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눈앞에서 달려오는 무리들의 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갈기갈기 찢긴 듯한 불협화음 같은 함성이 메아리치자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방패를 고쳐 쥐었다.
"놈들이 온다! 전투 준비!"
어둠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무리들과 교회의 병사들이 격돌했다. 첫 타격이 시작되면서 적들의 형상을 확인한 순간 마르크의 눈살이 찌푸러졌다. 오후에 두 차례나 마주쳤던 추적자들. 이 버러지들의 목표는 단 하나, 무녀일 터였다.
불길한 예감이 목을 죄어왔다. 마르크는 검을 쥐고 적들의 틈으로 뛰어들었으나 전투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급습이 시작된 지 불과 몇 분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이 방어 태세를 갖추기도 전부터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교회는 위태로운 균열 위에 놓여 있었다.
"막아라! 밀리지 마라!"
그 순간이었다. 추적자들의 칼끝이 병사들을 향해 박히기 직전, 푸른빛의 아우라가 병사들의 전면에 떠올랐다.
키이이잉——
갑작스럽게 생성된 방어막은 병사들의 몸을 감싸며 추적자들의 공격을 튕겨냈다. 찰나의 침묵 속에서 병사들이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뒤편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래 못 버팁니다. 지금 빨리 몰아내야 합니다!"
시즈였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 떨리는 어깨. 과도한 이능 사용 탓에 얼굴은 이미 창백했지만 목소리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지금입니다! 밀어붙이세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마르크는 검을 높이 쳐들고 소리쳤다.
"전열을 정비하라! 놈들을 교회 밖으로 몰아내라!"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전진하자 불리하던 전선은 일시적으로 균형을 되찾았다. 그러나 반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추적자들의 뒤편, 어둠 너머에서 기이한 기운이 밀려왔다. 짙은 검은색 아우라가 바닥을 타고 기어들어오듯 퍼지더니 그 중심에서 남색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앞으로 걸어 나오는 발걸음이 가까워질수록 병사들의 몸이 굳어갔다.
사도였다. 그의 등 뒤에서는 낮에 마주쳤던 크라인이 시즈를 바라보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얼굴을 가로지른 깊은 흉터 너머로는 증오와 광기가 번뜩였다.
"아쉽게 됐군. 사도께서 몸소 행차하셨으니, 네년의 그 보잘것없는 이능도 여기서 끝이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도가 허공으로 손을 휘두르자 시즈의 보호막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푸른 아우라가 찢기며 허공으로 흩어지자마자 병사들은 조금씩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밀려난다!"
"막아라! 버텨야 한다!!"
마르크는 상처를 부여잡은 채 이를 악물었다.
전세가 무너진 이유. 모든 이상한 조짐의 중심에 있는 존재는 바로 저놈이었다.
'...그래서였군. 우리가 놈들의 접근조차 눈치채지 못했던 건 저놈 때문이었어!'
그 순간, 사도가 순식간에 움직였다. 검은 그림자처럼 일그러진 형체가 허공을 가르며 시즈 앞에 도달했고, 사도의 손끝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향해 파고들었다.
차디찬 손끝이 시즈에 닿으려는 찰나—
쾅——
교회 후미에서 문을 벌컥 여는 굉음과 함께 땅을 울리는 발소리가 터져 나왔다. 숲의 어둠을 헤치고 돌아온 스무 명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 앞에는 피범벅이 된 기사가 서 있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번개처럼 솟구친 검이 청록색 잔광을 일으키며 허공을 그었고, 순식간에 사도의 왼팔이 잘려나갔다.
"——그아아아악!"
잘려나간 사도의 팔 끝에서 튀어나온 검은 피가 교회 바닥으로 흩어지자 사도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의 몸에서 터져 나오던 아우라가 흐트러지자 추적자들은 당황하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귀공!"
시즈가 외침 속에서, 기사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천천히 검을 되돌려세웠다.
"지금이다! 놈들을 밀어붙여라!"
병사들의 함성이 다시 한번 교회 안을 울렸다. 크라인은 이를 악물며 물러서는 와중에도 끝내 증오의 목소리를 남겼다.
"망할, 운도 좋구나. 언젠간 네년을 내 손으로 직접 무너뜨려주마!"
시즈는 기사의 곁에서 경멸이 담긴 시선으로 크라인이 사라지는 방향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을 본 크라인은 입꼬리를 비틀며 연막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잠시 뒤, 소란이 가라앉자 마르크는 궁수를 처리하러 갔던 병사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돌아온 것인가?"
"저 기사님께서... 홀로 절반이 넘는 궁수들의 숨통을 끊어놓으셨습니다."
"뭐라고?"
마르크는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기사를 바라보았다. 불화살을 쏘던 궁수들은 족히 30명은 넘었고, 그들은 숲과 언덕 뒤에 은밀하게 숨어 있었을 터였다. 단신으로 넘어가 혼자 그들을 처리했다는 말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진실로 예삿인물이 아니셨군요."
경의와 경계가 뒤섞인 목소리였다.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긴 싸움에 익숙해져 환호조차 잊은 그들이었지만 언령을 통해 세상의 진실을 엿본 이후로는 눈앞에 서 있는 이름 없는 기사의 존재가 전과는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그의 등 너머로, 뿌연 연기 너머로 비치는 새벽빛 속에서 병사들은 문득 오래 잊고 지냈던 감정을 느꼈다.
희망이라는 감각.
한편, 기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연기가 드리운 밤하늘이 서서히 열리면서 검게 흐르던 매연 사이로 하늘빛이 점점 스며들기 시작했다. 자욱하던 연무가 걷히며 드러난 하늘의 틈 사이로 쏟아지던 별빛은, 마치 그에게만 길을 열어주듯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기사는 하늘을 바라보며 시즈가 남겼던 말을 조용히 되새겼다.
'새로운 가능성... 그런 게 정말 남아 있는 걸까.'
여명이 찾아오기 얼마 남지 않은 하늘은 잿빛과 자수정빛이 뒤섞여 차갑고도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교회의 어둠 속에서 떠오른 빛이 서서히 그림자를 밀어내고 있는 가운데,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친 시즈는 조용히 교회 입구를 나섰다. 손에는 간단한 소지품이 담긴 보따리가 들려 있었고, 눈은 먼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사색에 잠겨 있었다.
그때, 마르크가 거친 갑주 소리를 죽인 채 조심스럽게 시즈의 곁으로 다가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녀님을 뵐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마르크의 진심 어린 목소리에 시즈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는 담담한 여운과 함께 작게 스며든 쓸쓸함이 함께 묻어 있었다.
"아직 정식 무녀도 아니랍니다. 그리고... 그날 구해주신 덕분에 제가 이렇게 살아 있잖아요. 그동안 보여주신 호의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 또한 무녀님의 이능 덕분에 살아남지 않았습니까."
"무명의 기사님 덕분이기도 하죠."
"그것도 맞습니다."
마르크가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는 결국 나타나지 않았군요."
시즈는 말없이 뒤를 돌아 교회 입구 너머를 바라보았다. 밤의 잔해를 품고 있던 빈 본당 뒤편은 얼어붙은 침묵만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었던 본당의 싸늘한 공기가 떠올랐다. 그의 고독을 이해했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서는 그가 나타나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는 법은 없죠."
그때,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서늘한 새벽 공기를 뚫고 떠오른 빛이 어둠을 몰아내며 하늘 끝부터 은은하게 색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을 바라보던 시즈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떠나야 할 때였다. 그렇게 몸을 돌려 교회 밖으로 나서려던 순간, 무너진 본당의 잔해 옆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
시즈의 눈이 커졌다. 무너진 본당의 잔해 틈에서 걸어 나오는 기사의 모습은 마치 어둠과 새벽빛이 교차하는 경계선에 선 자 같았다. 마르크 역시 놀라움 속에서 말을 잇지 못했다. 시즈는 반가움과 동시에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끼며 기사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귀공, 결정을 내리신 건가요?"
기사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떠오르는 태양을 향한 그의 눈빛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무언가를 억지로라도 붙들려는 고집과 조용한 결심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직 확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에 대한 믿음조차 놓게 될 것 같았습니다."
그의 대답에, 시즈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밤 자신의 말이 그의 텅 빈 마음에 닿았던 것일까. 이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그의 고뇌가 얼마나 깊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중요한 건, 지금 귀공께서 스스로를 위해 한 걸음 나아가셨다는 거예요. 차근차근 한 걸음씩 가다 보면 반드시 답을 마주하게 될 테니까요."
시즈의 말에 기사는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살짝 돌리며 짧은 숨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시즈는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음을 느꼈다. 비록 아직 마음을 다잡은 것은 아닐지 언정, 자기 자신을 믿고 한 걸음 내디딘 그 시작이야말로 희망의 싹이라 생각했다.
곁에서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마르크는 조용히 손에 든 물건을 내밀었다. 그 물건은 은빛의 작고 낡은 교회 증표였다.
"이곳 북쪽 멀리에 교회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리고 동쪽으로 열흘 정도 이동하시면 마을 하나가 나오죠. 이 근방에서는 가장 많은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 언령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얻으실 수도 있을 겁니다."
"귀중한 정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즈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자, 마르크는 갑자기 손짓으로 잠시 기다리라는 제스처를 한 뒤 교회 뒤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마리의 말을 이끌며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본 시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라진 카노르 평원의 기마대와 같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줄 알았던 말들의 혈통이었다.
"열흘은 너무 긴 시간이죠."
마르크가 말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 아이들은 카노르 평원을 달리던 기마대의 후손입니다. 제가 카노라스를 빠져나올 때 함께했던 말의 자식들이죠. 언젠가 다시 함께 달릴 날이 올까 싶어 교회 뒷산에 숨겨 애지중지 키워왔습니다만... 지금은 두 분의 여정길에 더 어울릴 것 같군요."
마르크가 말을 대하는 손길은 단순한 주인의 손길이 아니었다. 고삐를 쥐었던 손의 굳은살과 흉터, 그리고 말에게 속삭이듯 건네는 낮은 목소리에서는 과거에 그가 기마대였다는 사실이 조용히 스며 나왔다.
"말을 타고 가신다면... 마을까지는 사흘이면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마르크로부터 고삐를 건네받은 시즈는 단숨에 말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하나는 윤기 나는 흑마, 다른 하나는 금빛 갈기를 머금은 백마였다. 흑마는 거대한 근육질의 몸과 함께 위풍당당한 기세를 풍기며 강인함과 결단력을 상징하는 듯했고, 백마는 조금 더 작았지만 부드러운 금빛 갈기가 새벽빛에 눈부시게 빛났다.
"검은 말의 이름은 레클레스, 하얀 말은 다리아입니다. 둘 다 제 자식처럼 키운 아이들이니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세상에...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교회 또한, 오래도록 안전하길 진심으로 기원하겠습니다. 아텐시아의 지혜가 언제나 그대와 함께하길."
말을 바라보던 시즈의 얼굴에는 깊은 감동이 어린 채, 어느새 눈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작게 웃던 마르크의 시선은 어느새 하늘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교회의 안전은 신의 뜻에 달렸겠지요. 저도 언젠가 이곳을 떠날 날이 올 겁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남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저 또한 두 분의 여정길이 무사하길 빕니다."
마르크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시즈는 그 말에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감정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시즈와 기사가 각자 레클레스와 다리아 위로 올라타자, 두 말들은 놀라울 만큼 순순히 낯선 손길을 받아들였다. 말과 주인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마르크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고, 마르크는 조용히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태양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고, 두 사람은 교회를 떠나 동쪽으로 향했다. 밝아오는 하늘 아래로 그들의 실루엣이 작아지며 멀어져 갔다. 한동안 제자리에 선 채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마르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떠오르는 여명이 그의 얼굴을 비추자 눈빛에는 오랜 절망 속에서 처음 발견한 작은 희망이 담겨 있었다.
"저들이 나아가는 길이 희망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지. 나도... 내 자리를 찾아야겠군."
마르크는 잠시 발길을 멈추고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떠오르는 여명의 빛이 두 사람의 뒷모습을 감싸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교회로 발걸음을 돌렸다. 희미했지만, 표정에는 오랫동안 남을 미소가 떠올랐다.