에겐 그것조차도 사치처럼 느껴졌다. 품위를 지키려 애쓰며 천천히 손을 움직이려 해도 굶주린 속은 그런 격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서투른 손놀림은 오히려 오랫동안 굶주려온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고,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기사는 자신의 스튜 그릇을 말없이 시즈에게 내밀었다. 사선의 강가에서 모든 것이 씻겨나간 자신에게 '허기'라는 감각이 남아있던가. 하지만 저 여인은 달랐다. 살아있고, 굶주렸으며, 그럼에도 품위를 지키려 하고 있었다. 지금 이 스튜가 필요한 것은 내가 아닌 그녀일 테지.
시즈는 잠시 눈을 깜박이며 멈춰 섰다. 뜻밖의 호의 앞에 망설였지만 허기는 결국 이성을 이겨버렸고,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조심스레 말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정말 괜찮으신 건가요?"
"괜찮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당신이 더 필요해 보이는군요."
그 한마디가 담고 있던 배려는 따뜻한 국물보다 먼저 마음을 적셨다. 시즈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짧은 식사가 끝난 뒤, 세 사람 사이에는 말없이 긴 시간이 흘렀다. 희미한 불빛 아래 각자의 생각이 깊어졌고, 정적이 밤공기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가운데 마르크가 자리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본당에 다녀오겠습니다.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라......"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시즈도 마르크를 따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옆에 앉아 있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기사는 말없이 시선을 맞춘 뒤, 묵묵히 따라 일어섰다.
세 사람은 불이 꺼진 복도를 따라 본당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붕 너머로 드리워진 달빛이 깨진 창틈으로 스며들어 복도 바닥에 길고 좁은 빛의 길을 만들고 있었고, 오래된 촛불 향이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그렇게 말없이 걷던 중, 문득 시즈가 마르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아직도 신들께 기도하실 이유가 있으신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예전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아닐지도 모르죠. 하지만 습관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기분은 듭니다."
마르크가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답하는 사이, 세 사람은 본당 입구에 도착했다. 빛 하나 없이 가라앉은 본당 내부의 깨진 천장 아래, 얇게 스며든 달빛만이 무너진 제단과 금이 간 바닥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먼지까지 잠잠히 내려앉은 그 공간은 무너진 돌들과 잃어버린 시간들이 함께 숨을 죽이고 있는 듯했다.
그 순간, 기사는 품속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