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마주하는 발걸음 (4)

환시를 품은 자

by 이샤라

미세한 변화를 느낀 그가 가슴께로 손을 가져가자, 품속에서 환시의 등불이 공명하듯이 빛나고 있었다. 원래도 희미한 빛을 머금고 있었던 등불은 평소보다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마치 어떤 무언가에 반응하는 듯한 그 빛은 어둠에서 피어오르듯 고요하게 퍼져 나갔다.


기사는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품속에서 등불을 꺼냈다. 주먹만 한 등불은 생명이라도 깃든 듯이 손 위에서 부드럽게 맥동하며 주위를 비추었고, 시즈와 마르크의 시선이 동시에 그 빛에 붙들렸다.


"그게 대체... 뭡니까?"


마르크의 목소리에는 놀람과 경계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 시즈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다가 손을 내밀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등불... 제가 잠시 들여다봐도 괜찮을까요?"


기사는 눈길을 시즈에게 고정한 채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등불을 건넸다. 시즈가 등불을 손에 쥐는 순간 빛은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기 시작했다. 응축된 빛은 마치 의지를 가진 듯 천천히 방향을 틀었고, 본당 가운데에 쓸쓸히 놓여 있던 머릿돌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빛줄기가 머릿돌을 비추면서 그 위에 새겨져 있던 글귀가 희미하게 빛을 머금었다. 그 광경을 본 시즈의 눈빛은 확신으로 가득 찼다. 문득, 낮에 무덤 앞에 홀로 서있던 기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등불이 향하는 방향과 빛나는 머릿돌.


모든 것이 하나의 흐름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이 기사가 그 무덤에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리라.


"기사님......"


시즈는 등불을 손에 든 채 기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대는 제가 여지껏 찾아 헤매던 존재입니다. 지고의 존재께서 말씀하신 섭리를 거스른 존재이자, 언령에서 이야기하는 사선을 넘어온 이여. 당신은... 세상을 바꿀 열쇠입니다."


시즈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머릿돌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조용히 언령을 읊기 시작했다.


"차갑게 식은 전사의 생명이 다시 타오르고,

침묵의 대지가 길을 속삭이면, 헤매던 발걸음은 운명을 마주하리라.

부서진 어머니의 심장이 본래의 자리를 되찾게 되면,

사선에서 돌아온 이가 새로운 시대를 영접하리라."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안에는 분명 확신과 감격이 서려 있었다. 시즈는 아텐시아의 말이 사실임을 깨닫고, 희망의 불씨가 여전히 남아 있음을 실감했다. 마르크는 그런 시즈를 곁에서 조용히 바라보았다. 반나절 전 본당의 머릿돌 앞에서 그녀가 언령의 구절을 읊었을 땐 믿지 못했다. 15년간 카노라스의 멸망과 신들의 침묵을 봐온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했으니. 그런데 지금, 머릿돌이 빛을 품고 반응한 이 순간 모든 것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기사는 조용히 그 시선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내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등불로 옮겨졌다. 빛을 응시하는 눈동자에서 아주 미세한 떨림이 일었고, 그는 자신이 사선에서 들었던 말을 되새기듯 천천히 구절을 읊기 시작했다. 기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시즈와 마르크가 동시에 숨을 멈췄다.


"대지의 힘이 깃든 발걸음이여.

무(無)로 돌아가는 강 저편에 닿은 그대에게 운명의 실이 엉키듯 새로운 길이 열리리라.

장막 너머로 돌아가, 오래전 신들의 잘못으로 빚어진 진실을 꿰뚫어 보라.

그리고 이 땅의 어머니의 심장을 찾아, 그 숨결이 이어지는 곳으로 나아가라."


기사가 언령을 읊고 난 후, 본당 안에는 한동안 침묵만이 감돌았다. 등불이 다시 은은한 빛으로 돌아가면서 머릿돌 위의 문장이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시즈는 경외와 놀라움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두 개의 언령이 한자리에서 만난 것이다.


시즈는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이 시대에, 지금처럼 눈앞의 진실이 선명하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그 감정을 조용히 되새기던 시즈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귀공께서는... 정말로 죽음을 넘어 이곳으로 오신 건가요?"


기사는 시즈의 물음에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마치, 본인조차 쉽게 단언할 수 없는 무언가를 정면으로 마주하라는 요구처럼 들렸다.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생각하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죽음을 자각했을 때, 저는 어두운 숲에 감춰진 강가에 서 있었습니다. 끝없이 흐르던 강의 종착점에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가 있었고, 그 밑은... 아무것도 없는 어둠뿐이었습니다."


"그곳에... 귀공 외에는 아무도 없었나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만, 강물에 발을 들이려는 그 찰나에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음성이 울렸습니다. 눈앞에서 들리는 것도, 멀리 메아리치는 것도 아닌... 의식을 가득 채우는 듯한 음성이었습니다. 의식 속의 음성이 사라진 뒤, 품 안에서 빛이 피어났습니다. 작은 등불 하나가 손에 쥐어져 있었고, 그 빛에 삼켜지듯 정신을 잃었습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무덤 속이었습니다."


"그 음성이 혹시... 조금 전에 읊으신 언령인가요?"


"그렇습니다."


기사의 말은 신비로웠지만 말끝에 서린 허탈함과 공허함이 대화를 무겁게 만들었다. 시즈와 마르크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죽기 전의 기억은 남아 있습니까?"


마르크의 물음에 기사는 대답 대신 입술을 굳게 다물며 시선을 피했다. 그 질문은 텅 비어버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는 말과 같았다. 흔들리는 눈동자 끝에서, 기사는 끝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생전의 기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담담한 목소리 안에는 막연한 외로움과 깊은 공허가 밑바닥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죽음을 넘어 되돌아온 기적 같은 생존의 기적은 본래의 삶을 잃은 채 시작된 것이었다. 시즈는 그 말을 곱씹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사의 표정에는 자신조차 인지하지 못한 설명할 수 없는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귀공께서는... 교회 밖의 그 무덤 앞에 계셨지요. 그곳에서 깨어나신 게 맞으신가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대에 귀공을 기억하는 이가 있지 않을까요?"


"없었습니다."


단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단호한 부정에 시즈는 말문이 막혔다.


"누구 하나 저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낯익은 얼굴을 단 한 사람도 찾지 못했습니다."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이번에는 짙은 허무마저 배어 있었다. 이름도, 관계도, 소속도 증발해 버린 삶. 기사는 죽음에서 돌아왔음에도 자신이 누구였는지 증명할 단 하나의 조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죽음을 건너오는 여정 속에서 무언가가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간 것일까. 시즈는 그 안에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단절의 깊이를 느꼈다.


"저는 서쪽 대륙 끝의 아우로라에서 왔습니다. 아우로라를 이끄시는 지고의 존재께서는 귀공과 함께 세계 곳곳에 내려온 언령을 찾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정 속에서... 귀공의 잃어버린 기억도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기사는 시즈를 똑바로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조용히 자리에서 벗어난 기사는 곧장 광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무겁고 묵직한 침묵이 발걸음마다 드리워지는 그의 뒷모습은 마치 낯선 세상에 홀로 던져진 자의 고독처럼 보였다.


"죽음에서 돌아와 온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고 느낀다면... 아무리 이런 막장으로 치닫는 세상이라 해도 제정신을 유지하기는 힘들겠지요."


마르크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교회 문 너머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기사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날 밤, 기사는 홀로 무너진 교회 본당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지붕이 꺼진 틈으로 드러난 차가운 밤하늘의 별들은 무심히 고요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기사는 그 별빛 아래의 침묵 속에 갇혀 있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온 자신을 다시 이 땅으로 부른 사명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지만 정작 본인이 그것을 이어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가슴 한가운데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텅 빈 허무가 자리 잡고 있었고 세상은 그 공허와 다르지 않았다. 피폐한 현실 속에서 그를 기억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고독이라 부르기엔 너무 냉혹한 침묵. 마치, 이 세상에 자신이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밤하늘에는 수천의 별들이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지만 그 어떤 별도 대답하지 않았다. 차디찬 빛은 위로가 아닌, 되려 고뇌를 더욱 깊은 어둠으로 끌어내렸다.


'내가 왜 돌아와야 했던 걸까... 무엇을 위해?'


입술 끝에 밴 탄식이 허공을 맴도는 그 순간, 조용한 걸음 소리와 함께 누군가 곁으로 다가왔다.


시즈였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아우로라에서는... 몇 시간 뒤에 다가올 여명의 시각을 가장 신성한 시간이라 여깁니다. 어둠을 헤치고 다가오는 하루의 첫 빛을 상징하기도 하죠."


시즈는 조용히 기사의 곁에 앉았다. 천장의 틈 사이로 흘러내린 별빛이 그녀의 옆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눈빛은 차분했고, 목소리는 더없이 담담했다.


"저희에게 여명이란... 단지 아침이 아닌 지혜와 새로움의 시작입니다. 아우로라를 이끄시는 지고의 존재께서는 이 땅에서 가장 현명한 존재 중 한 분이시죠. 그분께서는 언제나 이 땅의 지혜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아 오셨고, 오랜 세월 저희를 그러한 힘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시즈의 목소리는 더욱 조용하고 진지하게 들렸다. 그녀는 말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숙여 짧은 침묵을 한 뒤, 밤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귀공... 저는 귀공께 신앙을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 그것이 옳은 길이라며 이끌 생각도 없습니다만... 여명이 가진 의미만큼은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새로운 가능성. 저희는 늘 새로운 가능성을 마음에 새기며 낙관적인 믿음으로 스스로를 발전시켰죠. 그래서 저는 이 비참한 세상 속에서도 희망의 가능성을 찾고자 여기까지 왔습니다."


시즈는 기사를 향해 몸을 돌리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세상에 홀로 남은 그 기분은 제가 결코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겁한 도망에 불과합니다. 이 비참한 세상일지라도, 귀공께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분명 남아 있을 거예요."


그것은 강요가 아닌 믿음이었다. 기사는 잠자코 시즈를 바라보았다. 말끝마다 담겨 있던 확신은 한밤중의 냉기 속에서 따뜻한 숨결처럼 다가왔다. 그녀가 말한 가능성과 여명, 그리고 희망. 그 모든 것이 터무니없게 들리지는 않았다. 기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시즈의 말이 자신의 내면에 무언가를 심어 놓은 것만 같았다. 아주 작지만... 지워지지 않는 불씨 하나처럼.


"저는 여명이 밝아오면... 또 다른 언령을 찾아 이곳을 떠날 것입니다."


시즈가 일어나며 말했다.


"귀공께서 마음을 바꾸신다면, 해가 뜨기 전... 교회 입구에서 뵙겠습니다."


짧은 인사를 남긴 그녀는 조용히 본당을 빠져나갔다. 무너진 천장의 별빛이 자리에 홀로 남은 기사의 얼굴을 어슴푸레하게 비추고 있었고, 밤의 냉기가 갑옷 너머로 스며들었다.


긴 한숨을 내쉬는 그때였다.


——슈욱


하늘을 가르며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


함성과 함께 교회 외곽이 요동쳤다. 어둠을 가르며 날아든 화살이 지붕에 박히더니 순식간에 불꽃이 번졌다. 고요했던 밤은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찢겨나갔다.


"......무슨 소리야!?"


"화살이다! 적이다—!"


야습이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교회의 병사들은 혼란 속에서 다급하게 무기와 방패만을 들고 쏟아져 나왔다. 마르크 또한 급하게 뛰쳐나왔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이게 대체 무슨... 경계병들이 아무것도 확인하지 못했다고?"


마르크의 눈이 빠르게 교회 주변을 훑었다. 분명히 밤샘 경계를 강화하면서 감시조 또한 수시로 교체했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럴 리가... 이 정도 거리까지 접근했는데 아무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 마르크는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다.


"스무 명은 우회해서 적 궁수들을 처리하고, 나머지는 입구로 몰려오는 놈들을 막아내라!"


"알겠습니다!"


병사들이 지휘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마르크는 여전히 교회 외곽의 어둠을 주시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병력 이상의 무언가가 섞여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침투, 그리고 그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자신. 마치 교회 전체의 시야가 무력화된 듯한 기분이었다.


단순한 숫자 싸움이 아니었다.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교회 밖 어둠 너머로부터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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